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상인, 제주도 진출

2010. 5. 24. 11:22카테고리 없음

[병영상인]거친 바다 멀리 제주땅이 멀지 않았네
조선시대 병영성에서 제주도에 '호남원병' 정기적으로 파병
상업교류 필연적... 제주의녀 만덕 병영상인과 교류 했을 것
70년대 초까지 제주 흑돼지 사러오는 병영상인들 많아
2009년 10월 30일 (금) 09:35:07 주희춘 기자 ju@gjon.com

   
▲ 제주도의 가장 북쪽지역이면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제주시 동문시장. 70년대 초까지 병영상인들이 제주 흑돼지를 사러 왔던 곳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재래시장 동문시장. 제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재래시장이면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시장이다. 이곳에서 제주항이 지척이고 60년대 후반까지 시장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이곳에서 '코끼리닭집'이란 생닭 도매점을 하고 있는 신충심(62)씨는 옴천 오곡마을 출신이다. 원래는 21세때 충남 대전으로 시집을 갔으나 5년 후인 1972년 26세때에 남편과 함께 제주도로 들어와 이곳 동문시장에 자리를 틀었다.
 
"처음에 동문시장에 오니 전라도 시장인지 제주도 시장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강진이나 해남, 목포, 진도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대부분 육지에서 제주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60, 70년대 육지의 가난을 피해 제주도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이 항구와 가까운 이곳 동문시장에서 첫 제주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 옴천 출신의 신충심씨가 동문시장에서 생닭도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틈에 육지에서 이 곳 제주 동문시장까지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포~ 진도 벽파진~ 추자도~ 제주항을 운행하는 배를 타고 이곳 제주까지 물건을 팔러온 상인들이었다.
 
그중에 병영상인이 있었다. "고향 사람들이 자주 오곤 했는데 육지에서 쌀이나 보리, 비단 등을 가져와서 제주에서 나오는 물건을 사가곤 했어요. 대표적인게 흑돼지였죠. 때로는 제주말을 구입해 가는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병영면 중고마을 송용백 이장은 어머니 안양님(88년 작고)씨가 1950년대 후반 비단을 가지고 제주에 들어가 판매하고 그곳에서 흑돼지를 사다가 강진의 시장에 되팔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송용백 이장의 어머니는 아마도 목포나 진도 벽파진에서 배를 타고 이곳 동문시장까지 왔을 것이다. 육지에서 제주까지 흑돼지를 사러 온 상업문화는 1970년대까지 계속돼 신충심씨의 눈에도 보였던 것이다.
 
이곳 동문시장에서 자리를 튼 병영상인도 있었다. 병영 성남리 출신 이복선(남.70세로 추정)씨는 60년대 후반부터 동문시장에서 식육점을 시작해 몇 년 전까지 영업을 계속했다. 지금은 상업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동문시장의 오랜 식육점 터줏대감으로 통하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기자는 이복선씨나 그의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았으나 어려운 일이었다. 식육점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도 있고,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장사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또 동문시장에서 병영 상고마을 출신 장씨란 사람이 오랫동안 옹기장사를 하다 몇 년전 그만둔 사연도 있었다. 상인들의 뒷모습은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쓸쓸한 것이었다. 장씨는 칠량 봉황에서 돛배를 타고 건너온 옹기를 받아 이곳 동문시장 한 켠에서 팔았다고 한다.
 

   
▲ 병영 한림마을이 고향인 송영용 사장. 동문시장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전라도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많이 지켜봤다.
또 최창권(65) 전 병영발전협의회장의 조부님 세대가 해방을 전후해 제주도에서 자리 잡았던 몇몇 안되는 사람들로 꼽힌다. 최회장의 넷째 조부(작고)가 아들 최명용(작고)씨와 최장철(작고)씨를 데리고 해방전 제주도로 들어가 명용씨는 식당을, 장철씨는 염색업소를 운영했다.

또 막내조부인 최승균(작고)씨의 큰 아들 최명철(작고)씨와 막내 최명배씨도 제주도에 들어가 양화점을 운영해 큰 돈을 벌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동문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도2동에서 석촌식당이란 갈치고등어 조림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병영 한림마을 출신 송영용(64)씨는 비교적 부유하게 제주생활을 시작했던 병영상인이다.

친척이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제주생활을 시작했다. 송사장은 강진사람들이 제주에 와서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 제주에 들어 온 강진사람들 중에 병영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병영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장사를 할 줄 알았다고 했다.
 
송사장은 병영상인들의 특징을 이야기 했다. "병영 사람들은 장사를 포기할 줄 몰라요. 장사를 하면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제주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가 할 것 없이 고생을 했지만 병영 출신 역시 갖은 고생끝에 장사를 일으키곤 했지요. 큰 장사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작은 규모라도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상업을 통해 삶의 기반을 쌓았다는 것,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병영상인에 대한 이야기다.
 
송사장은 제주의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병영성을 쌓는 작업에 제주도 사람들도 많이 동원됐을 것이라고 했다.
 
송 사장은 "제주에는 원래 돌이 많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돌을 잘 다뤘다고 해요. 그래서 돌성을 쌓는데 많이 차출되어서 육지로 나갔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지요"
 
아직까지 역사적인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제주사람들이 병영성을 쌓는 울력에 참가 했다는 것은 충분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제주는 전라도 소속이었고, 병영성이 관할하는 전라도 지역 53개 현 중에 하나였다. 
 
전라병영성에서는 1512년(중종 7년)부터 제주 방어를 위해 군인을 파견 했었다. 이들을 호남원병이라 하였으며 인원은 500명이고 숙소는 제주시내에 있는 관덕정 동쪽이었다.

원병제도는 임진왜란이 후 전라도 자체 방어병력의 부족으로 교체가 지연되는 등 단계적으로 축소되다가 1620년(광해군 12년)에 완전히 폐지된 것으로 전해온다.
 

   
▲ 제주시 만덕기념관에 있는 제주 상인 만덕이 취급했던 생필품들. 모두 육지에서 들여온 것인데 상당부분 병영상인들과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향토사학자 오문복선생은 "100여년 동안 정기적으로 이뤄졌던 호남원병 파견은 군사교류는 물론 강진과 제주의 상업교류 또한 촉진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병을 위해 강진~제주 사이를 오간 배에는 군사들만 타고 있었던게 아니라 군사들이 사용할 군수물자는 물론 기타 웃사람들에게 상납할 현지의 물품들이 함께 왕래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 원병행차가 아니더라도 제주 병영기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병영상인들이 공급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 전 도암농협이 제주도의 '김만덕 나눔쌀 만섬쌓기'에 20㎏들이 쌀 3천여포를 제주도에 납품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나온적이 있었다.
 
김만덕(1739~1812)은 제주도에서 상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던 여성상인으로 제주에서 큰 할머니로 존경받은 사람이다. 지금은 탤런트 고두심씨가 위원장이 되어 기념사업회가 꾸려지고 있다.
 
김만덕은 정조18년(서기1794) 제주에 대 기근이 들자  '천금'을 풀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해 오게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만덕 덕분에 1만8천명의 섬사람들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전해온다. 제주도에서는 2003년부터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쌀을 나눠주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도암농협의 간척지쌀을 구입해간 것이다.
 
2009년에 이뤄진 제주도와 강진의 쌀 거래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의미있는 괘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만덕은 원래 관기 출신이었으나 23세(1762) 때 양인의 신분을 되찾아 제주 건입포 일대에 객주(客主)를 차려 큰 돈을 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건입포는 지금의 동문시장과 2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건입포가 육지에서 배가 당도하는 곳이라면 동문시장은 이곳 도착한 육지의 각종 산물이 거래되던 곳이었다.
 
객주란 중간상을 하는 일종의 도매상을 이야기한다. 병영상인들은 이들을 대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만덕은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 특산물인 녹용과 귤 등은 육지에 팔아 많은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서 서술한 호남원병의 교류에서 보듯이 병영상인들의 제주 진출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 제주의 주된 거래처는 김만덕 처럼 건입포 일대에서 객주를 차리고 있는 중간상인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1950년대 병영상인들이 생활용품을 가지고 건너가 건입포 인근 동문시장에서 팔고, 다시 그 돈을 가지고 흑돼지를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활용품과 흑돼지를 맞교환하는 물물교환도 일반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김만덕은 육지와 섬을 잇는 생필품을 매매하면서 거액을 벌어들였다. 김만덕기념사업회가 2007년 4월 펴낸 자료총서에 따르면 만덕은 제주토산물인 미역과 전복, 표고, 양태, 말총, 약초들을 수집해 육지상인들에게 공급하고 육지상인으로부터는 삼베, 모시, 청포, 비단등의 피륙과 지물, 잡화, 쌀등을 사들여 제주에서 판매했다.
 
만덕의 객주가 있던 건입포는 육지상인들이 제주 토산물을 쉽게 배에 선적 할 수 있는 곳이였다. 그럼 조선시대 때 부자들이 소비하는 장신구나 화장품, 비단등을 가장 월할하게 공급할 수 있는 육지는 어디였을까.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건데 아무리 찾아봐도 강진의 병영만한 곳이 없다. 목포는 1897년 개항 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고, 남쪽지방에서 조선시대 양대 병영으로 평가받던 경상남도 통영은 제주에서 먼 곳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상업망이 전국에 뻗어 있었던 강진의 병영이야 말로 김만덕이 필요로 한 물건을 제 때 공급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상업기지였을 것이다.
 
제주대 박찬식 연구교수는 "당시 제주의 대표적인 대 육지 판매물이였던 양태가 육지로 반출될 때는 주로 강진과 해남등지를 거쳤기 때문에 두 지역이 양태의 집산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중간상인에 의해 서울의 양태전으로 전매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병영의 상권은 이렇듯 육지는 물론 바다건너 제주도를 아울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