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성 2 , 루크에티우스

2019. 7. 25. 04:16자연과 과학

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다

  • 김학순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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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운명

하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 차츰 잊힌 것은 물론 책 자체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9세기 이후 프랑스와 독일 수도원 두세 곳에서 떠돌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이교(異敎)에 의해, 그다음에는 역시 적대적인 기독교에 의해 헛된 몽상, 위험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상이라고 낙인찍혀 이동이 억제됐다.

500년 뒤쯤인 1417년 ‘책 사냥꾼’이란 별명을 지닌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의 한 수도원 서가에서 이 책의 옛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드라마 같은 미래가 시작된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매장해버린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수도원에 이 책의 사본 한 권이 흘러든 것부터 우연이었다. 썩어 없어질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사본을 9세기의 어느 날 한 수도사가 베끼기 시작한 것도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 필사본이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포조의 손에 떨어지게 된 것 역시 엄청난 우연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이 책에 “모든 사물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쓴 그대로 말이다.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무신론적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무신론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쟁점이자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계였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무신론을 단죄하는 종교재판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포조의 재발견으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인 1516년 피렌체 종교회의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학교에서 이 책을 읽는 걸 금지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이후 이 책의 인쇄본도 빠르게 나왔지만, 서문에는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을 실어야 했다.

그럼에도 문예부흥을 알리는 전령사들은 이 불온서적에서 혁명적인 영감을 얻어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었다. 미와 쾌락의 향유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인간이 탐구할 목표로까지 밀고 나간 게 르네상스 문화였다.

매혹적인 베누스(비너스)를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의 걸작은 이 책이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사랑과 미의 여신 베누스에 대한 찬가로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기술 연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생한 천문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야심 찬 연구, 리처드 후커의 신학 이론에도 이 책이 스며들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로버트 버턴의 정신질환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술, 월터 롤리의 기아나 탐험기 같은 저작도 쾌락을 극대화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조르다노 브루노, 토머스 홉스, 스피노자의 지적인 대담성도 이 같은 혁명적 사고 속에서 형성됐다.



원자가 자유롭게 이탈한다

‘원자가 자유롭게 이탈한다’는 이 책의 생각은 봉건제의 속박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계몽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전해줬다. 몽테뉴는 ‘수상록’에 무려 100여 행에 달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을 정도다. 작가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루크레티우스처럼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한다. 아이작 뉴턴은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이 창조한 원자를 쪼갤 수 없다”고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창한 카를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였을 정도로 이 책에 심취해 있었다. 이 책의 다섯 종류를 소장하고 ‘에피쿠로스주의자’를 자처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행복 추구권’까지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고대인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극찬하며 연구 자료로 삼았다.

유종호 예술원 회장은 루크레티우스가 근대 형성에 영향을 끼친 과정을 읽고 ‘시도 역사를 만든다’는 글을 남겼다. 한 권의 책이 지적 혁명을 여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창조해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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