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하려 600만명 해외로 흩어져
추모공원·비, 평화 소중함 일깨워
노아 방주 닿은 아라라트산이 성산
전세계 최초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 호르비랍 수도원과 아라라트산 |
▲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에서 헌화 하는 모습 |
▲ 제노사이드 추모공원 추모비 |
▲ 게가르드 수도원 전경. |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현장에 서다
아르메니아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강제 이주와 학살을 당했다. 전쟁 당시 이들이 적국인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했기 때문이다. 학살로 희생된 인원은 150만명에 이른다.
이 대학살을 피해 많은 난민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다. 현재 약 600만명이 해외에 있다. 아르메니아 인구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다.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는 예레반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도심을 흐르는 라잔 강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대학살 50주년인 1965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당시 소련 정부에게 학살의 인정과 위령탑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추모공원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대학살을 인정하는 뜻으로 심은 수목(樹木)들이 있다. 학살당시 희생자들의 마을이 새겨진 추모의 벽을 지나면 남쪽으로 아라라트산을 바라보며 추모비가 세
워져 있다. 추모비는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섰고 오른편에는 40m에 이르는 첨탑이 우뚝하다. 12개의 석판은 오늘날 터키의 영토가 된 소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의미한다. 첨탑도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작은 것은 소아르메니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원형의 석판 가운데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주변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가 가지런하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몇 마리 날아든다. 잠시 묵념에 잠기려할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 다가서도 날지 않는다. 비둘기는 날개도 상했고 눈도 다쳤다. 대학살을 당한 영혼들의 절규인가, 제노사이드 인정을 요구하며 평화를 갈구하는 아르메니아의 냉혹한 현실인가.
공화국 광장에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참담함과 슬픔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는 이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평화의 소중함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아르메니아의 국화(國花)는 '물망초'다. 꽃말이 의미하듯이 디아스포라와 대학살의 슬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다.
# 전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聖山)이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닿은 곳이 이 산이고 노아가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 아르메니아 땅이기 때문이다. 수도인 예레반도 노아가 방주를 나서면서 했던 '보인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라라트산은 현재 터키의 영토다. 터키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호르비랍(Khor Virap)수도원이 가장 가까이서 성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도 12년 먼저 전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다. 호르비랍 수도원은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했던 성 그레고리가 13년간 감금되었던 곳이다. 그는 공주의 현몽(現夢)으로 티리다테스 3세의 병을 고쳐준다. 이에 감명을 받은 왕은 박해를 풀고 칙령을 내려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되었다.
수도원 가까이에 이르자 아라라트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평원을 수놓은 포도밭 너머 나지막한 언덕에는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聖地)인 호르비랍 수도원이 있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답게 수도원과 교회가 많다. 아르메니아정교회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아르메니아인의 단결과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다.
에치미아진의 마더성당은 성 그레고리가 4세기에 지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 게가르드 수도원도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은 암굴에서 시작되었다. 호르비랍에 감금되었던 그레고리가 맨 처음에 이곳 동굴에서 성스러운 샘물을 발견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가르니 사원도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코카서스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리스풍의 열주(列柱)가 있는 사원이다. 몽골 침입 당시에 무너진 것을 소련시대의 고고학자들이 복원해 놓았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왕의 별장과 목욕탕도 발굴되었다. 칸칸이 만들어진 방마다 온돌의 흔적이 있다. 우리의 찜질방과 같은 구조가 2000여 년 전 이곳에도 있었다니.
인천일보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li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