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역사에세이] 정사붐 촉발시킨 윤심덕 이야기
1925년 초가을 서울 을지로 3가에 있었던 광무대의 배우 화장실에서 선배인 석금성이 신출내기 윤심덕의 얼굴 화장을 손질해주고 있었다. 「어떤 잠재심리의 표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윤심덕은 별나게 붉고 진하게 입술을 칠했으며, 여러 번 충고했으나 들어먹은 적이 없었다」고 석금성은 회고했다. 윤심덕은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를 나와 서울 여자고보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엘리트요 신여성이다. 신상에 상처입은 일이 있어 1여년 만주지방을 여행하고 심기일전코자 성악가에서 연극배우로 변신, 그 첫 무대에 선 것이다.
사진설명 : 현해탄에 투신해 정사했을 때의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 몽타주.
「동도」라는 작품으로 그녀가 맡은 안나역은 사나이 거짓사랑에 속아서 신명을 바친 순박한 여인이다. 한데 윤심덕은 대사마다 흐느낌과 울음 때문에 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무대 뒤에 나와있는 윤심덕을 보고 연출자인 박승희가 충고했다. 「배우는 관중을 울려야지 자신이 울어서는 안 된다. 배우가 울면 관중의 마음 속에서 슬픔이 증발해버리는 법이다」고 . 다음 공연부터는 미리 실컷 울어 눈물을 말리고 나오라는 말을 듣고 극장문을 나오려 하는데 꽃집에서 장미 꽃다발 하나가 윤심덕에게 전달되었다. 꽃 속에 꽂힌 명함을 본 윤심덕은 그 꽃다발을 땅에 던져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해 누군가가 부축해야만 했다.
윤심덕이 무대에서 운 것은 실은 자신의 처지를 운 것이며 그토록 울린 자가 바로 그 장미 꽃다발을 보낸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에서 돌아와 노래로 서울바닥을 누볐을 때 유혹의 손길이 여기저기에서 뻗쳤으며 그중 하나가 백만장자의 아들 이영문이라는 이였다. 그는 조선악단을 중흥시키는 것이 여생의 꿈인데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후원할 생각이 들었다 하며 요구한 대로 뒷받침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조선호텔 식당에서 만나 위장된 유혹의 망에 철부지 새 한 마리는 걸려들고 만다. 윤심덕에게는 도쿄 유학시절에 사랑을 맹세한 애인이 있었으며, 그 애인 김우진에게 사연을 말해 동의까지 얻었다.
음악중흥사업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우선 살집을 마련해주었으며 음악학교 용지를 물색하는 등 사업이 진행되어 나갔다. 이렇게 진행시키면서 집 밖에서 만나던 것을 자기 양옥으로 불러 만나고, 낮에 맞나던 것을 시간이 안 난다는 핑계로 밤에 만나고, 응접실에서 만나던 것을 병을 핑계로 침실로까지 불러들였다. 그러는 사이에 항간에 소문이 나돌았다. 이가의 양옥 방 침실에서 비명소리가 났느니, 여자 울음소리가 났느니, 윤심덕이 이가의 첩으로 들었느니, 윤심덕이 돈에 환장했느니 하는 와중에 그 소문을 들은 도쿄의 연인 김우진으로부터 절연장까지 날아들었다.
이에 충격을 받고 1여년 동안 만주 유랑을 떠난 것이다. 소문을 잠재우고 김우진의 사랑도 회생시키는 데 필요했던 진통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와 심기일전을 위해 여주인공으로 서게 된 토월회 연극 주제가 마치 그녀의 일생을 다룬 것만 같았고, 또 그 무대 뒤에서 받은 꽃다발이 바로 자신을 망친 그 자였던 것이다. 그는 마의 새장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절연장을 보낸 김우진이 자신의 진정을 실감할 때까지 침묵의 데이트를 했다. 그들 사이에 앙금이 가시고 사랑이 재연되었으나 그것이 기구한 숙명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를 느낀 것이다.
그 무렵 일본 오사카에 있는 레코드회사에서 녹음교섭이 들어왔다. 그녀는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녹음을 하고 예정에 없던 곡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래가 자신이 작사하고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의 곡에 맞추어 부른 「사의 찬미」다.「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메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 나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서름」. 사흘 동안 취입을 하고 윤과 김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취합해보면 이렇다. 오후 11시 한밤중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연락선 덕수환이 오전 4시즈음 대마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양장을 한 여자와 중년 신사 한 명이 껴안고 갑판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에 배를 멈추고 인근 해역을 수색했으나 시신을 찾을 수는 없었다. 승객명부에서 사라진 남자는 전남 목포부 수교 김수산(30)으로 돼 있고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173번지 윤수선(30)으로 돼 있었다. 김수산이라는 필명을 쓴 김우진은 지주의 아들로 1897년 장성에서 태어나 구마모토 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연극 창작과 연출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으며, 그 관계로 윤심덕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24년에 졸업과 동시에 고향에 돌아와 토지관리를 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토지에 묶인 자신의 신세를 비탄하는 나날이었다 한다.
「사의 찬미」가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심금을 사로잡고 있을 때 정사한 윤심덕과 김우진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정사 후 5년이 지난 어느날 김우진의 아우인 김익진이 총독부 외사과에 출두하여 이 두 사람을 찾아봐 달라는 수색원을 제출한 것이다. 정사설을 부인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지친인 아우가 제출한 수색원의 근거는 이러하다. 윤과 김이 바다에 뛰어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윤과 김이 일등실 선원을 돈으로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말을 내고 이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이름으로 상하이로 갔다가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오카의 한 신문사 사장이 로마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으로 보이는 한 쌍의 부부가 악기점을 경영하며 남편은 극문학을, 부인은 성악공부를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기행문이 동기가 된 것이다. 또한 그 방증으로 「사의 찬미」를 취입할 때 반주하는 동생 윤성덕에게 「내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나를 찾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과 거부인 김우진의 부모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시신이나 유류품을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은 점, 그리고 윤심덕의 집에서 일절 윤의 상을 치르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심지어는 「사의 찬미」가 떼돈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레코드사로부터 3만원이라는 거금을 미리 받고 사랑의 도피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었다.
동생 윤성덕은 『언니(운심덕)는 만인의 호기심 속에서 익사했거나 호기심이 살해한 것일 뿐 죽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하고 영원히 그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의 죽음을 믿지는 않겠다고 말했었다. 물론 총독부의 수색원에 대한 이탈리아 영사관측의 회답은 레코드 가게를 하는 한국인 부부를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있었고-.
신여성이 살고 싶고 살아갈 삶의 구도는 전통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고 부여하는 가치체계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가치갈등에서 20∼30년대의 한국 신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피해자였다. 그 피해증후군 가운데 하나가 그 갈등을 겪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정사였다. 20년대의 정사사건으로 기억되는 「한국의 카투사」로 불린 평양기생 강명화와 경상도 백만장자의 아들 장병천을 들 수 있다. 결합을 반대하는 아버지 장길상의 슬하를 떠나 강명화가 벌어놓은 돈과 패물을 팔아 도쿄로 사랑의 도피를 한다. 강명화가 어머니에게 호소하여 살던 집까지 팔아 장병천은 대학 예과에, 강명화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녔지만 지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백만장자로서 가문에 소외당한 연인을 구제하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강명화는 장안의 최고 미기요, 최고 재기이며, 최고 가기라는 명성을 나래접듯 23세의 인생을 접고 자결했으며, 당시 신문들은 명사들이 총출동하여 신세대의 인권에 대한 구세대의 살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구시대의 논리가 횡포를 부리는 것을 「강명화의 자살」이라는 말로 개념화하기까지 했었다. 그녀가 죽은 며칠 후 시구문 밖 강명화가 묻힌 무쇠리 공동묘지 곁에 장병천이 묻혔다. 죽음의 길 오리정에서 장병천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동반한 것이다.
초기 유행가수 이애리수의 죽음도 일련의 시대적 증후군으로 충격을 주었던 정사다.아홉살에 유랑극단에 팔려온 개성 소녀 이애리수는 1932년에 「황성옛터」를 불러 하루아침에 5만장의 레코드 매출을 올렸고, 민족감정을 건드렸다 하여 제작 관계자들은 감옥에 가고 가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소문이 났었다. 이애리수와 사랑에 빠진 것이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이었다. 부모의 반대가 극심하자 이들은 정사를 기도, 미수에 그쳐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이에 놀란 아버지가 노래를 버리고 주부로서 들어앉으라는 조건부로 허가를 했다. 「죽음의 언덕을 넘어온 너른 광야에서 뭣을 노래하리까. 백합처럼 비단으로 몸을 꾸미고 새처럼 지저귀리이까. 황새가 파먹고난 우렁껍질처럼 사오리까.」 그 보금자리에서 이 두 연인은 두 번째 독약을 마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