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7. 17:11ㆍ카테고리 없음
“핵을 가진 북한이 두려우십니까?” | ||||
피터 양 목사, 20년 북한 사랑 소개 | ||||
| ||||
캐나다 이민 1.5세 피터 양 목사는 1989년부터 북을 오가며 ‘사업’을 해왔다. 처음엔 이런저런 도움으로 북 쪽에 콩우유 공장을 만들어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콩우유를 공급하다가, 북 쪽 전 지역에 사진현상소를 차려놓고 그 수익금으로 중국에서 원료를 사 들여와서 콩우유를 만든다. 그는 묻는다. “북한이 가진 핵 때문에 두려우십니까?” 그리고 대답한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피터 양 목사는 춘천 강원대학교에서 열린 ‘2007 성서한국 영역별 통일대회’에서 7월 26일 저녁, 그동안 남몰래 펼쳐온 사랑의 사업을 조심스레 소개했다. 그가 처음 ‘북 쪽의 조국’과 만났을 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에 방문하려고 중국 베이징 북한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대사관 주위를 몇 바퀴나 돌면서 들어가기를 머뭇거리다가 겨우 들어갔다. 드디어 영사를 만나 북한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더니, “왜 조국에 들어가고 싶냐”고 묻기에 “평양에 기독교인이 있나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그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부르심’을 따라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날 이후 구하는 것마다 이뤄졌다”고 말했다. 별로 심각하게 구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1989년에 처음 북한에 들어가 평양 사람들을 만났을 땐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가 배워온 바로는, 그 사람들은 화만 내야 하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널려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갱이들을 만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땐 “내 힘으로 다가가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돌이키게’ 됐다. 삶으로 북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 어느 날 ‘부흥’ 시디의 수익금을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여러 지역에 콩우유 공장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 “조국에 돈만 쏟아 붓는데, 벌어다 쓰십쇼”라는 말과 함께, 식당·사진현상소 등을 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게 됐다. 그 말을 듣고 미국에 가서 집회 말미에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날로그 사진 현상기를 싸게 사서 제3세계에 파는 사람이 현상기 20대를 내놓겠다고 나섰고, 어떤 사람은 운송비를 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사진현상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북의 각 지역 15군데에 그 기계를 들여다 놓고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중국에서 원료를 사서 콩우유를 만들어 각 지역에 나눠서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 거의 매달 들어간다. 한 번은 피터 양 목사를 담당하는 국장이, “황해도에 부모 없는 아이들 모아놓은 학원이 있는데, 배급을 못해줘서 어렵다”는 말을 해서 그곳에 가게 됐다. 황해도의 고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양 목사는 12월인데도 불을 피워주지 못한 채로 있는 아이들을 보고선, 한 명씩 꼭 안아줬다고 한다. 안아주고 또 안아줬던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 목사는 오산학교가 있던 곳에 자리 잡은 콩우유 공급소의 담당자를 인터뷰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는 그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다. 그의 얼굴엔 기쁨이 묻어난다. 양 목사는 “평양에 아이들만 먹던 것을 우리 고장 아이들에게도 먹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라고 했다. 또 북 쪽과의 합작으로 시작한 식당은 북 쪽이 이제 이자를 다 갚아서 합작이 끝났다고 말했다. 양 목사는 4%의 이자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 진심이 묻어나지 않을 수 없다. 양 목사는 삶으로 다가가는 것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북한을 계속 다니고 있다.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다르다면 단지 북한에서 한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