붓다를 만나다8
홀로 돌아온 싯다르타의 말 … 아내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중앙일보] 입력 2017.08.25 01:00 수정 2017.08.25 03:13

싯다르타 왕자의 아내 아소다라는 아름다웠다. 처녀 때는 마을 청년들이 그녀를 흠모했다. 고종 사촌인 싯다르타와 결혼한 아소다라는 아들을 낳았다. 출산 1주일 만에 남편이 떠났다(위 이미지는 기사 내용에 맞춰 전통복장의 인도여성과 말 사진을 합성한 것).
왕의 스승과 다섯 젊은이가 찾아가
궁궐로 돌아오라 설득했지만 …
싯다르타는 다시 깨달음의 여정
명성 높은 요기 찾아 바이샬리로
나는 동문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여기 이쯤이었을까. 마부 찬나가 서 있던 곳 말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위험천만인 숲에 왕자만 남겨두고 홀로 돌아왔으니 오죽했을까. 동문 앞, 지금은 벽돌로 된 터만 남아 있다. 당시에는 이곳에 높다란 궁성의 건축물이 있었다. 그 건물 위에서 아소다라는 텅 빈 안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전쟁터로 떠났던 남편은 간데없고, 홀로 돌아온 남편의 말을 보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싯다르타에게는 애마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가와 함께 애마를 궁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재가의 삶엔 어디나 먼지가 쌓여 있느니

싯다르타가 돌려보낸 텅 빈 말의 안정을 보고서 숫도다나 왕과 아소다라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고심 끝에 숫도다나 왕은 사람을 뽑았다. 출가한 싯다르타를 설득할 참이었다. 왕의 스승격인 왕사(王師)와 신하의 자제들을 골랐다. 지혜를 갖춘 어른과 왕자의 동년배 친구들을 함께 보낼 셈이었다. 젊은이들은 출가하기 전 싯다르타와 청춘의 고뇌를 함께 한 친구들이었으리라.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는 현지 고등학생들. 29세에 출가한 싯다르타는 저들보다 열 살쯤 위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달라. 부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신다. 부디 궁으로 돌아와 달라. 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모두 포기하는 게 아니다. 진리를 찾는 일이 어떻게 산이나 숲에서만 가능하겠는가.”
이들의 애타는 간청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재가(在家)의 삶은 답답하고 번잡하다. 맑지 않은 일들이 어디에나 먼지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출가(出家)는 드넓은 공간에 사는 일이다.”

인도의 오지에서 일하는 아이들. 현지인들은 이곳의 생활방식이 붓다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다고 출가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머리를 깎은 출가자의 신분으로, 성직자의 신분으로, 목회자의 신분으로 ‘재가의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한마디로 ‘무늬만 출가’인 셈이다. 반면 머리를 기른 채 지지고 볶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출가의 여운’을 풍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 재가와 출가의 문제는 집 안에 있느냐, 집 밖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깎느냐, 깎지 않느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인도 산치의 불교 유적. 좌선하는 붓다의 가부좌자세는 인도의 요가에서 비롯됐다.

싯다르타 왕자는 힌두교에 조예가 깊었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철학적 물음들을 그는 깊이 품고 있었다.
절박함은 왕사와 대신의 자제들도 못지 않았다. 그들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의 설득은 치밀하고 끈질겼다. 그들과 왕자 사이에는 그야말로 ‘대(大)썰전’이 벌어졌다. 출가인가, 아니면 귀가인가.
“수행자들마다 진리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사실 그들도 의심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는 그처럼 알기가 어렵다. 하물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는가?”

싯다르타 당시에는 인도에는 여러 수행법과 수행의 스승들이 있었다. 저마다 장단점을 안고 있었다.
“이미 번뇌로 가득 찬 집에서 나왔다. 어찌 다시 번뇌의 집으로 돌아가겠는가. 해가 땅에 떨어지고, 히말라야 산이 무너져도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히말라야 산. 싯다르타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출가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단지 왕자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과 함께 수행하던 싯다르타는 훗날 고행을 멈춘다. 곡기를 끊다시피 했던 싯다르타는 다시 우유죽을 마신다. 수행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그때 다섯 젊은이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왕자의 곁을 떠난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왕자의 신변 보호’가 아니었다. 그들도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구도의 길을 가고자 했다. 더 훗날,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한 이들. 이 다섯 명의 젊은이가 바로 그 ‘오(五)비구’다.
붓다의 시대와 공자의 시대,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비슷했다. 모두 기원전 5세기 경이다.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몰락하고 더 큰 나라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숱한 살육이 자행됐다. 설사 왕족이라 해도 나라가 망하면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백성은 노예가 됐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에도 끼지 못하는 최하층민으로 전락했다. 그게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제자 300명이 따른다는 알라라 칼라마

카필라바스투에서 인도 북동쪽의 바이샬리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다. 싯다르타는 걸어서 그 길을 갔다.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 바이샬리에는 싯다르타 당시에도 많은 수행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알라라 칼라마는 고요 속에서 사는 이로 명성이 높았다.

바이샬리에 있는 불교 유적지. 탑 뒤로 높이 솟아 있는 아소카 석주가 보인다. 붓다 당시 바이샬리는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