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조념
2012. 11. 6. 12:17ㆍ카테고리 없음
올해 초 거의 1년 만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저 작곡가 조념인데요. 만날 수 있을까요?"
1922년생이니 올해 나이 87세. 1년에 한두 차례 전화연락을 주고받았던 이 원로작곡가와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끊은 전화가 9개월 만에 접속이 된 것이다.
선생은 두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진행한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대상자로 뽑혔다는 점을 먼저 꺼냈다. 이 사업은 평생을 한국예술에 몸 바친 원로예술인들의 생애와 주요 사건들을 전문 연구자와의 대담을 통해 영상물로 담는 작업이다.
2003년 시작해 첫 해 33명, 2004년 18명, 2005년 20명, 2006년 15명을 다뤘다. 2006년 조념 선생과 함께 수록된 인물은 영화배우 최은희(1926~), 올해 초 '아름다운 욕망'으로 인터넷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화가 김종하(1918~), 국립극단 단장을 지낸 연극배우 백성희(1925~), 1956년 한국방송공사(KBS) 편성과장 겸 제작과장을 맡으며 한국방송에 주춧돌을 놓은 최창봉(1925~), 평양에서 박수근과 함께 활동했던 서양화가 장리석(1916~) 등이었다.
선생은 기쁜 소식부터 먼저 털어놓았다. 다음 소식은 나쁜 일이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암이랍니다"하며 '허허' 웃었다. 무슨 말을 할 지 막막했다. 그냥 "예"라고만 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은 한국 음악계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는 음악인이다. 해방 당시 좌와 우와 갈라진 음악계 양쪽을 오가며 음악활동을 했던 것. 그는 조선 최초의 고려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주자 출신이다. '후기 낭만의 서정성에 바탕을 둔 곡을 만든 작곡가' '순수음악을 지향하는 가곡과 기악곡'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좌익 경력을 연결하긴 힘들다.
하지만 선생은 좌익 진영 대표음악단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월북음악인인 김순남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공장음악회를 함께 다녔다. 심지어 "6·25만 터지지 않았다면 북에 갔을 것"이라는 말까지 한 바 있다.
비록 양쪽을 오가며 활동을 했지만, 음악에서 이념 색깔이 도드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합창곡 '나의 조국', 제3교향곡 '통일', 제4교향곡 '산하', 악보집 '애국의 노래집' 등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에겐 '민족음악가'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선생은 시에 곡을 즐겨 붙였다. 한하운의 시에 곡을 붙인 '보리피리'와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녹두꽃' 등은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고, 김지향 시에 곡을 붙인 '삼월(三月)'은 KBS 이 주일의 노래로 몇 달 간이나 방송을 탔다.
서울 모 대형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은 선생은 20일경 2차 검진을 받을 예정이다. "부인도 과거 암 선고를 받은 적 있지만, 지금 30년째 살고 있어"라며 '허허' 웃지만 그는 벌써 자서전과 악보집 정리 등 인생 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13일 선생이 즐겨 가는 동대문의 한 설렁탕집에서 만났다.
"술 친구도 없어... 낙이 별로 없네요."
-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대상에 포함되셨다구요.
"서양음악가론 나하고 김동진씨(1913~)하고 두 사람이 들어갔다고 해요(김동진씨는 2003년에 연구대상에 포함됐다). 김동진씨가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인데, 인연이 깊어요. 해방 전 하얼빈에 있을 땐데, 신경오케스트라가 와서 함께 공연한 적 있어요.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가 김동진씨였죠. 김동진씨는 그 때도 스타였는데 몸이 약했어요."
- 구술채록을 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전정임 연구원이 나를 만나기 전에 내가 쓴 글을 모두 읽고 왔어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혹시 문학가를 빌려서 썼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글이 너무 문학적이라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다음은 자서전에 실릴 내용 중 일부다.)
구비구비 출렁이는 압록강 푸른 물결
이 민족의 가장자리를 감싸 돌아 흘러내리는 압록강 물줄기
이제는 분단의 길고 긴 세월에서 꿈속에서나 아롱거리는 강기슭
이내 가슴속에 한줄기 못내 그리움이 남아있다면 아 저 멀고 먼
푸르른 압록강 물줄기 줄기…
민족의 강 압록강은 아득한 옛날에서부터 장백산맥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내린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흘러갔고, 38선이 그어졌을 때도, 휴전선으로 굳어버려도 북녘의 진보를 빙자한 세속적인 독재정권, 남녘의 자유를 빙자했던 군사독재 또는 현 문민정권이건간에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민족의 강인 압록강은 말없이 흘러갈 것이다.
- 예전엔 기고를 많이 하셨죠?
"예전 금수현(1919-1993, 가곡 '그네'의 작곡가로 아들이 금난새다) 선생이 <월간 음악>(1970년 창간한 음악전문지로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운영할 때 많이 썼죠. 그 뒤에는 별로…. 그 때가 참 좋았어요. 1년에 몇 차례 선생이 계신 정릉 집에 모이곤 했는데, 그 수가 100명이 넘었어요. 선생이 세상 떠나고 나선 그런 모임이 이젠 없죠."
- 함께 활동했던 음악가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죠?
"모두 다 갔죠. 나하고 막걸리 친구하던 양반이 있었는데,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어요. 유경환이 지난해 죽은 것 같고(월간 <사상계> 편집부장, 한국동요동인회 회장을 맡았고, 정지용문학상(2003)을 받았다). 대구에서 지휘하는 이기홍(1926~, 대구시향 초대지휘자)이 서울에 오면 꼭 전화를 해요. 세상 떠난 친구와는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만나서 종로5가 대포집에 모여 술 한잔씩 했어요. 이젠 술 친구도 없네요. 낙이란 게 별로 없어요."
- 얼마 전 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는데요.
"작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처음엔 암이라고 하지 않고 약 보름치를 주더라구요. 약을 먹었는데 계속 속이 안 좋아. 그래서 큰 병원에 갔죠. 암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 마누라가 30년 전에 암 선고를 받았는데, 지금껏 살아있어요.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있는데, 속이 아주 좋아요. 이제 안 아픈 것 같애."
- 지금 준비하고 계신 게 있나요.
"지금껏 내가 만든 노래를 묶어서 노래집을 정리하고 있어요. 거의 다 됐어요. 자서전 형식의 글도 계속 쓰고 있었는데, 지금 거의 정리를 다 했어요."
- 대표곡 하면 한하운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보리피리'와 김지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녹두꽃'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김지하 시인에 대해선 남다른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아 김지하 시인은 내가 너무 좋아해요. 최고죠. 오늘날 김지하 같은 시인이 안 나오네요. 나는 김지하 시인이 한국근현대사 구술채록연구 대상자에서 빠진 게 아쉬워요. 너무 유명해서 혹시 뺀 게 아닌가 싶어."(한국문화예술위원회 측이 밝힌 1차 고려사항은 연장자 우선 원칙이었다.)
- 김지하 시인과는 만난 지 꽤 되셨죠.
"그렇죠. 꽤 됐죠.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제일 만나보고 싶어요."(김지하 시인이 창덕궁 옆에 문화사랑방을 냈다고 하자, 아주 반가워하며 약도를 그려달라고 했다.)
- 삶이 참 굴곡이 많으셨죠?
"우리 마누라가 날 싫어해요. 바보라고 하면서요. 고려교향악단 제1바이얼린 연주자로 일할 때는 일반 직장인 봉급의 12배나 받았어요. 그런데 조선음악가동맹 활동을 하면서 그만뒀지요. 수도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땐 우연히 '임금인상 투쟁' 연판장 자리에 끼게 되어 권고사직 당했구요. 한참 활동 열심히 할 때는 내가 속한 음악단체에서 돈을 긁었어요. 그런데 단장은 집도 사고 그랬는데, 나는 얻는 게 없었어. 허허. 잘못 서명했다가 아파트도 날린 적 있고…."
-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자서전 출판과 관련해선 문예진흥기금 신청을 해볼까 해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마치고 조념 선생은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다"면서 일어섰다. 다음에 "막걸리 마시자"는 말과 함께. 선생이 딱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진 않다. 단지 자신의 생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느낌은 구술채록을 한 전정임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5차분의 구술채록을 마칠 때까지 연구자 본인은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려 했고, 구술자 선생님은 '만남'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모든 것을 쏟아 놓으신 지금, 구술자 선생님은 어느 한 지면에라도 구술자 선생님의 삶의 흔적이 남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고백하신다."(전정임 충남대학교 교수)
"저 작곡가 조념인데요. 만날 수 있을까요?"
1922년생이니 올해 나이 87세. 1년에 한두 차례 전화연락을 주고받았던 이 원로작곡가와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끊은 전화가 9개월 만에 접속이 된 것이다.
선생은 두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진행한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대상자로 뽑혔다는 점을 먼저 꺼냈다. 이 사업은 평생을 한국예술에 몸 바친 원로예술인들의 생애와 주요 사건들을 전문 연구자와의 대담을 통해 영상물로 담는 작업이다.
2003년 시작해 첫 해 33명, 2004년 18명, 2005년 20명, 2006년 15명을 다뤘다. 2006년 조념 선생과 함께 수록된 인물은 영화배우 최은희(1926~), 올해 초 '아름다운 욕망'으로 인터넷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화가 김종하(1918~), 국립극단 단장을 지낸 연극배우 백성희(1925~), 1956년 한국방송공사(KBS) 편성과장 겸 제작과장을 맡으며 한국방송에 주춧돌을 놓은 최창봉(1925~), 평양에서 박수근과 함께 활동했던 서양화가 장리석(1916~) 등이었다.
선생은 기쁜 소식부터 먼저 털어놓았다. 다음 소식은 나쁜 일이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암이랍니다"하며 '허허' 웃었다. 무슨 말을 할 지 막막했다. 그냥 "예"라고만 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은 한국 음악계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는 음악인이다. 해방 당시 좌와 우와 갈라진 음악계 양쪽을 오가며 음악활동을 했던 것. 그는 조선 최초의 고려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주자 출신이다. '후기 낭만의 서정성에 바탕을 둔 곡을 만든 작곡가' '순수음악을 지향하는 가곡과 기악곡'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좌익 경력을 연결하긴 힘들다.
작곡가 조념은 누구? |
1937년 김광의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했고 1939년 일본 중앙음악학교, 1940-1942년 일본 동양음악학교(도쿄음악학교 전신)를 다녔다. 해방 이후 대구공업고등학교, 대구 신명여학교, 목포중학교, 경기여자대학(현 경기대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중고등학교에 재직했다. 계정식현악4중주단, 고려교향악단, 서울관현악단 단원을 지냈으며 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발기인이기도 하다. 가곡 '보리피리'(한하운 시), '나의 조국'(정치근 시), '초혼'(김소월 시), 연가곡 '결별'(김지하 시 미완), 교향곡 '산하'(1962년 초연), 교향시 '불바다(2001년 초연) 등 작품이 있다. |
비록 양쪽을 오가며 활동을 했지만, 음악에서 이념 색깔이 도드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합창곡 '나의 조국', 제3교향곡 '통일', 제4교향곡 '산하', 악보집 '애국의 노래집' 등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에겐 '민족음악가'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선생은 시에 곡을 즐겨 붙였다. 한하운의 시에 곡을 붙인 '보리피리'와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녹두꽃' 등은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고, 김지향 시에 곡을 붙인 '삼월(三月)'은 KBS 이 주일의 노래로 몇 달 간이나 방송을 탔다.
서울 모 대형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은 선생은 20일경 2차 검진을 받을 예정이다. "부인도 과거 암 선고를 받은 적 있지만, 지금 30년째 살고 있어"라며 '허허' 웃지만 그는 벌써 자서전과 악보집 정리 등 인생 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13일 선생이 즐겨 가는 동대문의 한 설렁탕집에서 만났다.
"술 친구도 없어... 낙이 별로 없네요."
▲ 작곡가 조념. | |
ⓒ 김대홍 |
-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대상에 포함되셨다구요.
"서양음악가론 나하고 김동진씨(1913~)하고 두 사람이 들어갔다고 해요(김동진씨는 2003년에 연구대상에 포함됐다). 김동진씨가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인데, 인연이 깊어요. 해방 전 하얼빈에 있을 땐데, 신경오케스트라가 와서 함께 공연한 적 있어요.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가 김동진씨였죠. 김동진씨는 그 때도 스타였는데 몸이 약했어요."
- 구술채록을 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전정임 연구원이 나를 만나기 전에 내가 쓴 글을 모두 읽고 왔어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혹시 문학가를 빌려서 썼습니까?'라고 묻더군요.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글이 너무 문학적이라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다음은 자서전에 실릴 내용 중 일부다.)
구비구비 출렁이는 압록강 푸른 물결
이 민족의 가장자리를 감싸 돌아 흘러내리는 압록강 물줄기
이제는 분단의 길고 긴 세월에서 꿈속에서나 아롱거리는 강기슭
이내 가슴속에 한줄기 못내 그리움이 남아있다면 아 저 멀고 먼
푸르른 압록강 물줄기 줄기…
민족의 강 압록강은 아득한 옛날에서부터 장백산맥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내린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흘러갔고, 38선이 그어졌을 때도, 휴전선으로 굳어버려도 북녘의 진보를 빙자한 세속적인 독재정권, 남녘의 자유를 빙자했던 군사독재 또는 현 문민정권이건간에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민족의 강인 압록강은 말없이 흘러갈 것이다.
- 예전엔 기고를 많이 하셨죠?
"예전 금수현(1919-1993, 가곡 '그네'의 작곡가로 아들이 금난새다) 선생이 <월간 음악>(1970년 창간한 음악전문지로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운영할 때 많이 썼죠. 그 뒤에는 별로…. 그 때가 참 좋았어요. 1년에 몇 차례 선생이 계신 정릉 집에 모이곤 했는데, 그 수가 100명이 넘었어요. 선생이 세상 떠나고 나선 그런 모임이 이젠 없죠."
- 함께 활동했던 음악가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죠?
"모두 다 갔죠. 나하고 막걸리 친구하던 양반이 있었는데,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어요. 유경환이 지난해 죽은 것 같고(월간 <사상계> 편집부장, 한국동요동인회 회장을 맡았고, 정지용문학상(2003)을 받았다). 대구에서 지휘하는 이기홍(1926~, 대구시향 초대지휘자)이 서울에 오면 꼭 전화를 해요. 세상 떠난 친구와는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만나서 종로5가 대포집에 모여 술 한잔씩 했어요. 이젠 술 친구도 없네요. 낙이란 게 별로 없어요."
▲ 옛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
ⓒ 김대홍 |
- 얼마 전 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는데요.
"작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처음엔 암이라고 하지 않고 약 보름치를 주더라구요. 약을 먹었는데 계속 속이 안 좋아. 그래서 큰 병원에 갔죠. 암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 마누라가 30년 전에 암 선고를 받았는데, 지금껏 살아있어요.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있는데, 속이 아주 좋아요. 이제 안 아픈 것 같애."
- 지금 준비하고 계신 게 있나요.
"지금껏 내가 만든 노래를 묶어서 노래집을 정리하고 있어요. 거의 다 됐어요. 자서전 형식의 글도 계속 쓰고 있었는데, 지금 거의 정리를 다 했어요."
- 대표곡 하면 한하운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보리피리'와 김지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녹두꽃'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김지하 시인에 대해선 남다른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아 김지하 시인은 내가 너무 좋아해요. 최고죠. 오늘날 김지하 같은 시인이 안 나오네요. 나는 김지하 시인이 한국근현대사 구술채록연구 대상자에서 빠진 게 아쉬워요. 너무 유명해서 혹시 뺀 게 아닌가 싶어."(한국문화예술위원회 측이 밝힌 1차 고려사항은 연장자 우선 원칙이었다.)
- 김지하 시인과는 만난 지 꽤 되셨죠.
"그렇죠. 꽤 됐죠.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제일 만나보고 싶어요."(김지하 시인이 창덕궁 옆에 문화사랑방을 냈다고 하자, 아주 반가워하며 약도를 그려달라고 했다.)
- 삶이 참 굴곡이 많으셨죠?
"우리 마누라가 날 싫어해요. 바보라고 하면서요. 고려교향악단 제1바이얼린 연주자로 일할 때는 일반 직장인 봉급의 12배나 받았어요. 그런데 조선음악가동맹 활동을 하면서 그만뒀지요. 수도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땐 우연히 '임금인상 투쟁' 연판장 자리에 끼게 되어 권고사직 당했구요. 한참 활동 열심히 할 때는 내가 속한 음악단체에서 돈을 긁었어요. 그런데 단장은 집도 사고 그랬는데, 나는 얻는 게 없었어. 허허. 잘못 서명했다가 아파트도 날린 적 있고…."
-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자서전 출판과 관련해선 문예진흥기금 신청을 해볼까 해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마치고 조념 선생은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다"면서 일어섰다. 다음에 "막걸리 마시자"는 말과 함께. 선생이 딱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진 않다. 단지 자신의 생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느낌은 구술채록을 한 전정임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5차분의 구술채록을 마칠 때까지 연구자 본인은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려 했고, 구술자 선생님은 '만남'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모든 것을 쏟아 놓으신 지금, 구술자 선생님은 어느 한 지면에라도 구술자 선생님의 삶의 흔적이 남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고백하신다."(전정임 충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