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2009. 9. 21. 14:43정치와 사회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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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본선 ‘근대화를 이끈 스승’…한국엔 ‘식민지 35년의 원흉’

춘원 이광수가 그의 묘지를 다녀와서 글을 남겼다. “태서의 신문화로써 침체한 구사상, 구제도를 대(代)해야 할 줄을 확신하고 단연히 지(志)를 결(決)”했으니, “천(天)이 일본을 복(福)하려 하시매 여사(如斯)한 위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낱말만 없다면 마치 구한말 풍운아처럼 살다간 개화파의 한 인물을 평가한 듯한 글로 읽힐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이 글은 놀랍게도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기린 글이다. 도대체 그가 어떠한 인물이기에 젊은 날의 이광수가 침을 튀기며 그의 삶을 칭송했던 것일까.

4년 뒤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순에 접어들어 후쿠자와는 속기자에게 자신의 삶을 구술했다. 이때의 기록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이다. 봉건질서가 강고하게 자리잡은 시대에 하급 무사가문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탈아(脫我)’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다. 아버지는 본디 한학자였다. 그러나 번에서 하는 일은 회계담당. 오사카의 갑부들과 교제하면서 번의 채무를 해결하는 일을 도맡았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자서전에 기록된 아버지의 회한은 뒷날의 평가라 보아야 한다. 원래 책만 읽는 학자로 성장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주판을 들고 돈 계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했으니, 아버지의 좌절감은 깊었으리라 말한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어른들의 교제는 당연하거니와 아이들의 놀이에도 상하귀천의 구별이 있었다. 불평이 없을 리 없었다. 나중에 학교에 가서 독서회독을 하면 언제나 상급사족을 이겼다. 완력에서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처지에서 보자면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막내를 차라리 승려로 키우기로 했다. 하찮은 생선가게 아들이 대종사가 되었다는 말은 널려 있었다. “중 노릇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그 괴로운 속마음, 그 깊은 애정,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봉건적 문벌제도에 분노하는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어 혼자서 울곤”했다고 회상한다.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돌아온 번지(蕃地) 나카쓰에서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분명히 학문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싶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는데도 금세 따라갔다. 나중에는 서당선생보다 실력이 나았다.

주변에서 불평불만이 나오면 다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사람을 실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문벌로 나누는 이상 희망은 없었다. 떠나지 않을 거라면 불평도 하지 말라고 퉁을 놓았다. 마침내 나가사키로 떠났다. 나카쓰에 전통과 문벌이라는 악령을 묻어버리고 싶었으리라. 가슴에는 못다 이룬 아버지의 꿈을 품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뒤돌아서 침을 뱉고는 바삐 달려갔겠는가.

그즈음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에 내항한 사실이 널리 퍼졌다. 세상은 이미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서양글자를 배웠다. 스물 몇자를 외우는 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지만, 네덜란드어 문법을 깨우쳤다. 얼마 안가 선생을 가르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오사카로 옮겨 오카타의 주쿠(사설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난학을 배우는 데라 대체로 동료들의 직업이 의사였다. 이 점은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의 공부는 말하자면 ‘서기(西器)’를 배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본디 형과 함께 네덜란드어를 배우기로 한 것도 페리 충격 이후 일본열도를 달군 포술(砲術)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베끼거나 번역한 책도 주로 의학서나 축성서 따위였다. 서양문명이 가능했던 거대한 뿌리는 제쳐놓고 성급하게 열매만 따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후카자와가 무엇을 포기하고 공부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형이 갑작스럽게 죽어 고향에 다시 돌아갔다. 전통에 따라 가독상속을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하고 오사카로 다시 나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공부를 하면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있어봤자 대단한 출세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이 가는 길을 막을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여비를 마련하려고 아버지가 남긴 장서를 팔아치웠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에 얽힌 일화가 나온다. 아버지는 진귀한 책도 여럿 있는 장서가였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명률(明律)’의 ‘상유조례(上諭條例)’를 마침내 사게 되어 무척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막내아이가 태어났다. 겹경사라며 상유의 유자를 따 사내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 일화의 당사자가 그 장서를 판 돈으로 오사카로 간 것이다. 이로써 그는 확실히 전통이라는 탯줄을 잘라낸 셈이다.

25살, 드디어 도쿄에 입성했다. 이제는 영어의 시대였다. 곤혹스러웠다. 개방의 상징인 요코하마에 갔는데, 글도 모르겠고 말도 안 통했다. 어렵게 네덜란드어를 배웠는데 무용지물이 되나 싶었다. “몇년 동안 수영을 배워 간신히 헤엄칠 수 있게 되자 수영을 포기하고 나무타기를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노라고 했다. 그가 누구인가. 훗날 ‘학문을 권함’을 써낸 인물이 아니던가. 공부하느라 베개를 베고 잔 기억이 없다는 인물이 아니던가. 배우고 익혔으니, 그러지 않고서는 뒤처질까봐 조바심이 났을 터다. 고생 끝에 낙이라더니, 1860년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일본개벽 이래 미증유”의 사건이라 할 만한데, 사령관의 수행원 자격으로 그 유명한 간린마루에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후쿠자와는 미국을 한 번 더 방문하고 유럽도 다녀왔다. 이때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서양사정’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론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예외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추게 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탈아(脫我)에 성공한다. 하급무사의 아들은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사상가로 우뚝 선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그가 추구한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탈아(脫亞)’였으니, ‘입구(入歐)’를 목표로 삼았다. “나는 어떻게든 양학이 성행하도록 해서 반드시 일본을 서양 같은 문명 부강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기에 처음으로 미국에 가면서 겪은 고초를 일러 “서양에 대한 나의 신념이 뼈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할 수 있었다.

서양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그는 당당하게 과학문명을 접하고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고 흰소리를 늘어놓는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증기선을 눈으로 본 뒤 7년, 항해술을 전수받기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결정을 내려, 드디어 이듬해”에 독자적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너무 기초적인 지식이라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사항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일례로 병원을 들 수 있다. 궁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유지비는 어떤 식으로, 누가 내는가. 돈의 출납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하는 점을 알고 싶었다. 우편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 법은 어떤 취지로 만든 것일까.

알쏭달쏭한 것도 있었다. 프랑스는 징병제라는데 영국은 징병제가 아니란다. 도대체 왜 나라마다 제도가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선거법은 아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법률에 기초해서 실행하는지, 국회는 어떤 관공서인지 물었다. 그러니 질문받은 상대방은 그저 웃을 수밖에. 더 황당한 것은 당파가 둘로 나뉘어 태평천하에서도 정치적인 싸움질을 해댄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적인 상대방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닷새고 열흘이고 걸려서 간신히 납득”했다.

동양적인 것과 결별하고 서양적인 것을 탐닉했던 후쿠자와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 이미 예상할 수 있듯, 서양적인 것만이 문명의 총화라고 여겼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국가의 독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이 두 가지가 없었다. 정치가가 국사를 처리하는 것도, 실업가가 상거래와 공업에 종사하는 것도, 국민에게 보국의 생각이 많고, 가족이 단란한 정으로 충만한 것도, 그 유래를 따져보면 자연히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의 이른바 입국이 그렇고 확대해서 말하면 인류 전체가 그렇듯이 인간만사는 수리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으며 독립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소중한 진리를 우리 일본에서는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는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일본의 국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책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뿐이다. 국민을 상대로 계몽했던 것도 결국은 “일본을 병력이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니 바로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였다. 나라 전체가 오직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맺은 열매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명론은 이미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독을 품고 있었다. 그 정점에 올라 있을 때 발표한 글이 1885년 3월16일 지지신보(時事新報)에 실은 사설이다. 그 글에서 그는 “오늘의 꿈을 펴기 위해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시간이 없다. 오히려 그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해 중국·조선을 접수해야 한다. 접수방법도 인접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을 헤아려줄 수 없으며 반드시 서양인이 접하는 풍에 따라 처분해야 할 뿐”이라고 말했다.

만엔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린 인물. 게이오 대학의 창립자. 칼을 버리고 붓을 들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스승.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평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후원자, 청일전쟁을 독려한 주전론자, 탈아입구론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깬 원흉. 이것이 우리가 바라본 그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광수는 몰랐던 것이리라. 저것을 잡아먹기만 하면 기사회생할 줄 알았다. 눈앞에 얼쩡거리는 두꺼비를 바라보는 뱀의 마음과 같다. 그러나 그 몸에 독이 있으니 잡아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몰랐다. 이광수는 두꺼비를 탐한 어리석은 뱀이었다. 먹음직스러우나 독을 품은, 그리고 죽은 뱀의 몸에 새끼를 치는 두꺼비! 후쿠자와 유키치는 우리 근대사에 꼭 그와 같은 인물이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