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4
한센환자들의 아버지로 살다간 오방(五放) 최흥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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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五放) 최흥종목사 | 한국교회는 백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박해와 시련, 고난과 역경을 견딘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광주 출신으로 최초교인, 최초장로, 최초목사인 최흥종(崔興琮, 1880-1966)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화순 장날이면 사람들이 서낭당에 돌을 던지며 ‘오늘 장에 가서 최흥종을 만나지 않게 해 주시오’ 라고 빌 정도로 구한말 광주 화순에서 싸움꾼으로 유명했다. 그는 1904년 광주 양림동의 유진 벨(E. Bell) 선교사 집에 드나들다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희생봉사에 감동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여 광주의 첫 번째 교인이 되었다.
한편 1909년 4월, 광주의 오웬(C.C. Owen) 선교사가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목포의 포사이드(W.H. Forsythe) 선교사는 황급하게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로 올라왔다. 이때 광주에서 최흥종이 영산포까지 마중을 나갔다. 포사이드는 최흥종과 함께 광주로 향하던 중에 길가에 누워서 죽어가는 한센병(문둥병)환자를 만났다. 포사이드는 사랑하는 친구 오웬 선교사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황급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나환자를 못 본체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는 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갔다.
그리고 환자를 광주선교부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다른 환자들의 반발로 하는 수 없이 근처 벽돌 굽던 가마터로 옮겨갔다. 이때 악취가 진동하고 손발에서 고름이 나오는 여인을 두 손으로 안고 옮기다가 여인이 지팡이를 놓치자 포사이드는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주저하며 끝내 지팡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 일로 최흥종은 “서양 선교사는 문둥병자를 끌어안기도 하는데 나는 왜 지팡이도 잡지 못했는가?” 하며 고뇌하다가 그러한 힘은 오직 ‘예수’ 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진짜교인’ 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 후 “양림동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치료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급히 양림동에 세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해 7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정식으로 요양원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 나 병원’ 의 시초이다. 같은 해 최흥종은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리고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전도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포사이드와의 만남으로 변화된 최흥종은 무엇보다 광주나병원 일에 열심을 내므로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민족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1919년엔 서울로 가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였으며,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북문밖교회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한편 광주 주민들의 항의로 나병원은 여수반도 끝자락 율촌으로 옮겨갔는데, 그것이 오늘의 ‘여수애양원’ 이다. 1932년 최흥종은 윤치호, 김병로, 이인, 송진우, 조만식 등 유명 인사들과 함께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다가 죽어가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생계문제를 위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국에서 모인 오백 여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안마당까지 쳐들어갔다. 마침내 결판을 내고 소록도 갱생원을 대폭 확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이 바로 조선총독부를 향하여 벌였던 그 유명한 ‘나환자행진’ 이었다.
그러나 노회로부터 그의 ‘걸인목회’ 를 비난하는 자들이 생겨나서 제도권교회에서 추방을 당했다. 1935년 이후 최흥종의 삶은 ‘기행(奇行)’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기친구인 세브란스병원 오긍선 박사를 찾아가 본인의 거세 수술을 받았으며 그의 나이 55세 때 묵상 중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체험한 후, 다음과 같은 <사망통지서>를 주위 사람들에게 발송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 하지 말아 주시오.” 그리고 1. 가사로부터 방만(放漫) 2. 사회로부터 방일(放逸) 3. 경제로부터 방종(放縱) 4. 정치로부터 방기(放棄) 5. 종교로부터 방랑(放浪)한다는 뜻으로 ‘오방(五放)’을 자신의 호로 정하고 선언하였다.
8,15해방과 함께 정부의 강요에 의해 전남건국위원장직을 맡았으나 14일 만에 사퇴하였다. 최흥종은 한국나예방협회, 삼애학원, 호혜원 등을 설립하여 걸인과 병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앞장섰다. 그는 “이제 살만큼 살았다”며 1966년 2월10일부터 단식에 들어가 95일 만에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온 결핵환자들, 여수와 나주에서 올라온 한센병 환자들 등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아버지, 아버지” 하며 통곡하였다. 이처럼 최흥종은 낮은 곳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테레사 수녀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다간 한국교회사에서 빼 놓을 수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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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02-2230-5113) | < 저작권자 © 감리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