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전라도의 힘'/ 이라영

2013. 9. 5. 10:43정치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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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불온한 ‘전라도의 힘’ / 이라영

등록 : 2013.09.04 19:07수정 : 2013.09.04 19:07

이라영 집필노동자

홍상수 영화는 제목이 대체로 재미있다. 그중에서도 15년 전에 개봉했던 <강원도의 힘>이 내게는 무척 흥미로운 제목이다. 아마도 내 고향이 강원도라서 그럴 것이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내 소개를 할 때 “강원도 강릉에서 왔구요”라고 하자 흘러나왔던 반응은 아직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치 ‘강원도 사람’을 처음 보는 듯 “뭐? 강원도? 감자바위?”라는 반응이 툭툭 튀어나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징어 잡았니?”라는 농담을 건넸다. 깔깔 웃었지만 실은 낯설었다. 그리고 나는 강원도에서 온 순박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옴팡 뒤집어썼다. 나는 없고 강원도가 남았다. 나라는 개인이 어떤 지역과 연결될 때 만들어지는 편견을 경험한 첫 사례였다.

살면서 ‘강원도 사람’이라 덕을 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별을 받거나 피해를 입은 적도 없다. 기껏해야 산과 바다, 감자, 오징어 얘기일 뿐이다. ‘강원도의 힘’은 위협적이지 않다. 전라도처럼 유권자의 90%가 야당을 지지하지도 않을뿐더러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표가 많이 나온다고 해도 전체 인구가 대구광역시에 크게 못 미치니 티케이(대구·경북)와 같은 주류로 묶일 일도 없다. 그래서 <강원도의 힘>이란 영화 제목은 탈정치적일 수 있다. ‘안전한’ 영화 제목이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으로 <전라도의 힘>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등장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영화는 과연 가능할까. 온갖 정치적 올가미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용과 상관없이 좌빨 영화, 종북 영화라는 딱지가 붙는 황당한 상황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전라도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낙인이다. 1997년 12월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호남 사투리는 주로 무서운 조폭이나 악역의 말투였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청문회 과정에서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의 ‘광주 경찰’ 발언이 문제가 되자 김진태 의원은 “탈북자 출신으로 우리의 지역감정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며 조 의원을 변호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경찰 수사라인이 ‘진골 티케이’라는 지역감정 발언을 했다”며 공격했다.

그런데 ‘광주 경찰’과 ‘진골 티케이’는 과연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할 수 있는 개념일까. 우리의 지역감정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김진태 의원으로 보인다. 흔히 영호남 갈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지역감정 혹은 지역 갈등이라는 말은 지역 간의 권력관계를 정확히 담지 못한다. 감정이나 갈등은 대등한 권력관계에서 벌어진다.

유색 인종을 향한 차별은 인종 갈등이 아니라 인종차별이고, 성 소수자를 향한 차별은 성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커다란 사회 문제는 지역 간의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차별’에 있다. 정확히는 호남 차별. 그리고 강원도 사람, 충청도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전라도와 분리되기 위해 이 호남 차별에 참여한다. 우리는 누구의 시각으로 광주, 나아가 전라도를 바라보는 것일까. 전라도의 야권 지지율 90%는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역대 새누리당 계열의 정당들이 80년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이들의 후신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100%의 지지율이 아니라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아무도 나치와 유대인의 ‘갈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박해였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박해는 종종 ‘분쟁’으로 바라본다. 차별과 박해, 그에 대한 저항은 이렇게 시각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갈등’이나 ‘분쟁’으로 둔갑한다. 한국 사회에 지역감정이나 갈등은 없다. 지역 차별이 있을 뿐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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