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싱, 청쿵그룹 회장

2017. 12. 7. 20:14경영과 경제

201712호 (2017.11.23) [76]목차보기

[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10)]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미국 포브스 사이트 집계에 따르면 아시아 최고 부자는 중국 온라인 유통업체 알리바바의 창업자 겸 CEO인 마윈(馬雲)이다. 리카싱 회장은 3위를 차지했다. 홍콩은 '리카싱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리카싱(李嘉誠·89, 이하 광둥어, 표준중국어로는 리자칭) 회장은 오랫동안 아시아와 중화권 제1의 부호로 이름이 높았다. 2017년 11월 현재에도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의 한 명이다. 추정 재산이 333억 달러에 이른다. 주가 등에 따라 매일 몇 억 달러씩 왔다 갔다 한다. 미국 포브스 사이트 집계에 따르면 아시아 최고 부자는 중국 온라인 유통업체 알리바바의 창업자 겸 CEO인 마윈(馬雲)이다. 재산이 435억 달러(약 48조 원)로 세계 14위다. 2위는 인도의 무케시 암바니 릴라이언스 회장으로 재산이 348억 달러에 이른다. 리 회장은 3위를 차지했다. 홍콩 1위에 중화권 2위다. 이렇듯 리 회장은 중화권과 아시아의 대표적인 경영인이다. 특히 홍콩은 ‘리카싱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홍콩 사람들은 농반진반으로 “홍콩 사람이 1달러를 쓰면 그 중 5센트는 리카싱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는 거대한 기업제국을 이루고 있다.

리 회장은 현재 3가지 직책을 보유하고 있다. 청쿵허치슨홀딩스(長江和記實業)와 청쿵그룹(長江實業集團), 그리고 리카싱재단의 회장이다. 청쿵허치슨홀딩스와 청쿵그룹 모두 지주회사다. 리 회장은 2015년 3월 청쿵실업(長江實業)과 자회사인 허치슨왐포아를 합병하면서 이 두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청쿵실업은 리 회장이 22세 때인 1950년 친척들로부터 5만 홍콩달러를 빌려 플라스틱 회사로 처음 창업한 기업이다. 허치슨왐포아는 리 회장이 1979년 인수한 영국계 글로벌 물류업체다. 두 공룡 기업의 합병 규모는 240억 달러에 이른다. 21세기 기업합병 사상 최대 수준인 ‘세기의 합병’이다. 합병 직전 미화를 기준으로 청쿵실업이 184억 달러, 자회사인 캐나다 허스키에너지가 75억 달러, 허치슨 왐포아가 13억 달러, 허치슨 텔레콤이 1억 7200만 달러, 청쿵인프라스트럭처가 418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금과 기타 자산도 30억 달러에 이르렀다.

리 회장은 두 공룡 기업을 합친 뒤 비부동산 부문의 지주회사는 청쿵허치슨홀딩스가, 부동산 분야의 지주회사는 청쿵그룹이 각각 맡게 했다. 청쿵허치슨홀딩스는 캐나다 허스키 에너지와 영국 이동통신회사 쓰리, 그리고 전 세계 50여 개 국에 있는 글로벌 자회사를 모두 맡겼다. 청쿵그룹은 과거 청쿵실업과 허치슨왐포아의 모든 부동산 자산을 담당하면서 홍콩 관련 사업을 전담하도록 했다. 영문 약자로 청쿵허치슨은 CKH로 청쿵은 CK를 쓴다. 청쿵실업의 지분 43.24%를 보유했던 리카싱 일가는 합병 이후 청쿵허치슨홀딩스와 청쿵그룹의 지분을 총 30.15% 얻었다. 리카싱의 거대한 제국이다. 당시 합병으로 홍콩증시에서 청쿵실업 주가는 13.5%나 올랐다.

장남인 빅터 리(李澤鉅·51)가 청쿵그룹의 부회장을 맡아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리 회장은 지난 6월 90세가 되는 내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제 보이는 것 너머를 생각하는 완숙의 아시아 경영인이다. 리 회장의 차남 리처드 리(李澤楷·49)는 홍콩 통신회사인 퍼시픽 센추리 그룹(PCG)을 창업해 운영했다. 다국적 정보통신 지주회사인 PCCW(電訊盈科有限公司)의 회장도 맡고 있다. 13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스탠퍼드대를 다닌 차남은 자립하라는 부친의 지시에 맥도널드에서 일하거나 골프장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2세를 제대로 된 경영인으로 키운 것도 리 회장의 업적이다.

22세에 창업해 플라스틱 조화 팔아

리카싱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빈손으로 출발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다 근면성과 창의성으로 ‘아시아의 꿈’을 이뤘다. 리 회장은 1928년 광둥(廣東)성 동부의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났다. 리 회장은 중국 광둥(廣東)성 차오저우(潮州)사람이다. 차오저우는 상인과 화교로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조주 상인’으로 이름 높았다. 조주 상인은 근면성과 개척정신, 그리고 신용에서 최고로 통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조선 고종 17년(1880년) 중국 차오저우 상인이 충청도 서부 비인현(지금의 서천군 비인면)에 표류한 기록도 있다. 조주 상인들은 중국 대륙 각지를 오가는 기존 항로에다 이른바 ‘香(홍콩)-星(싱가포르)-暹(태국)-汕(광둥성 산두)’ 항로 네트워크를 추가해 중국과 동남아 전역을 잇는 물자 교역을 활성화했다. 그런 조주 상인의 일부가 중국 북부에 와서 조선홍삼까지 구매해갔던 것이다.

1928년생인 리 회장은 이런 차오저우의 선비 집안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청나라 말기 글을 읽는 선비였다. 아버지 리윈징(李雲經)은 교육자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런 집안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자란 리카싱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은 1937년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이주했지만 그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살기가 힘들어지면서 1940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따지고 보면 리 회장은 홍콩에 난민으로 들어와 새 출발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주 2년 만에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됐다. 학교는 사치가 됐다. 그의 정규교육은 중학교 1학년까지였다. 가게에서 장시간 근무를 하면서도 생활은 빈궁했다.

성실과 개척정신, 신용의 조주 상인


▎2012년 9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홍콩 청쿵센터 영빈관에서 리카싱 회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회장은 LTE망 구축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 사진. 삼성전자 제공
22세가 되던 1950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친척들로부터 5만 홍콩달러를 빌려 플라스틱 회사를 차렸다. 조주 상인들은 젊은이에게 세 차례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가장 긴 양쯔강(揚子江, 중국 표준어로는 창장(長江)이라고 함)처럼 길게 가라고 창업한 회사 이름을 청쿵공업유한공사(長江工業有限公司)로 정했다. 창장의 광둥어 발음이 청쿵(長江)이다. 그는 플라스틱으로 조화를 만들어 팔았다. 잡지에서 잘 만든 갖가지 조화의 사진을 보고 반해 장사가 될 것으로 보고 1957년 이탈리아까지 가서 플라스틱 조화 기술을 배워와 이를 사업화했다. 그의 예감은 적중해 사업은 갈수록 발전해 창업 7년 만에 회사를 세계 최대 플라스틱 조화 업체로 키울 수 있었다. 1971년 회사 이름을 청쿵실업으로 바꾸고 이듬해 홍콩증시에 상장했다. 홍콩증시 1호 기업으로 증시 번호가 ‘0001’이다.

1979년 업종 다각화 작업에 착수해 영국계 물류업체인 허치슨왐포아를 사들이고 1985년에는 홍콩전력을 인수했다. 허치슨왐포아는 리카싱에 글로벌 기업인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현재 전 세계 주요국의 항구에서 항만 컨테이너 사업을 벌이고 있다. 1979년 9월 리카싱이 인수한 허치슨왐포아는 전 세계 54개국에서 23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다국적 투자회사로 발전했다. 항만 관련 업무, 부동산과 호텔, 유통, 에너지와 인프라 및 투자, 통신의 다섯 영역에서 사업을 펼쳤다. 홍콩과 중국에 싱가포르와 동남아는 물론 전 세계로 투자와 사업 영역을 넓혔다. 페이스북에 1억2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 0.8%를 확보하기도 했다. 한때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다 2015년 합병으로 다시 태어났다.

홍콩과 해외만 상대로 사업을 벌이던 리 회장은 1980년 광둥성 산터우(汕頭) 항만 개발을 시작으로 중국 본토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8년 시작된 덩샤오(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 체제인 홍콩에서 기업을 일궈본 리 회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그의 경영 노하우와 커넥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물류 인프라 구축이 시급했다. 그래서 리 회장을 통해 상하이 컨테이너 터미널, 경제특구의 핵심지인 광저우(廣州)-주하이(珠海) 간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 뒤 선전 매립지 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부동산 사업에도 활발하게 뛰어들었다. 이후 출판·방송·인터넷까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 다각화로 아시아 대표 기업인으로

중국은 리 회장에게 기회를 안겼고, 리 회장은 중국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구축을 도왔다. 리 회장은 1980년 리카싱 기금회를 설립해 의료·교육 등 중국의 공익 사업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리 회장은 특히 교육 분야에 많은 기부를 해왔다. 베이징·난징·뤄양·청두·톈진·광저우·시안·충칭·홍콩 등 수많은 대학을 설립하거나 지원했다. 베이징에 동양 최대 규모라는 둥팡광장(東方廣場)을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

주목할 점은 청쿵허치슨홀딩스와 청쿵그룹 모두 기업 등록은 조세 천국인 케이먼 군도에 하고 본사는 홍콩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중국의 간섭이 보다 덜한 나라에서 경영권 승계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리 회장이 홍콩과 중화권을 떠나 글로벌로 사업영역 확대를 본격화하는 신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리 회장은 최근 몇 년간 중화권에 대한 투자는 줄이는 대신 글로벌 투자를 계속 늘려왔다. 2013년 이후 중국 수퍼마켓 체인인 바이자(百佳)에서 손을 뗐고 상하이 루자쭈이 오리엔탈파이낸셜센터(OFC)와 베이징의 잉커센터(盈科中心)를 매각했다. 2013년 이후 부동산을 계속 팔아치우는 것은 물론 중국 기업 투자 비중도 조절해왔다. 중국 대기업인 창위안(長遠)그룹의 지분도 팔아버렸다. 반대로 호주와 아일랜드·네덜란드·캐나다 등에서 기업과 각종 자산 매입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홍콩의 불안한 정치상황을 염두에 두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전략적으로 손보고 있을 수도 있다.

홍콩에선 최근 들어 경제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의 입김 속에 홍콩 정부의 기업 관련 규제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신용보장제, 연금 의무가입제, 차별금지법, 정부의 모기지 지원방안 등 새로 도입된 제도가 수두룩하다. 본토 당국의 요구와 기준에 맞추기 위한 움직임이다. 홍콩은 오랫동안 규제를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게 빈곤층을 줄이는 최선의 복지정책이라는 이유로 최저임금제가 없었지만 최근 이를 도입했다. 빈곤층의 최소한도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여전히 최저임금이 없다. 홍콩이 새로운 환경을 맞으면서 리 회장도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난민으로 출발해 중화권과 아시아권의 최고 경영인으로 우뚝 선 리카싱 회장은 내년으로 90세를 맞는다. 그 나이에도 새로운 경영 환경에 맞춘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이 장렬하다.

리 회장은 ‘인간미 있는 경영인’으로 존경받는다. 조주 상인의 후예답게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젊어서 세탁소나 가게 점원으로 일할 때 항상 시간을 15분 정도 당겨놓고 거기에 맞춰 살았다. 그렇게 평생을 남보다 먼저, 일찍, 재빠르게 움직여왔다. 낡은 양복과 구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중국 공산당도 그런 그를 ‘자본주의 세계의 기업인’으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이 그를 개혁개방의 홍콩 파트너로 삼은 까닭일 것이다.

리 회장은 그렇게 아낀 돈으로 투자와 기부를 동시에 해왔다. 특히 제조업으로 번 돈으로 홍콩의 목 좋은 부동산에 투자해 돈을 불렸다. 영국 식민지 시절 도시를 확장할 수 없었던 홍콩의 부동산은 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격이 폭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홍콩에서 부동산으로 번 돈을 대륙에 투자해 중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 자신도 사업영역을 확장하며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윈윈이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은 모두 그의 덕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 30년간 그의 차를 몰았던 운전기사가 그의 통화내용에서 얻은 부동산 정보를 바탕으로 조금씩 투자를 했더니 노후를 지내고도 남을 이익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온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고 인간미가 없는 사람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라는 그의 조언은 비즈니스의 금언으로 남았다. 갈수록 인간과 이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경영 환경이 정착하고 있는 요즘 특히 귀 기울일 대목이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경영대학원에서 아시아의 대표 기업인으로 그를 연구한 이유일 것이다.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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