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서울대 교수·사회학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신해박해(1791년)에서 병인박해(1866년)까지 1만5000명의 신도가 참수되었다. 교회사학자 로빈슨의 지적처럼 조선 천주교도들이 겪었던 형고는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초보다 더 극심했다. 형장에서 칼을 받은 교도들은 한결같이 은총에 빛나는 기쁜 표정으로 죽어 갔다. ‘왕과 부모를 부정하는가?’라는 수령의 심문에 교도들은 ‘아니오’라 답했다. 조리를 돌렸다. 그러곤 ‘천주를 부정하라’는 최후통첩에 ‘그럴 수 없다’는 대치선의 벼랑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순교를 택했다. 영생의 문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수천의 교인들을 조선사회는 두렵고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대박청원(大舶請願), 그게 유일한 출구였다. 교인들은 북경 주교에게 세 차례 밀서를 보냈다. 신부와 대박을 보내 달라.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동 황사영은 A4용지 세 장을 잇댄 크기의 비단에 1만3000자를 적었다. ‘배 수천 척과 정병 5, 6000을 보내 이 지역의 생령을 구하소서’라고. 으름장으로 족하다는 뜻이었다. 황사영백서는 북경에 전달되지 못했고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십 년 뒤 교인 유진길은 교황청에 대박청원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대박은 오지 않았고 대신 신부가 왔다. 로마 교황청이 조선대교구 설치를 승인한 1836년의 일이었다.
압록강 변문으로 밀입국한 엥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를 포함해 모두 12명의 프랑스 신부가 순교했다. 천주교는 피로 흥건한 박해의 땅에서 끊임없이 돋아나는 새순이었고, 탄압이 가혹할수록 멀리 퍼지는 풀씨와도 같았다. 1896년 피 어린 새남터 모래로 건축된 명동성당이 순교자의 혼령을 달래는 천주의 메시지를 타종하면서 박해는 끝났다. 상제와 천주의 공존시대가 열렸다. 그러니 서민의 벗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염수정 추기경에게 그렇게 속삭이지 않았겠는가. “한국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교황의 방한이야말로 천주교도에겐 두 세기의 꿈, 大舶이 아니겠는가. 정병과 대포가 아니라 경쟁에 찌든 우리들 마음의 곳간에 금은보화를 채워주는 서민의 벗, 평민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된 현실에 성령과 축복이 임하는 구원의 메시지, 모든 종교와 상통하는 선어(仙語)를 던지기에 마냥 친근한 세기의 어른이다. ‘가난과 맞서 싸우라. 불평등에 무감각한 사회에는 결코 평화와 행복이 오지 않는다’. 도도한 자본의 물결에 조각배처럼 흔들리면서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다보스포럼 지도자들에게 가난한 나라를 잊지 말라고 했다. 이 훈계야말로 윤지충을 비롯한 123인 복자들의 간절한 꿈, 아니 모든 종교인의 꿈, 대박래선이 아니겠는가.
새남터 인근 언덕에 들어선 천주교 학교 성심여고와 서강대학교를 졸업한 박근혜 대통령이 교황 방한에 대해 갖는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순교자 시복식은 엄정한 신분 사회에서 공역에 짓눌린 무지렁이 평민을 ‘동생혈육’처럼 대하고 인본주의와 상부상조로 인류애를 지향했던 그 정신을 시대의 좌표로 하라는 뜻이다. 세 모녀의 자살, 두 모자의 투신, 40·50대 가장의 속절없는 추락, 생계에 시달리는 고령자들의 비탄이 속출하는 사회를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이 대박래선의 절절한 현대적 메시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