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방정책

2019. 8. 11. 08:52정치와 사회

신 북방정책, 어디서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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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북방정책의 다중적 함의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신 북방정책을 ‘동북아플러스 책임공동체’, ‘신 남방정책’과 더불어 대외정책 핵심 아젠다 중 하나로 제시했다. 동년 9월(6~7일) 문 대통령은 러시아 극동의 주도(州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3차 동방경제포럼(EEF: Eastern Economic Forum)에 참석해 이른바 ‘나인 브릿지’(9-Bridge) 전략을 제안하면서 신 북방정책의 추진을 본격화했다.

문재인 정부가 신 북방정책을 천명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날로 심화되는 보호무역주의 추세의 강화, 미·중 통상 분쟁 격화, 세계 금융위기 등 글로벌 경제 환경의 불확실성을 선제적으로 타개하는 가운데 장기 저성장·저투자 늪에 허우적거리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고, 특정 국가에 대한 무역 의존도를 줄이려는 대외경제적 노력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신 북방정책은 유라시아 대륙 내부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신대륙주의’(New Continentalism) 질서에 대한 능동적 조응의 산물이기도 하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 러시아, 인도, 카자흐스탄으로 대표되는 대륙국가들이 급속히 고도성장을 구가함에 따라 유라시아 전역에 철도, 파이프라인, 고속도로, 전력망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결과 실크로드 시절 이후 전혀 연결되어 본 적이 없는 광대한 북방의 개별국가들이 서로 긴밀히 접촉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협력과 통합의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켄트 콜더(Kent Calder) 교수는 이런 지정학적 추세를 2012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신대륙주의 질서’의 출현으로 규정한다. 현재 한국도 이 ‘북방’에서 전개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적극적인 동참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신 북방정책도 신대륙주의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신 북방정책은 한국의 경로 의존적 국가발전전략의 수정과도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기존의 해양 중심 국가발전 전략에서 해양과 대륙을 동시에 아우르는 ‘해양-대륙 복합화 전략’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대외 정치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신 북방정책은 탈냉전이라는 세계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활용하면서 주체의 자율성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외교적 ‘표식’ 전환이고, 나아가 신대륙주의 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서 한국이 독자적 또는 주도적 게임 참가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국의 경제 울타리에도 갇혀 있지 않고, 미국의 안보 우산에도 무한정 편승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본다. 위에 언급한 이 모든 국가적 염원을 외교정책 ‘용기’에 담은 것이 신 북방정책일 것이다.

 

신 북방정책의 차별성과 평가

신 북방정책의 연원은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방정책은 동·서 화해의 국면에서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한국의 국제적 지위획득, 새로운 북방 시장의 개척, 내한(內韓) 관계에서 주도권 확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통일을 위한 우호적 환경 조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이후에도 대륙으로의 진출과 한반도 문제를 연계해 해결한다는 북방정책의 기본 인식은 지속되었다.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햇볕정책’, ‘평화번영정책’,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과 같은 유사(類似) 북방정책을 단속적(斷續的)으로 전개했지만,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역대 한국 정부의 북방 외교정책은 다양한 대내외적 제약요인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신 북방정책도 아직까지 동일한 범주에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2017. 9. 6). 청와대 제공

집권 이후 지난 2년여 동안 문재인 정부는 신 북방정책의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경주해 왔다. 신 북방정책은 과거의 북방정책과 몇 가지 차별성을 갖는다.

첫째는 신 북방정책 추진의 전담기구로서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창설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신 북방정책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컨트롤 타워로서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설립하고, 16대 중점추진과제와 56개 세부과제를 도출하는 등 제도화된 추진 체계를 구축했다.

둘째는 ‘한반도 운전자론’과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신 북방정책에 적절히 반영하여 한국 주도의 대북 관계 개선과 남북간 경협증진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반도 신경제구상은 남북 경협을 복원해 공동시장 형성을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H경제 벨트’로 명명된 접경지역 협력, 즉 초국경협력을 촉진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지리적 영역을 북한과 대륙으로 확장하는 청사진이다.

셋째는 신 북방정책이 러시아의 신동방정책과 지경학적 연계성을 확대 및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틴 정부의 신동방정책은 21세기 러시아의 국가발전 동력을 극동지역 개발과 역동적인 아시아·태평양 연안 국가와의 협력에서 찾는 구상이라는 점에서 신 북방정책은 러시아의 신동방정책과 밀접한 친화성을 갖는다. 한국의 입장에서 북한을 관통해 북방으로 이어지는 철도·가스관·전력망 연결, 해외식량기지 개척, 안정적 어획량 확보, 북극 개발 및 항로 개척 등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미래 대한민국의 존립과 국가적 번영에 필수불가결한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9-Bridge 전략’을 우선적으로 제안한 배경이다.

문재인 정부가 다양한 정책구상과 추진체계 구축, 2017년 12월 방중, 2017년 9월과 2018년 6월 두 차례의 방러, 2019년 4월 중앙아 3개국 순방외교 등을 통해 북방협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국민과 언론이 체감할 만한 성공적인 결과물을 찾기는 어렵다. 신 북방정책의 견인차로 채택한 소위 ‘9-Bridge 전략’, 즉 전력·가스·조선·수산·북극항로·항만·철도·산업단지·농업 등 9개 분야에서 대러 경협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사업도 아직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 전체적으로 신 북방정책은 성과의 양적, 질적 측면에서 과거 역대 정부의 북방정책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신 북방정책 추진의 장애물과 극복 방안

전통적으로 북방 외교정책의 추동력을 약화시킨 구조적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한반도 분단과 남북관계의 부침이다.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북한은 북방의 허브 국가인 중국 및 러시아와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증진을 방해했던 ‘급소’로 작용했다. 중·러가 여전히 북한의 후견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양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는 한러 및 한중 외교관계 발전에 균열을 가했다. 이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단절된 북방지역과 물류, 교통로, 에너지 네트워크의 연결을 모색했던 역대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북한에 대한 안정적 관리, 무엇보다도 남북관계의 개선 및 발전 없이는 어떤 유형의 북방정책도 결코 순조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남북간 대화의 지속, 군사적 신뢰구축 노력,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더불어 개성공단 사업 및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가 필요한 이유다.

두 번째 핵심 장애물은 신대륙주의 질서의 두 축, 중국과 러시아가 국제 세력관계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이 한미 동맹적 위계질서 하에 있기 때문에 북방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워싱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역시 한국 정부의 과도한 북방 접근을 막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제한을 가해 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북방정책은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강대국간 권력 투쟁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외교적 운신의 폭이 제약을 받아왔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이 가한 대러 제재로 한·러 간 교역액이 반 토막 나고, 주한 미군의 한반도 사드 배치로 한중 관계의 후유증이 지속되는 현 상황이 한국외교의 취약성을 잘 설명해준다.

결국 신 북방정책의 성공 여부는 한국 외교의 좌표 설정, 즉 대외정치적 포지셔닝 문제와 밀접한 함수 관계를 갖는다. 미국과 동맹관계이면서 중·러와 인접한 한국에게 신 북방정책은 항상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옵션은 미국과 강한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러와도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헤징’(hedging) 전략일 것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의 압력에도 한국이 국제적 대러 제재에 불참을 선언하고, 2015년 중국이 주도하여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지분 참여를 결정한 것이 헤징 전략의 적절한 사례에 해당한다. 문제는 미국과 중·러 연대 사이의 대립 및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 헤징 전략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헤징(hedging) 전략을 기본으로 하되, 미중 또는 미러 사이의 이해 충돌과 긴장을 줄이기 위해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소위 ‘네트워킹’(networking) 전략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은 국가목표를 추구하면서 동북아의 전략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이 과거보다 훨씬 크다. 일종의 네트워킹 전략으로서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한반도 운전자론’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낸 것처럼, 한국은 이제 강대국 사이에서 더 많은 신뢰를 구축하고 더 나은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데 나름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동북아에서 평화 이니셔티브를 촉진하고 기존의 다양한 소(小)다자협력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역내에 제도화된 안보메커니즘 창설을 모색하는 ‘지역주의’(regionalism) 전략의 구사도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을 넓혀줄 수 있다.

덧붙여서 신 북방정책의 구조적 제약요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치(精緻)한 접근 전략도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는 신 북방정책이 강대국 관계에 종속되지 않도록 한국외교의 주도성을 강화하는 노력이다. 2013년 러시아와 60일 비자면제 협정 체결은 한러간 인적 및 물적 교류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의 조속한 FTA 체결 필요성도 제기된다.

둘째는 북방경협 사업 추진 시, 북핵 리스크를 줄이는 차원에서 북한을 포함한 다자 협력과, 북한을 제외한 양자 및 다자 협력 프로젝트를 투 트랙으로 분리해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북핵 문제가 더 이상 북방경제협력 사업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셋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정치의 경직성을 우회하면서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미/한일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러 재계간 상설 협의 채널의 구축 및 협력 강화, 2016년 한러가 공동으로 창설한 ‘유라시아 국회의장 회의’와 같은 의회간 실질적 협력의 증진, 중앙정부 주도의 사업 추진 방식 대신에 지방정부간 협력을 모아서 신 북방정책의 발전 동력으로 만들어나가는 전략 등을 유용한 사례로 제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을 포함해 북방에 대한 한미간 경제적 공유 이익의 교집합을 넓혀나가는 외교적 창의성도 요구된다. 한반도를 에워싼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를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상황에 맞는 대외정치적 위치 선정을 하면서 위에 제시한 정책제언들을 적절히 반영한다면, 신 북방정책은 과거와 차별화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정부에게 남은 임기 3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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