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호치민…혁명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2010. 3. 7. 06:59ㆍ정치와 사회
"예수, 호치민…혁명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화제의 책] 혁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혁명이!
하지만 이것은 온당한 대접은 아니다. 사회주의나 코뮌주의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동유럽 국가사회주의의 붕괴 자체가 민중 혁명의 산물이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사회주의'란 말의 신뢰 상실과는 직결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혁명'의 권위마저 실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물론 신뢰 상실의 또 다른 강력한 근거를 들 수도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는 이미 대중들 스스로 이 말을 이미 먼 과거의 일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망각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기실 자본주의 중심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보통선거권이 어느 나라에서나 미래의 거대한 쟁취 목표였던 게 불과 100년 전인데, 이제는 대다수 인류가 선거라는 게임의 법칙에 익숙해 있다. 즉, 혁명은 역사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책 말고 이 말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너무도 중요한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은 민주공화국의 헌법이다.
민주공화국 헌법의 최종 근거, 그것은 과거의 법전들과는 달리 이제 신도 아니고 어떤 추상적 진리(다르마)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민(民) 자신일 따름이다. 민이 역사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은 혁명 혹은 혁명적 사건을 통해서다. 민주공화국 헌법의 창세기는 곧 혁명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항일민족투쟁(임시정부), 4월 혁명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항이 갑자기 새로운 대중 항쟁의 구호로 돌변하기도 하는 이유다.
한 마디로, 혁명은 이만큼이나 살아 있는 무엇이다. 이 말을 조롱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한 마리 짐승 이상의 누군가로 취급받을 아주 중요한 근거 하나를 스스로 웃음거리로 삼는 일일지 모른다.
<문 앞의 혁명>에서 시작된 '혁명들' 시리즈
그래도 슬로베니아 출신 '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2004년에 <문 앞의 혁명(Revolution at the Gates)>이라는 제목을 달고 레닌의 1917년 저작들을 묶어 책으로 냈을 때는 다들 적이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신자유주의 반대' 대신 '자본주의 반대'를 내세우자는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의 주장조차 아직은 너무 앞지르는 것으로 여기던 판이었는데, 지젝은 아예 '혁명'의 복권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우리 문 앞까지 다가온' 혁명이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 재미를 봤는지 위의 책을 낸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그 뜻 자체가 책을 펼쳤을 때의 '왼쪽' 면이다)는 'Revolutions(혁명들)'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내기 시작했다. <문 앞의 혁명>과 비슷한 형식으로 주요 혁명가들의 저작을 한 권씩 선집으로 묶어 발간한 것이다.
<문 앞의 혁명>에 지젝의 도발적인 서문을 달았던 것처럼, 다른 책들에도 저명한 필자들의 서문을 실었다. 가령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마오쩌둥 편에는 <문 앞의 혁명>에 이어 다시 지젝이 서문을 썼고, 마르크스 편에는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호치민 편에는 필리핀의 대안 세계화 운동가인 월든 벨로의 서문을 덧붙였다.
이 시리즈의 발단이 된 <문 앞의 혁명>은 이미 작년에 <레닌이 만난 지젝 :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정영목 옮김, 길 펴냄)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허나 필자는 '혁명들' 시리즈 전체가 우리말로 번역될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버소의 어쩌면 지나친 선견지명 혹은 광기에 화답할 국내 출판사가 과연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설날 직전에 서점에 가보니, 이 시리즈 중 무려 다섯 권이 원본의 표지 그림 그대로, 하지만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말을 걸며 진열대에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발간자가 <프레시안>이었다는 것!
이것 자체를 어떤 메시지로 볼 수 있는 것일까? '혁명'의 복권이 이제는 좌파 내의 극소수를 넘어서 지식 세계 안에 도도한 한 흐름을 이룬 것으로 읽어도 좋은 걸까? 한국 사회도 그 자장(磁場) 안에 있다고 해석해도 되는 걸까?
하기는 장 지글러 같은 화려한 경력(스위스 국회의원·UN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의 사회민주주의자가 이제 해답은 프랑스대혁명 같은 거대한 혁명이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라고 토로하는 판이니(<탐욕의 시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이러한 독해가 꼭 호들갑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도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페인, 칼 마르크스 등 여러 권의 책이 더 발간될 예정인 이 한국판 '혁명들' 시리즈의 서평을 쓰게 된 것 자체가 필자에게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다.
더구나 이런 거창한 맥락을 제외하더라도, 이 시리즈 안의 각 선집이 갖는 의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과문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선집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 호치민 선집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역시 그렇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역시 혁명
▲ <호치민 :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치민 지음, 월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
바로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혁명들' 시리즈는 우리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시리즈 안의 각 편이 서로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공통의 메시지가 시리즈 전체를 꿰뚫고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맞이한 이 대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어떤 행위가,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적이어야 한다. 즉, 현실로부터 규정받는 것 그 이상으로 현실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즉, 한 나라, 한 지역을 넘어 전 인류에게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또한 그것은 대중적이어야 한다. 대중 자신의 각성에서 비롯되고 대중 스스로의 참여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행위란, 이런 사건이란 결국 무엇인가? 혁명이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서 읽어낸 민중 혁명의 영원한 특성('혁명들' 시리즈는 마르크스 편을 바로 마르크스의 이 논의, 즉 <프랑스 내전>으로 채우고 있다)이 이런 것들 아닌가?
이러한 민중 혁명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제헌적 합의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터전 위에서 인류의 새로운 공화국들, 지구 위의 새로운 질서가 출현하게 된다.
지금의 혼란은 우리를 야만의 나락으로 이끌고 있다. 20세기 초의 세계 전쟁, 대공황, 파시즘, 민간인 학살이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그것과 같은 규모와 깊이의 비극들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지난 대위기 시대에는 없었던 핵무기와 생태 위기라는 짐까지 짊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 대위기 시대도 어쨌든 야만의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가? 파시즘을 격퇴한 힘, 새로운 자본주의 패권국 미국이 유럽에는 복지국가를, 식민지 세계에는 독립국가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그 힘은 무엇이었던가?
위기의 세월 속에서도 지구 곳곳에는 다양하면서도 보편적인 대중 운동들이 끈질기게 계속됐다. 그리고 그 운동들에 자극을 던지고 전망을 부여한 거대한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물론 이 혁명 자체의 성과와 오류의 대차대조표는 복잡하다. 레닌, 트로츠키 등 혁명 주역들이 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꿈꿨던, 독일 혁명의 호응에 따른 세계 혁명의 승리 전망도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패배라도 어쨌든 절반의 패배였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나머지 절반인 그 승리의 여진이 지난 번 대위기 시대의 전개 방향을 조금이라도 야만과 붕괴와는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파시즘의 승리보다는 의회민주주의의 복구 쪽으로, 제국주의 세계화 시대로의 회귀보다는 식민지 민족들의 독립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
이번의 대위기 시대에도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야만을 막을 힘, 역사의 방향을 바꿀 계기, 즉 혁명적 사건이라고 '혁명들' 시리즈는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기다린다고 해서 오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되새긴다. 지금 당장, 혁명을 촉발할 크고 작은 실천들에 나서야 한다는 것.
어쩌면 '혁명들' 시리즈의 출간 자체가 그러한 실천의 하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낸 것이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거대한 강의 한 발원지가 루소 읽기였고, 10월 혁명을 마르크스 읽기 없이 생각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 시대의 혁명은 그 모두를 우리의 방식대로 다시 읽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혁명은 과거와는 다르다
▲ <트로츠키 :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레온 트로츠키 지음, 슬라보예 지젝 서문,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
지금 우리의 대위기 시대가 100년 전의 대위기 시대와 같으면서 또 다른 것처럼, 우리 시대에 필요한 혁명들도 과거의 혁명들과 같으면서 또 결정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지난 번 대위기 시대는 제국주의 세계화 시대의 결과였다. 제국주의 세계화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달리 강대국 간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 양상을 동반했다. 그래서 위기는 세계 전쟁의 형태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 트로츠키의 세계 혁명 전망은 이러한 강대국 간 전쟁 상황을 염두에 둔 아주 구체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실제로 10월 혁명은 전쟁에 염증을 느낀 다수 병사들이 혁명의 주역으로 돌아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이번 대위기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지금 레닌이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도 금융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다수 대중을 규합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 대위기 시대와 지금 사이의 100년 간에는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대의민주주의의 확대다.
현존 대의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냉소적인 체제 보존 장치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세계 각 국의 다수 대중은 그래도 이것이 '가장 덜 나쁜' 권력 인정 통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서유럽에서조차 노동자와 여성의 선거 참여가 낯설었던 100년 전과는 확실히 다른 조건이다.
필자는 그렇다고 이것이 이제는 혁명이 아닌 개혁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혁명이 어렵다면, 사실 이 대위기의 시대에 개혁은 더 어렵다. 우리는 이 역설을 직시해야 한다. '교조적인' 혁명가뿐만 아니라 '선량한' 개혁가 역시 답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의 변화가 우리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보다는,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이 아닐까. 이제는, 아마도 과거 혁명과 개혁의 이분법에서 각각 혁명 혹은 개혁의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들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나타나며 오히려 서로 활발히 교호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만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거와 같은 제도 정치 일정은 대중의 직접 참여와 대중 권력 수립 같은 흐름들과 서로 엇물려 들어갈 것이다. 제도 정치 내의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더욱 거대하고 심원한 대중 실천의 한 계기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1970년대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경험이나 최근 라틴아메리카 좌파 집권 실험들을 들 수 있다. 당시 칠레에서는 보수 세력이 좌파정부에 맞서 반격을 취하자 노동자, 민중 스스로 자치 권력을 수립해 이를 막았다. 요즘 볼리비아 등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 대중 혁명과 급진 개혁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아니 이 둘의 논리적인 구별보다는 이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살피는 게 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혁명들' 시리즈에 포함된 고전들을 읽을 때에도 비판적 독자의 자세를 결코 누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시리즈의 기획자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오쩌둥 편에 붙은 지젝의 서문은 마오의 성취뿐만 아니라 그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신영복의 한국어판 발간사는 "자성의 독법"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좀 더 입체적인 독서도 필요하다. 가령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는 반드시 그 논쟁 상대인 칼 카우츠키의 책(<프롤레타리아 독재>, 강신준 옮김, 한길사 펴냄)이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과 함께 읽어야 한다. 우리는 트로츠키의 주장뿐만 아니라 볼셰비키의 정치적 선택들을 둘러싼 로자 룩셈부르크-카우츠키-트로츠키의 댓거리 전체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혁명들' 시리즈가 과거의 시각으로 보면 서로 상당히 이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자들을 한데 모아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토머스 페인을 뿌리로 하는 혁명, 레닌과 트로츠키뿐만 아니라 토머스 제퍼슨과 대화하는 혁명 운동이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마르크스, 레닌에 제퍼슨, 페인 그리고 예수까지?
▲ <예수 : 가스펠>(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서문, 김율희·대한성서공회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 |
하지만 지젝이 21세기에 정치 실천을 새롭게 사고하는 출발점으로 예수, 바울, 레닌을 불러냈던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렇게 낯선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예수 편의 서문을 쓴 영국의 좌파 문학비평가이자 불굴의 마르크스주의자 테리 이글튼은 이러한 지젝의 시도를 일찍부터 적극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글튼은 서문에서 예수의 혁명은 "정의, 평화, 동지애, 충만한 활력을 포함한 존재 양상, 즉 레닌과 트로츠키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완벽한 존재 양상에 의해 기존 권력구조가 일소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은 항상 예수의 혁명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놀랄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난 수세대 동안 혁명 운동이 어렵사리 도달한 성숙의 정도를 증거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필자는 여기에 붓다의 혁명을 통해서 본 마르크스의 혁명, 간디의 혁명을 통해서 본 레닌의 혁명 혹은 최제우, 최시형의 혁명을 통해서 본 전봉준의 혁명을 덧붙이고 싶다.
필자는 이러한 기대와 전망을 더없이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구현한 영화 한 편을 기억한다. 그것은 의문의 암살을 당한 이탈리아의 좌파 감독이자 시인, 소설가 파울로 파졸리니의 작품 <마태복음>이다.
이 영화는 유명한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 이야기(마태복음 27장)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혁명의 광경으로 그려낸다. 예수가 환전상과 비둘기 상인을 쫓아낸 성전을 아이들과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이 몰려들어와 채운다. 바흐의 미사곡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면서, 아이들은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가장 아래에 있던 자들이 무대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 모든 주역들과 함께, 모세의 성전과 예수의 복음, 바흐의 음악과 파졸리니의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며 서로 어우러진다. 이 모든 전통이, 이 모든 과거가, 이 모든 상투적인 기억들이 전혀 다른 삶을 부여받는다.
우리 앞의 혁명이 그 전까지의 모든 인류사를 결정한다. 이것이 혁명의 순간의 신비다. 그리고 이제 그 신비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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