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가 쏘지 않았다면

2009. 10. 27. 14:27정치와 사회

김재규가 쏘지 않았다면 [2009.10.23 제782호]
[특집] 물가폭등·세금폭탄·경제침체가 부마항쟁으로 돌출…
죽었기에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최성진
» 만약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지금처럼 후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 80보도사진연감
그때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30여 년 전 역사를 들춰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죽음 이전과 이후,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1979년 10월26일 이전으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10·26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과 마산에서 터진 부마항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1979년 10월19일이었다. 훗날 김 부장은 부마항쟁을 ‘민란’으로 표현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 부장이 곧바로 찾은 곳은 청와대였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고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정부가 근본적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부마항쟁이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1980년 1월28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차지철 실장이 거들었다. 차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학)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해 부마항쟁이 가장 직접적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없었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수 없었듯, 부마항쟁 없는 10·26은 상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서 교수는 “김 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한 것은 부산에 갔다와 박 전 대통령에게 부마항쟁 실태를 보고한 직후로 보인다”며 “김 부장이 10월24일 이후락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로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자신의 요청으로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직을 떠맡았던 이종찬이 더 이상 유정회 의원을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말한 것도 부산에서 돌아온 직후였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1980년 1월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부마사태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봉기로서, (중략)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 1970년대 경제성장률/연도별 소비자물가 등락률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듬해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 정부 정책 불신, 물가 폭등 등 김재규 부장이 꼽은 부마항쟁의 세 가지 배경은 모두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들어 물가는 거의 매년 두 자릿수 이상 뛰었다. 1979년에는 물가 폭등에 제2차 오일쇼크가 겹쳐 서민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졌다. 그해 7월10일 기준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 뛰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몰아친 부동산 투기 바람은 저임금 노동자의 주거난을 부채질했다. 부동산 투기는 1977년 행정수도 이전설로 불붙었다. 1978년 들어 땅값이 49% 뛰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8월8일 이른바 ‘8·8 투기억제 조치’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습적인 세금 인상도 서민에게 반감을 샀다. 1978년 제10대 총선을 앞두고 유신정권은 안정적 세원 확보를 명분으로 갑자기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했다. 말하자면 박정희식 ‘세금 폭탄’이었다. 부가세 도입은 가뜩이나 오름세인 물가를 더욱 부채질했다. 증권시장도 거래세 신설로 주가 폭락을 겪어야 했다.

기록적인 물가 폭등과 세금 인상, 부동산 투기가 서민의 불만을 샀다면,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중화학공업의 침체는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다. 서중석 교수는 “(정부의 비호 아래) 대재벌이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중화학공업에 투자한 탓에 1970년대 후반 과도한 중복 투자가 큰 문제가 됐다”며 “1979년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 단지 가동률이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을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중화학공업의 불황 등으로 1979년 말 외채가 200억달러를 넘었다. 외채망국론이 제기됐다. 박 전 대통령의 상징이었던 경제성장도 가속도를 잃었다. 1977년까지는 그나마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1978년 9.3%를 기록한 뒤 1979년에는 6.8%로 떨어졌다. 10·26 바로 다음해에는 마이너스 1.5%였다.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사태였다.

4·19와 같은 사태가 눈앞에

»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유신정권 말기 물가 폭등과 빈부 격차,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원인이 됐다. 사진 한겨레 자료

심각한 경제난과 유신정권에 대한 불신은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에서 여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개표 결과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은 31.7%였다. 신민당(32.8%)에 비해 1.1% 뒤진 결과였다. 정권에 대한 불신은 무소속의 선전으로도 나타났다. 무소속 득표율은 28.1%였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참패한 사실은 당시 민심 이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며 “애초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78년 총선 이후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유신정권 말기 민심 이반으로 인한 여당의 총선 참패와 부마항쟁 사이에 두 개의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8월11일 터진 ‘YH사건’이었다. 가발 제조업체 YH무역의 부당한 폐업 조치에 반발한 172명의 여성 노동자가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전격 투입됐다. 여성 노동자 1명이 투신해 숨졌다. 이 과정에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등 국회의원까지 구타당했다. 1천 명의 경찰이 동원돼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내는 장면은 TV 뉴스를 통해 국민에게 전해졌다.

공화당이 10월4일 줄곧 유신정권과 각을 세웠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은 부산과 마산 시민의 궐기에 기폭제가 됐다. 그것이 부마항쟁이었다. 유신정권을 둘러싼 총체적 민심 이반의 결과가 부마항쟁으로 나타난 셈이다.

김재규 부장에 따르면 부마항쟁이 터진 부산과 마산의 상황은 심각했다. 그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이 될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다”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이 전 의장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부마사태와 10·26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따른 인권 탄압, 강경 통치와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 원인이 됐다”며 “만약 부마사태를 강경 진압했다면 4·19처럼 서울까지 번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신정권이 심각한 시민 저항에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마항쟁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자 벌컥 화를 냈다는 것이 김 부장의 주장이다. 그는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여 박 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몰라 국민의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의 결심은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에 울린 총성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는 “10·26이 부마항쟁으로 인한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정치적 폭주와 경제적 위기, 빈부 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며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유혈 참극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 등의 지적에 따르면 10·26은 당시 더 큰 파국을 막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10월26일 울린 총성은 죽음 이전과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극명히 엇갈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주장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때 박 전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에 업적이 살아서 지금도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아 있지, 만약 10·26이 나지 않아 부마사태가 서울까지 확산되기라도 했다면 박 전 대통령의 말로도 좋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인기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인기 얻기 어려웠을 것”

이 전 의장의 말처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죽음 이전과 이후 분명하게 갈린다. 1970년대 내내 서민을 괴롭혔던 심각한 물가 인상과 빈부 격차, 이후 정권의 짐이 된 막대한 외채를 남겼지만, 그는 여전히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도 이미 1978년 총선을 통해 유권자로부터 냉정한 심판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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