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이 숨었다는 동이 토가족의 터전 호남성 장가계 무릉원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며 전통적 동이 9이의 하나인 래이족, 제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회이족 국가)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소호씨로부터 알 수 있듯이 조토템의 동이족) 우순(虞舜)의 흑도 문화에 대해 말한바 있지만 서량지는 우순은 맥족( 族)이며 맥족은 곧 동이부족을 이루고 있는 한 종족이라 잘라 말한다.( 族乃東夷部族組成之一 子)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 '순은 동이의 사람이다(舜是東夷之人)' "순(舜)은 제풍(諸風)사람이니 동이인"이라 하였고 또 맹자집주(孟子集註)8권에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 산동성 곡부아래의 연주 부하로 가서 살다가 명조에서 죽으니 동이족 사람이다(舜生於諸風 遷於負夏卒於鳴條 東夷之人也 )라고 했다. 그러니 배달환웅국, 단군조선은 그만두고도 요, 순, 우가 웅거한 곳과 역사만 잘 살펴도 한민족의 상고 대륙사는 그냥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93권 당기(唐紀) 9권에는 중국의 근본은 4夷와 같다(中國如根本四夷) 하여 중국의 근본은 사이(夷)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자치통감 195권 당기(唐紀) 11권에는, 중국의 근간은 4夷의 지엽이다(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라고 되어있어 한족(漢族)의 뿌리는 사이(四夷)의 가지와 잎이라 말한다.(見 율곤 이중재<중국인의 뿌리를 밝힌다>
장량(張良)은 소하(蕭何), 한신(韓信), 진평(陣平)과 "한초4걸(漢初四傑)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史記·留侯世家」,「漢書·張陳王周傳」등의 기록에 의하면 장량이 진섭(陳涉)에서 기병한 후, 소년 100여인을 모아 패공(沛公) 유방(劉邦)에게 보내고, "장량이 패공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자주 설하니, 패공이 기뻐해 그 계책을 자주 채용했다" 유방이 칭제(稱帝)한 이후, 막후( 幄)에서 계책을 모사해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덕으로 유후(留侯)로 봉했다. *산동성 미산호라는 큰 호수 왼쪽에 풍, 패라는 두 고을이 붙어있는데 유방은 풍에서 태어나 패에서 청년장교로 근무한 적 있어 후일 패공이란 칭호가 붙었다.
장량의 체질은 허약해 병치레가 잦았으나 유방을 위해 모책(謀策)을 내놓아 한(漢)제국 통일과 건설에 거대한 작용을 했다. 유방이 상황제(上皇帝) 보좌(寶座)에 오르자, 후사를 위해 공신들을 살륙했는데, 한신(韓信), 영포(英布), 팽월(彭越) 등이 차례로 피살되었으며, 소하, 장량 등은 채 도륙되기 이전에 이를 눈치채고 다행히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단순하게 장량이 도가의 선술을 익히기 위해 은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럼 장량은 어디로 갔는가? 또 왜 한의 조정을 떠났는가? 유방의 한나라는 장량, 한신 등의 걸출한 동이족 인물들에 의해 건국된 것이다.(유방 아버지가 산동성 풍패로 흘러들어온 동이족 초나라의 망명유랑객임. 항우나 유방 공히 동이족 초나라 혈통) 장량은 동이족 국가인 한(韓)의 후예다.(춘추전국시대의 제, 초, 연, 조나라와 마찬가지로 한(韓)이 동이국가임을 알고 읽을 것. 특히 한,위,조 인 소위 3진은 정통적 동이족 국가였으니 결국 진시황이 병탄한 진,초,연,제,한,위,조 6국은 모두 동이족 국가였다)
참고로 초나라 굴원은 저서 초사 이소에서 자신의 뿌리가 동이족 전욱고양의 후예라 말한 바 있지만 동이족 한나라 후예 한신은 늘 진시황에게 망한 동이족 국가 한(韓) 왕실을 재건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젊은시절 표모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동네 불량배에게 가랭이 밑으로 들어가라 놀림을 당했을때에도 바로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망한 한(韓) 나라 조실을 재건하기 위한 각오로 차고 다닌 칼이었다. 한신이 도박과 술에 쩔어 동거녀 서희에게 돌아오는 날이면 지혜로운 서희는 한실재건에의 웅지를 늘 강조해준 바 있다.
그런데 서희가 죽고 서희의 소중함을 뒤늦게 안 한신이 서희의 무덤만 지키고 하세월하자 서희의 가녀였던 10대의 상희가 불현듯 성장해 서희의 뜻은 한실재건이지 서희의 무덤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여 한신은 새로이 각오를 다져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같은 동이족 초나라 항우 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항우는 초라한 몰골의 한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말먹이 노릇만 하고 있었는데(벼슬이 낭중(郎中)에 불과하였고, 위계(位階)는 집극(執戟)에 불과) 같은 한(韓) 나라 출신의 장량이 유방을 천거하는 바람에 유방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장량과 마찬가지로 한신도 바로 한(韓)의 후예 동이족이다. 혈통이 동이족이었던 진시황이 동이족 국가들인 6국을 멸하고 자신의 혈통을 숨기고 동이족 혈통 친부 여불위마저 죽이자 한의 멸국에 비분강개한 장량은 박랑사에서 진시황 시해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도망가 진나라를 대신 멸해줄 사람을 찾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전통적 동이족 국가 호남성의 초나라 출신의 유방임을 알고 들어간다.(유방의 부친이 초나라 유민으로 같은 동이족이 몰려사는 산동성으로 이주)
유방이 바로 장자방이 태어난 산동성 고향사람이다. 그러나 장자방은 유방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진나라 복수를 해 준 것으로 만족하고 토사구팽을 피해 같은 동이족 토가족 마을로 스며들어 살다가 바로 치우천왕묘 근처의 산동성으로 들어와 묻히고 만다.
한(漢)족은 무엇인가. 한(漢)족 역시 장량, 한신이 유방을 도와 건국한 한(漢)나라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진시황 정(政)의 친부는 정통 동이족 여불위(呂不韋)이며 진나라 황실 성인 영(瀛)마저 동이족 성이라는 건 필자가 이미 「죽서기년」에 나오는 바임을 본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 밝힌 바 있다.
필자가 사천성을 들르니 그곳 향토설화에 동이족인 장자방이 말년에 토사구팽을 피해 산 깊고 물 깊은 무릉원 장가계의 동이 토가족(토가족은 노자의 도가사상을 추구하는 동이족 후예) 속으로 스며들어가 신병을 요구하는 한(漢) 조정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 그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음을 들은 바 있다.
그런데 다시 2002년 8월에 다시 호남성을 들르니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시속에 나도는 말이, 당시 장량은 유방이 공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얼어붙어 조정에 나아가 관직을 내놓았다. 유방이 이를 재삼 만류했으나 장량은 벼슬과 관개(冠蓋)를 모두 헌납하고 물러났다. 유방이 백운산(白云山)까지 쫓아갔으나 장량은 도를 배우기 위해 환화이거(幻化而去)하여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는 일개 희곡으로, 소설에 비벼져 전해진 것이다. 중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경극 <장량사조(張良辭朝)>는 바로 이러한 고사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이다. 「사기」기록을 보면, 유방이 태자 유영(劉盈)을 좋아하지 않아, 후일 여후(呂后)에 의해 "사지가 잘린 채 돼지우리간에서 살게 되는 척(戚)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했다.
대신들은 아주 어렵게 간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유방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유방이 공신들을 자꾸 쳐죽이고 영포도 죽이려 하자 영포가 먼저 반기를 들었다. 유방이 공신인 영포(英布)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와 옛 병이 복발한데다 화살맞은 상처까지 겹쳐 오래 살지 못할 줄 알고 다시금 태자를 세우려는 심정이 긴박했다.
장량이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입에 병이 났음을 빌어 다시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유방에게 사직서를 써서 말하기를, "집안 대대로 한(韓)의 조정을 따랐더니, 마침내 한(韓)이 멸망하여, 만금의 재산도 애착이 가지 않고, 다만 바라기는 한(韓)을 위해 원수인 강국 진(秦)을 복수해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제 세 치 혀로 임금의 스승이 되어 만호(萬戶)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자리에 서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치로 장량이 만족해하는 바입니다. 바라기는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노닐고 싶을 따름입니다."
전설에 적송자는 동이족 신농(神農)이 제왕이던 시절의 우사(雨師)였는데 능히 풍우를 거느려 늘 곤륜산 서왕모가 있는 곳에 당도해 나그네가 되었다. 대개 장자방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가들과 희극작가들의 붓끝에 장량이 도를 닦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부지하락(不知下落:幻化而去)의 고사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별도로 장량이 관리로 생애를 잘 마쳤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에는 유방이 태자를 폐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유방이 태자 유영(劉盈)을 폐하자 급해진 사람은 바로 유영(劉盈)의 생모인 여후(呂后)였다. 여후는 앞뒤 계산할 틈 없이 동생 여택(呂澤)을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문의했다. 장량은 본래 추천 천거하는 일에 주관하지 않기로 작정했었으나 여택이 강력히 요구하므로 비로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 일에 대한 사정은 말로 해서 능히 폐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 폐하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온 4 명의 장로가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 있으니 만일 그들에게 부탁해 하산하여 태자를 보좌하게 한다면 태자의 지위가 공고히 될 것이며 혹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여택이 사람을 보내 태자를 받들어 줄 것을 부탁하는 태자의 친필서신을 보내며 비사후례(卑事厚禮)하여 네 노인이 하산하기를 청했다.
유방이 영포를 쳐부수고 승리해 다시 조정에 들어 연회를 거행하는데 4인의 장로가 태자를 받들고 친히 연회석에 참례했다. 유방이 이들 4인의 백발노인을 보자 십분 처량하게 서로 놀랐다. 4인이 일일이 자신들의 성명을 고하고 안부를 나눈 뒤에 유방이 말하기를, " 원래 너희들은 먼저 번에 내가 너희들이 서로 도와주기를 바랬는데, 하나같이 나를 피해 쭈욱 볼 수 없었거늘, 오늘은 무슨 일로 내 아들과 함께 왔느냐? 이에 4인이 대답하기를,
"폐하가 사람들을 쉽게 모멸하므로, 신등은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도망가 숨은 것입니다. 태자가 인효(仁孝)하고, 현인을 존경하고 선비를 사랑하므로 천하인이 모두 태자의 노력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생명을 걸고 이 자리에 나왔으니 생명이 아깝지 않은 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름을 사모해 산을 내려온 것입니다" 유방이 태자를 보니 한쪽 팔뚝의 역량이(신하들) 이미 형성된 후여서 우모(羽毛:깃털)가 풍만하고 두려워 털끝하나 움직이기 어려운데, 곧 여의(如意)를 포기하고 다시 태자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漢書·張陳王周傳」와 「史記·留侯世家」중에 모두 기재되어있다. 「史記·留侯世家」가운데는 다시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끝내 태자를 바꾸지 않으므로, 유후(留侯)가 본래 이들 4인의 힘을 불러 초치한 것이다" 여후(呂后)는 이로 인해 십분 장량에게 감격했으며 유방사후에 보답하여 학도(學道)를 결속해 살 것을 강권하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인생 일세가 마치 백구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만큼 짧은데 어찌 스스로 고생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그를 하산케 하여 관직에 있게 하려 했는데, 장량은 이때 이미 나이가 많고 몸이 허약해 어떤 일도 하기 어려웠을 때였다. 혜제(惠帝) 6년에 장량은 병사했는데 시호는 문성후(文成侯)로, 소하(蕭何) 역시 한가지로 사후에 시호가 문종후(文終侯)가 되었으니 한결같이 문재(文才)로 안민입정(安民立政)했음과 선시선종(善始善終)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오직 사서에만 충실한 장건평(張建平)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통적인 사서상의 결론을 내린다. 전설과 소설, 희곡의 자료를 보면, 장량이 돌아간 곳은 한층 신비한 색채를 덮어씌운 것으로 인해 믿음이 부족하다. 단 장량이 신이 되었다는 것과 실제상 반영은 봉건통치자가 공신들을 살육한 사실에 대해 역대 하층 문인들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장량은 인생의 마무리를 잘 지었으며 이것이 비교적 신뢰가 가는 내용이다.
그런데 현지에서 듣고 접한 향토사료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즉 장자방은 여후의 득달로 인해 권력을 내어놓고 동이 토가족이 모여사는 호남성 장가계 무릉원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기는 전통적으로 동이족이 모여사는 산동성의 치우천왕 능묘부근에 와서 묻힌다.
다음 사진은 장량이 숨은 호남성 동이 토가족이 사는 무릉원이다. 도연명이 말한 바로 그 무릉도원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한 조정에 의해 삭제된 것 같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한 조정은 항우와의 쟁패과정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이 잡듯이 잡아죽였는데 소하나 장자방 마저 도망쳐 버리고 만 마당에 역사적으로나마 장량을 후대하였다고 기술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왕실의 역사왜곡의 사례는 한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신은 괴철과 항우의 한,초,제 3분지계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도와 한 왕실을 건국시키지만 유방은 이를 의심해 진평과 소하의 계책으로 끝내 한신을 삭탈관직하고 끝내 여후에 의해 권력쟁탈의 토사구팽 신세가 되고 만다. 다시말해 한왕실은 한신을 반역자로 몰아 죽인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한신이 유방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유방이 한신을 버린 것임은 한신이 추식사지한 일(밥그릇을 더 먹으라 밀어준 일)과 옷을 덮어준 일(탈의의지)을 들어 한신이 괴철의 한,초,제 3분지계를 마다하고 항우의 3분지계를 고사한 일이 바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 한신(韓信)이 한고조(漢高祖)가 자기 밥을 밀어 주어 먹이고(推食食之) 자기 옷을 벗어 입혀 준(脫衣衣之)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 徹)의 말을 듣지 않았나니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렸느니라.
한당의 사가들은 이에 대해 한왕실의 왜곡사에 비위를 맞추려는 듯 한결같이 여후의 한신 살해에 의해 결국 속 초한전의 참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견강부회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뒤에 언급하겠지만 장자방의 거취가 왜곡되었음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중국 역사무대에 있어 서한(西漢) 시기에, 자가 자방(子房)인 장량은 풍부한 신화색채를 지닌 전기적 인물이다. 사적(史籍) 기재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동이족 한인(韓人)으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5대가 한(韓)의 조정을 따랐다.
진(秦)이 한(韓)을 격파하자 장량은 원수를 복수하기로 맹세하여 자객들과 교분을 맺고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지만 미수에 그치자 하비(下 :지금의 강소성 수녕( 寧) 서북)로 도망가 숨어 있다가 다행이 황석공을 만나 <태공병법> 3권을 얻는다. 후일 유방에게 귀부해 모계로 천하도모를 기획한다. 그는 동이 6국이 병탄 된 뒤에 영포(英布)와 팽월(彭越)을 연결하고 한신을 중용해 항우를 쫓아내는 정책으로 유방의 신뢰를 얻었다.
유방은 알찍이 그를 포상하며 말하기를 무릇 장막 뒤에서 계책으로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자방 만 못하다 평했다. 천하가 이미 정해지자 장량은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런데, 세 치 혀로 임금의 스승이 되고 만 호에 봉해진 개국공신이 갑자기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을 마다하고 질병을 핑계로 용퇴하여 왕실과 관계를 끊고 사가도 폐문하여 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거생활을 한다. 그는 이때 무릉원 장가계로 스며들어간 듯하다.
그리고 죽은 뒤 그가 묻히기를 원했던 동이족의 터전 산동성에 묻힌 듯 하다. 「한서(漢書)」기록에 의하면 장자방은 여후(呂稚) 6년인 182년에 죽어 제(齊)나라 북쪽 곡성산(谷城山) 아래 황석(黃石)에 묻혔다고 하는데 이 곳은 현재 산동성 제수(濟水)의 북쪽이다. 그의 만년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도 중설이 하나가 아니다.
지금의 하남성 난고현(蘭考縣) 현성(縣城) 서남 6Km의 조신장(曹辛庄) 정거장 남측에 장량의 묘가 있는데 높이는 10M에 오래된 잣나무가 묘를 울창하게 두르고 있다. 전설에,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희롱하자 장량은 병을 핑계로 모 처에 은거했는데 하나는 무릉원 장가계요, 또 하나는 묘가 있는 바로 이 곳 지금의 하남성 난고현(蘭考縣)인 동혼현(東昏縣) 서남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해 살다가 죽은 뒤 그 곳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당대(唐代)의 「괄지지(括地志)」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한나라 장량의 묘는 서주(徐州) 패현(沛縣:유방이 성장한 곳) 동쪽 65리에 있어 유성(留城)과 서로 가깝다" 하고 "옛 유성(留城)은 서주(徐州) 패현(沛縣) 동남 55리인데, 지금 성내에 장량의 사당이 있다" 했다.
원래 유방이 후(侯)에 봉했을 때, 거듭 장량을 "스스로 제(齊) 3만호를 선택"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장량은 유성(留城)에서 유방을 보고 유성을 봉지로 달라하여 장량의 무덤이 유방의 고향인 패(沛)에 있게 된 것이라 하며 장자방은 스스로의 죽음을 내다보고 3만 호의 제후마저 고사하고 시시각각 옥죄어오는 여후의 권력의 칼을 피하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장량은 여후의 간청으로 4인의 장로를 인도해 여후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는 불후의 공로를 세웠음에도 여씨파(외척)가 득세한 조정에 일관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장량을 비롯한 한실창건의 공신파가 피범벅으로 권력암투하는 과정에서 여후의 일족들에게 공신파의 하나로 제거될 운명임을 알고 피했던 것 같다. 결국 여씨의 외척세력이 공신들의 집요하고 끈질긴 역공으로 외척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고 조정을 되찾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보면 현명한 장량이 자신이 주도해 건국한 한실이 외척에 넘어간 것을 원했을 리 없으며 일시적으로 처신을 잘못해 자신과 평생 함께 해온 모든 공신들과 홀로이 적이 되어 평생의 업을 그르쳤을 리 없다고 필자는 보고있다)
유방이 서주(徐州) 패현(沛縣)의 유성(留城)으로 장자방을 찾아왔을때는 아마도 영포의 난을 쳐부수고 이를근심하던 부모를 위해 자신이 청년장교로 일했던 바로 그 동헌에 부모를 위해 궁전을 지어 바치고 대풍가까지 지어바치고 연회를 열었던 시기로 이때는 이미 유방의 병이 심해져 태자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말년이었다.
따라서 권력의 중심은 척희의 아들 여의에게 태자를 빼앗긴 정실왕비 여후(여치)가 사력을 다해 장자방을 매수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빙성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사진은 유방이 패업을 이루고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부모님이 걱정하여 영포의 난을 제압하고 부모의 근심을 위로하기 위해 궁전을 지어 바치고 대풍가를 지어 위로했다 전했다고 하는 바로 그 궁전이다. 물론 후일 재건축한 곳이다. 유방이 부모를 위해 궁전을 지은 곳은 현재 패현의 박물관이다.
필자가 직접 찾아가 비문을 읽어보니 그 뒤 오랜 세월 뒤 이 곳은 폐허가 되어 비석만 전하였는데 비석에 전하는 내용대로 다시 복구해 박물관으로 기념하고 있다고 전한다. 유방은 원래 이곳 서쪽의 풍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청년시절 패로 와서 교육받고 성장하여 이곳의 영웅호걸과 사귀고 이곳에서 기병하여 장군이 된 곳인데 후일 자신이 장군이 된 이 곳에 궁전을 지어 부모에게 바친 것이라 한다.
산동성의 분위기는 장자방의 박랑사 얘기도 그렇지만 양산박의 영웅호걸처럼 본래 무용담이 많이 있는 영웅들의 본거지이다. 이는 마치 일본의 중세 관동지방이 백제 무사도가 널리 퍼지고 백제 무술도장이 수없이 세워진 이유에서 근거하는 것 처럼 지나족에게 무신으로 추앙되는 치우천왕의 근거지로 황제와 치우의 쟁패 이야기가 깃들고 춘추전국시대의 동이족 국가 제나라 안평중 안자와 관중의 무용담이 깃들여서 그런 것이다.
산동성 패현에 있는 한고조 유방의 유적지.유방이 청년장교시절 근무한 고향 산동성 패현으로 제왕이 된 뒤 영포의 난을 제압하고 부모를 위해 궁궐을 지어 연회를 열고 대풍가를 지어바친 곳의 전경(사진1)&지금은 패현의 고고학 박물관이다.(박물관 2층:사진2,3) 기록에 의하면 유방은 제왕이 된 뒤에도 늘 고향인 산동성 풍현과 패현을 잊지 못했다 하며 동이족의 습속인 8신제로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한다&유방이 행차했을 적 한나라 저자거리를 재현해 놓은 패현 박물관 옆 도로(사진4)
호남 상서(湘西:호남성 동정호에서 내려가는 물을 湘江이라 한다) 동이 토가족(土家族) 및 동이 묘족(苗族) 자치주 대용시(大庸市)에 장가계(張家界)라 이름붙은 풍경구에 청암산(靑巖山)이라 칭하는 곳이 있다. 이 곳은 산도 기암괴석이요 구름도 기이하며 나무와 물도 기이하리만치 깊고 맑아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선석지(仙釋志)」에 기재하기를, "전설에 따르면, 장량은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노닐었다. 그 묘는 청암산(靑岩山)에 있어 때에 따라 숨겨졌다가 때에 따라 나타난다"라 했으니 이는 청암산의 안개가 많은 이유를 닮은 것이다.
<능묘지(陵墓志)> 권 6에 역시 말하기를, "한나라 유후(留侯) 장량묘는 청암산에 있다. 장량은 황석공 책을 얻은 후 적송자를 좇아 노닐었다. 읍중(邑中) 천문(天門)과 청암의 각 산에 유적지가 허다하다." 장량은 일찍이 후(侯)에 봉해진 초기에 유방을 향해 호소하기를, "원컨대 인간사를 포기하고 적송자를 좇아 노닐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따라서 그는 도를 좇아 은둔했으며 청암산의 심산야림에 은둔하여 노닐었다 하니 이 또한 이치가 없지 않다. 호남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장가계에 실지 가 보면 상당히 중시된다. 단지 애석하게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유적지가 흩어져 남은게 없고 장량묘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장자방을 애지중지한 유방이 그를 유후(留侯)에 봉했을때는 이미 유방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공신들을 하나하나 잡아 죽이면서 태자책봉과 왕위계승에 신경을 쓰느라 척부인의 태자 여의를 사이에 두고 여후와 공신들이 암투가 극심해 공신들이 죽어가고 떠나가고 하는 와중에 여후에게 휘둘릴 것을 안 장자방이 병을 핑계로 같은 동이 토가족이 사는 장가계로 들어가자 토가족과 신병을 인도하기를 바라는 여후세력간에 모종의 알력이 있었으나 토가족의 강력한 연대로 장량은 무사히 여생을 마치고 산동성의 동이족 제나라 영토 패(沛)에 묻히게 된 것이다.
다음 사진 역시 장량이 숨은 호남성 동이 토가족이 사는 무릉원이다. 도연명이 말한 바로 그 무릉도원이다.
*참고로 장자방은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암살할 적에 단군묘(사당)에 재배심고 하고 떠나는데 마치 김유신이 단군굴에서 삼신상제님에게 심고하고 삼국통일의 검을 받았다는 기록(이 기록이 정통성을 주기위해 왜곡된 듯 하지만 아무튼 정통성을 얻기 위해 이러한 기술형태가 보인 것으로 판단하면 되겠다)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장자방에 대한 정일영의 기록을 통해 단군 신앙과 치우신앙 그리고 동이혈통 진시황과 조(제비)도등 족의 동이족 연나라 그리고 진시황 영정의 6국병탄과 갈래갈래 갈라진 단군조선의 열국시대 돌입 속에 얼켜진 상황을 종합적으로 음미해 본다. 동이혈통 진시황은 동이족 6국을 병탄해 동이족으로부터 깊은 반감과 원망을 받았고 지나황실의 대통 주나라를 멸한 것으로 인해 화하(한족의 모태)족으로부터도 원억을 샀다.
秦始皇의 횡포와 연나라의 멸망
한편 진시황은 이미 중원열국을 정벌하였으나 한족은 깊이 진족을 멸시하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주왕이 황음무도하여 나라가 亡하였으나 유王이 진나라 사람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하여 오랑캐에게 한족의 황제가 죽었다고 천지 대변이라 하여 깊은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그 세가 강대하여 능히 백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이 백으로 헤아릴 수 있는 세력이니 당시 연이 비록 강하나 진시황은 능히 정복할 수 있음에도 유일하게 남은 연나라 征服을 중지 한 것은 연은 다른 열국과는 달리 조선 제국의 열후이니 비록 분열 상태이기는 하나 급하면 조선 제국에 돌아가서 통합할 것이니 자칫하면 조선 제국과 충돌할 것임으로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는 아직도 강남 지역은 불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조선 제국과 충돌하여 장기전으로 陷入함은 큰 위험을 가져올 것임에 연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조선 제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조선 제국에 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浿水를 국경으로 하고 우북평에서 천진에 이르는 패수변을 공지로 비워 두어 양국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양국간 국경 충돌을 예방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제국의 황하 일대의 燕의 고지를 잃는 것은 단군의 故地를 잃는 결과이나 연이 분리하여 王을 칭하고 조선 제국과 맞서 오랜 세월 싸워 통일이 어려운 상황인데 연은 중원 고도를 이미 잃고 요동으로 후퇴하여도 항복할 뜻이 없었다.
그것은 연이 왕을 자칭하고 국토를 분열시켰으나 동족의 멸망을 보고 어찌 할 것인가 백성들의 희생을 어찌할 것인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秦이 연을 멸한 후 새로이 연후를 봉함에 있어 반드시 연인을 핍박하지 말 것을 전제로 진의 요청에 동의 한 것이라. 그리고 공지로 비워 두는 공지는 조선의 광역으로 인정하고 그 공지는 조선이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원北역과 東역의 조선 제후국들의 진나라에 대한 항거를 후원하지 아니 한다는 조건으로 상호 불가침조약을 하고 조선 황제는 진시황을 도와 연을 공벌하였다 여기서 조선 제국은 연이라는 동족을 잃고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하였다. 조선은 열국 분립 시대여서 진시황과의 쟁패를 피하고 산동 三十 여군을 진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여 진은 산동에 험색한 곳에 關을 수축하고 험쇠를 의지하여 갑병으로 국경을 수비하였다.
(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書傳』)
서전에 의하면 이러한 국경선 너머 공지를 두어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였는데 한이 진을 멸한 후에도 그것을 유지해 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은 국경과 안쪽 河北省 南皮縣 東南八理 지점에 千龍城을 축조하고 패수 안쪽으로 공지를 따라 겹겹이 방위 진지를 구축하고 최정예 중병을 배치하여 조선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것은 진나라 주위에는 다만 강력한 동이족이 그들의 중원 동북 故土를 찾기 위해 침입할지 모를 것임으로 준비한 것이다.
秦은 二代에 자체 내분으로 亡하고 漢나라는 진나라가 처참한 싸움 끝에 이룩한 통일 중원을 그대로 넘겨받아 그 영토를 보전 확장함으로써 후세 중원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연나라등 동이족을 위시한 수十개 다수 민족으로 大변혁을 성취하였다. 진시황이 몽활장군을 시켜 北녘의 적(조선과 흉노)을 공격하여 하남땅과 河南의 단군 제국의 四十四현을 약취하고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그 난폭한 군사 행동을 후세 사가는 비록 비난하였으나 종국에는 다행한 일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조선족은 포로가 되어 勞役에 동원되었다. 후한서에 진한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옛날 진나라에서 망한 사람들이 苦役을 피해서 조선 반도에 와서 땅을 갈라 주어 마한이라 하였는데 진나라 말과 닮아서 秦韓이라고도 하였다.
(辰韓耆老自言秦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
진시황의 中原통일은 동이족에게 큰 타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후세 중국 사기는 진나라의 관계 역사를 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 왔다. 진은 한족에게 완전 동화하였음으로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中國而純乎人欲則化夷爲夷狄而知則天理則化爲中國秦本狄不得幽中國之會盟 『春秋』)
중국의 깨끗하고 순수함이며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에 동화코자 함에 오랑캐도 중국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를 알면 중국인이 되는 것인 즉 진나라는 본시 오랑캐라 중국 열후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국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그 세가 天下에 진동하여 감히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였다. 진시황이 韓나라를 멸한 후 韓나라의 귀공자 張良 호는 子房으로 장자방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키에 이목이 수려한 귀공자가 있었다. 그는 韓나라에 五代 공경을 지낸 가문이 멸망당함으로서 진시황을 죽이고자 절치 부심 하였다. 하루는 친구의 소개로 창해(요하서남)에 天下역사로 알려진 예洪星을 만나기 위하여 친구와 함께 그를 창해로 찾아갔다. 韓나라는 동이족과 한족이 혼거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상호 친교도 많았다. 장량은 창해에 예홍성의 집에 가서 그를 찾아 인사를 나눈 후 진시황을 죽일 계획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당시 조선 사람도 무도한 정벌(연나라)로 무수히 학살당하였음으로 적개심이 강함을 아는 고로 마음놓고 털어놓았다.
이르기를 진시황이 연을 파하고 산동 하북의 동이족을 마구 학살하여 무수한 난민이 東으로 피난하였거니와 연왕으로 하여금 태자 단을 잡아 보내면 연을 멸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연을 멸하였으니 천지 원수라 시황을 죽이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존형을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이에 예홍성은 분연히 일어서며 말하기를 이일을 내가 해내리라 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난 후 말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나서 나라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조선족의 기상이라"하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니 그는 원래 괴력을 가진 역사라 양인은 굳게 다짐하고 날을 받아 하남성 양무현으로 향하였다.
출발에 즈음하여 요하 서안의 단군 묘를 참배하고 양무현박랑사중에 농부를 가장하고 120斥의 철수를 습속에 숨겨 놓고 기다리던 중 지시황의 행차가 어가를 타고 앞뒤로 무사가 삼엄하게 호위하고 지나가니 접근할 수 없어 三十보거리에서 크게 소리치며 달라붙어 철퇴를 날리니 진시황은 혼비백산하고 시종 대신이 탄 부차가 맞아 산산조각 나고 시종이 여러명 죽었다.
이와 같이 진시황에 대한 동이족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진시황의 위세에 위축되어 있던 지나족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진시황의 외모는 코가 높고 등등하며 눈이 길게 째져 매와 같이 매섭고 일에 임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품성이라고 한 통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순행이 형산남군에 이르러 대풍을 만나 행차를 중단하고 좌우가 이르기를 앞에 있는 상산 사신의 노함으로 인한 것이라 하였다. 시황이 그 사당이 누구의 사당이뇨 하니 좌우 가로되 요 임금의 두딸이며 순인군의 왕비입니다 하였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 대노하고 직시 죄수 三千명을 동원하여 그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벌목해 버리고 산상에 올라 그 길로 남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해석해 보자 그 사당의 신이 노하여 大풍이 일어났다면 고사를 지내고 도움을 비는 것이 진시황의 관습으로 보아 당연한 것인데 진시황은 틈틈이 함양에서 태산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행차하여 제사를 올리고 신을 철저히 섬겨 왔다. 그러나 여기서 이와 같이 노한 것은 사당의 주신이 지나족의 정통왕인 요순의 가통으로 그 후계국 주나라를 오랑캐의 나라 진이 멸망시킨 데 대해 노여움을 보인 것이라고 시황이 이에 반발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것이라 시황은 행노에 사당을 참배하고 치우사당에 매년 친히 제사를 올렸는데 여기서는 이와 같이 행동하였다.
堯임금은 그의 二女를 舜임금의 왕비로 출가시켰는 바 이러한 정략적이고 더욱이 친족간의 혼인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書傳』에 舜仁君과 堯女는 四從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어린 딸 둘을 모두 늙은 순인군에게 바치지 아니할 수 없음은 그가 순에게 대권을 양위하면서 천명이라 하여 비통한 말을 뒤풀이한 것으로 보아 일족의 안전 보장을 얻고자 한 일 것이다. 순인군의 아내가 된 堯女는 늙은 舜이 세상을 뜨자 또한 스스로 운명을 한탄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두 자매가 얼싸안고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였다고 한다. …却說…
세상이 하늘 같이 두려워하든 진시황을 습격하여 비록 죽이지는 못하고 잡혔으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에 임하는 조선족의 태도에 크게 용기를 얻은 한족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유방과 항우가 패에서 일어났다. 한족은 주나라를 이은 정통 국가로서 류방이 세운 한나라가 되었다. 초나라의 항우는 한나라(漢)유방에게 패망함으로서 중원의 오랜 전란은 끝나고 한족(지나족)이 중원을 통일하였다. 진시황의 연나라정벌로 많은 영토를 잃은 번조선왕 기준(기후의 손자)이 이제 漢寇를 단독 방어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임에 요서요토의 방위를 강화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때에 한나라는 진을 멸하고 이미 설치되어 있는 조선과 진과의 국경 패수(황하북로 서쪽)에 이르는 국경선을 그대로 답습하기로 약정하였다. 한나라 역사 기록에는 멀고 험한 곳으로서 지키기 어려워서 진시황이 설정한 국경선을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하북과 산동 일대는 동이족이 개척하여 비옥하고 중원 제일의 문화적 선진 지역인데 멀고 험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일까?
(秦滅燕屬遼東爲激漢興爲其遠亂守復修遼東故塞之浿水爲界 『通易』)
유방이 태어난 산동성 미산호 옆의 풍현. 인구 2-3만의 작은 소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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