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의 일류대 입시경쟁은 잘못됐다

2015. 3. 13. 06:15정치와 사회

시론] 상위 1%의 일류대 입시경쟁은 잘못됐다[중앙일보] 입력 2015.03.13 00:14 / 수정 2015.03.13 00:22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언론학
대학이 담당하는 교육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지성으로서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인문교육과 전문인재를 양성하는 직업교육이다. 전자를 담당하는 곳이 칼리지(college)라면 후자를 담당하는 곳이 스쿨(school)이다. 이런 구분이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하겠지만 대학 구성원에겐 일반고와 상업고, 또는 공고만큼이나 크다. 의대(medical school), 법대(law school), 경영대(business school), 공대(engineering school) 등이 대표적인 스쿨이다.

 최근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입학하고 싶은 대학으로 프린스턴대가 연속적으로 선정되고 있다. 이 대학은 그 흔한 경영대와 공대는 물론이고 법대와 의대조차 없다. 즉 스쿨은 아예 학교에 두지 않는 셈이다. 바로 이 점이 프린스턴대가 하버드대를 누를 수 있었던 요인으로 본다. 아이비리그 못지않게 좋은 평가를 받는 앰허스트대, 윌리엄스대와 같은 작은 리버럴 칼리지도 지성인으로서의 소양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유명하다.

 필자가 유학했던 1980년대 초 미국의 젊은 인재들은 학부는 공대, 대학원에선 상대나 법대로 진학하는 게 유행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학부전공 선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응용학문에서 순수학문으로, 그리고 기초학문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젊은 인재들은 인문사회 기초학문 차원에선 철학이나 문학·심리학 등을, 자연과학 기초학문 차원에선 화학이나 생물학·물리학 등을 복수로 전공하곤 한다. 관련이 별로 없어 보이는 학문분야를 복수로 전공해서 시너지 효과를 크게 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대학은 학교란 식당에서 전통을 재료로 해서 레시피란 이론을 통해 미래란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레시피를 통해 요리를 하더라도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교육도 온갖 노력과 시도가 있을 때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 레시피가 필요 없는 패스트푸드엔 고유의 맛이 없는 것처럼 패스트푸드화 된 지식도 마찬가지다. 기초학문 지식이 고유의 맛을 유지하는 생선회라면 패스트푸드화 된 지식은 통조림 안의 생선쯤에 해당한다. 물론 패스트푸드화 된 지식은 그 편리함으로 산업화시대엔 유용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펼쳐 갈 창조경제에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건설회사의 CEO가 “건설업 근무자도 단순한 디벨로퍼(개발자)에서 프로듀서(연출가)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건설업도 단순 시공에서 다자인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매지니먼트 등 포괄적 업무로 바뀌고 있어서다. 평면적이거나 획일적인 데서 다양성의 시대로 바뀌는데 이런 것은 공학이나 경영학으론 해결할 수 없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인문적 소양만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언젠가는 줄 것이다. 스티브 잡스도 대학 시절 서예를 익혔기에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아이폰 디자인 개념을 착안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경쟁사들의 스마트폰은 디자인만 있지 디자인 철학은 없는 폰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대학들이 이런 흐름과는 거꾸로 간다는 사실이다. 세칭 일류대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이비리그처럼 우리의 일류대는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들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는 공부기관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칼리지의 입지가 점차 좁아들면서 스쿨이 문어발처럼 그 좁혀진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한국 대학의 현 추세가 단적인 근거다.

 대학이 이런 식으로 변질한 데는 성적 좋은 학생들을 가능한 한 많이 뽑아 대학의 서열을 올리려는 대학들의 치열한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문·사·철과 같은 기초학문 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보다 경영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수능 커트라인이 높기에 틈만 나면 경영학과 같은 인기학과의 학생 정원을 늘리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소위 일류대는 상위 1% 학생을 얼마나 많이 끌어들이느냐로 광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글로벌’이라는 형용사가 앞에 붙은 정체불명의 학과들이 대학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다. 작금의 중앙대 사태도 이런 문제점이 노출된 것이라고 본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조차 학생 선발에 있어선 성적을 상위 5% 내로 여유 있게 제한한다. 성적만이 학생들 선발기준이 아니어서다. 한국의 일류대처럼 상위 1% 내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 또 상위 1%와 상위 5%의 차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좁혀질 수 있다. 대학이 작은 차이에 계속 집착하면 성적 좋은 학생을 조금 더 많이 선발할지 모르지만 이럴수록 우리의 교육 현장은 더욱 왜곡된다. 가르치는 경쟁을 해야지 뽑는 경쟁을 계속한다면 중등교육도 정상화될 수 없지만 이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