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 환우들의 99살 어머니’
여성숙 선생 첫 언론 인터뷰
여성숙 선생 첫 언론 인터뷰
여성숙 선생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욕심이 꽉 찼다’는 얘기를 하던중, 이영숙 언님의 손을 안으며 “이렇게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라며 웃고 있다.
자신이 한 일 자료도 다 없앴다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폐결핵 환자 등
평생 독신으로 살며 치료하고 돌봐세상의 악과 싸우다 권력에 쫓기던
김남주 윤한봉 윤영규 등도 숨겨줬다 재야인사도 유명인사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힘도 북돋아 줬다
결핵균 되지 말고 세상 살리라고 한국전쟁 때 의무대에 자원입대
국민방위군 젊은 이들 참상 보며 국가란 이름의 부패와 부조리 목격
죽어가는 생명 살리는 촛불 자임 여 선생이 세상의 악과 싸우는 이들을 숨겨준 것도 남다르다. 홍 화백이 공안당국에 쫓기던 김남주 시인과 후에 광주항쟁 주모자로 수배돼 미국에 망명한 윤한봉을 만난 곳도 한산촌이었다고 한다. 여 선생은 유신시대와 광주항쟁 때의 수배자와 윤영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위원장도 폐결핵 중환자들 속에 숨겨줬다. 유신시대 재야의 지도자인 함석헌과 민중신학의 태두 안병무,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도 이곳에 단골로 머물다 가곤 했다. 홍 화백은 “한산촌엔 그런 지식인들이 보던 책들이 한권 두권 쌓여 멋진 도서관을 갖게 됐는데, 그런 인물들을 만나고 명저를 보면서 병뿐 아니라 세상을 고칠 꿈을 품는 곳이었다”고 회고했다.목포에 의원하며 인근 한산촌 문열어 여 선생은 분명히 투사가 아니었다. 재야인사도 아니었다. 유명인사는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품었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주었다. 그런 삶은 어떻게 태동된 것일까.그는 황해도 태생이다. 소학교 4학년에 학업을 중단했다. 18살 때 결혼시키려던 집을 나와 원산 마르다신학원에 입학했고, 이어 일본여학교를 거쳐 29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에 들어가 1950년 5월 졸업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1월 중국군이 개입하자 정부는 국민방위군법을 만들어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살 이상 40살 미만의 남자 50여만명을 51개 교육연대에 분산수용해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하여금 통솔케 했다. 그때 자원입대해 의무대 대위로 대구에서 근무할 때 본 참상이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여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이를 여러 번 언급했다.“병력을 보강한다고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다 잡아다 놓고는 온종일 한 주먹밖에 안 되는 좁쌀밥 두 개만 줬어. 젊은 아이들이 그걸 먹고 어떻게 견뎌. 한겨울인데 덮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 지푸라기를 깔고 잤지. 못 먹고 병들어 죽어가는데 치료할 약 한 톨이 없었어. 의사는 왜 데려다 놨는지 몰라. 방에 가보면 젊은이들이 매일 죽어나가고, 옆 사람 발가락 좀 제 입에서 꺼내달라고 해. 그거 꺼낼 힘도 없는 거야. 그렇게 젊은 아이들이 다 죽어가는데, 그곳에서도 윗사람들은 고깃국에다 하얀 쌀밥을 넘치게 먹데.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그때 그가 본 것은 참상만이 아니었다. 국가란 이름의 허울과 부패와 부조리를 보았다. 미처 꽃도 못 피우고 지는 청춘들을 너무 많이 본 그는 그 이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촛불이 되었다. 50년대 전주예수병원과 광주기독교병원 결핵과장으로 있으면서 전북 순창 가막골에 평심원을, 광주 무등산에 송등원 등 결핵요양소를 만들어 무의탁환자들을 손수 돌보다 1961년 목포의원을 하면서 한산촌을 연 것이다. 그는 애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에 걸린 목판글씨가 여성숙 선생에 대한 환자들의 고마음을 담아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