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 제갈량

2020. 8. 6. 10:20카테고리 없음

‘중국공산당의 제갈량’ 왕후닝, ‘중국식 유신’을 설계하다

등록 :2020-08-04 17:01수정 :2020-08-0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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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03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에게 발탁돼, 후진타오 시절과 시진핑 시대까지 최고 지도자 세 명의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보좌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다.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에게 발탁돼, 후진타오 시절과 시진핑 시대까지, 최고 지도자 세 명의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보좌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다. 지도자 책사로서 막후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그가 2017년 10월25일 무대의 중앙에 등장했다.

시진핑 시대 중국의 정책 설계도를 그리는 전략가, 왕후닝(65)은 ‘중국공산당의 제갈량’ ‘중국의 키신저’ 등으로 불린다.

 

그는 중국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1명(서열 5위)이며,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다. 중국 최고 지도부에 오르려면 여러 지방을 통치하며 업적을 증명해야 하지만, 그는 학자 출신으로 지방 통치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당원 9천만명 중국공산당의 권력 정점에 올랐다. 지도자의 책사로서 막후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그가 2017년 10월25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어 무대의 중앙에 등장한 것은 정치적 이변으로 여겨졌다.이는 시진핑 지도부가 왕후닝의 전략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신호다. 왕후닝이 책임지고 있는 중앙정책연구실은 중국공산당의 이론과 정책을 만드는 곳인데 왕후닝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이 조직을 이끌고 있다. 즉, 그는 장쩌민 주석에게 발탁돼, 후진타오 시절과 시진핑 시대까지, 최고 지도자 세 명의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보좌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다. 중국공산당 당헌에 명시된 지도이념인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공산당이 노동자·농민, 지식인 외에 자본가의 이익도 대변한다는 이론),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지속가능하고 균형 잡힌 성장 추진),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시진핑 시대의 비전인 ‘중국몽’과 일대일로 정책에도 왕후닝의 전략이 주요하게 반영됐다.왕후닝은 개인적 면모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로 유명하다. 사생활에 대해서는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리는 일중독자라는 것과 3번 결혼을 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상하이의 명문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로서 199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논문과 저서들을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다.왕후닝의 사상적 궤적은 1978년 개혁개방으로 외부에 문을 열고 ‘서구’를 적극적으로 흡수한 뒤 현재는 신권위주의적 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와도 같다.10대 시절 병약했던 왕후닝은 문화대혁명(문혁) 시기 지식 청년들이 농촌으로 보내져 고된 노동을 하던 하방을 피하고, 17살에 상하이사범대학 간부학교 외국어 교육반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문혁이 끝나고 1978년 대학입시와 대학원 제도가 회복되자 그는 푸단대학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이때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인 천치런이 그의 지도교수였다.1981~1991년 푸단대학에서 왕후닝과 함께 공부했던 샤밍 뉴욕시립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왕후닝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출발해, 서방 학술사상과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로 영역을 넓혀 중국 정치체제와의 비교연구로 나아갔다. 이 시절의 왕후닝은 중국 학계에 서방 학술사상을 소개하려 했고,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현대정치분석>을 번역하기도 했다.1980년대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시기다. 1980년대 초 왕후닝도 13차 당대회 정치보고에 참여해 당-정(공산당과 정부) 분리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왕후닝은 1984년 공산당에 가입했고, 1985년 30살의 나이에 푸단대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1986년 무렵 왕후닝은 중국 사상계에서 ‘신권위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기 시작했다. 신권위주의는 비서방 후발국가들에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철권통치로 사회를 강하게 통제하면서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권위주의 단계를 거쳐야만 점진적으로 정치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1960년대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비서구 국가의 근대화 과정에 대해 제시한 이론이다.이후, 왕후닝은 2차례 미국 방문 경험에서 다원주의, 다당제, 선거제도 등 미국모델이 중국에 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더욱 강화했다. 1988년부터 이듬해까지 미국을 관찰하고 쓴 <미국이 미국을 반대한다>에서 ‘미국이 공평한 기회의 땅이며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서구식 민주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기득권 집단이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후 중국은 서구와 다른 고유한 정치 모델,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그의 신권위주의 이론은 더욱 강화된다.왕후닝의 이론은 대외적으로는 서구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식 국제질서 구상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미국에 반대한다>에서 그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군사적으로 1980년대에 경제적으로 미국을 위협한 것처럼, 서구의 개인주의와 향략주의, 민주주의는 결국 아시아의 집단주의, 권위주의에 패배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집단주의와 신권위주의에 기반한 중국이 결국은 미국에 대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1989년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광장과 주요 도시들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는 동안 왕후닝은 시위와 거리를 두었다. 천안문 시위 진압 이후, 상하이 당서기에서 중국 최고 지도자로 발탁된 장쩌민 주석은 왕후닝을 비롯한 상하이의 인재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지금까지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으로 지도자는 바뀌었지만 ‘정책 설계자’는 언제나 왕후닝이었다. 왕후닝의 중국식 신권위주의 이론이 중국공산당의 강권 통치 속에 이뤄지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이자, 현실에 따라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왕후닝과 함께 중국 신권위주의를 대표하는 학자인 샤오궁친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을 신권위주의 1.0, 시진핑의 중국을 신권위주의 2.0의 시대로 구분한다. 샤오 교수는 2018년 11월 텐저연구소가 연 ‘개혁개방 40주년 토론회’에서 한 강연에서, 덩샤오핑이 구축한 중국식 신권위주의 1.0은 공산당의 강권 통치를 기초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지만, 공산당의 통치 지위에 도전하지만 않는다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체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다원성을 내포한 ‘유연한 신권위주의’였다고 평가한다. 장쩌민·후진타오 시기까지는 이 모델에 기초해 경제체제 전환과 성장의 성과를 거뒀지만, 심각한 부작용도 누적되었다.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면서 부패와 빈부격차, 이익집단끼리의 경쟁과 충돌이 극심해졌다. 이를 해결할 방법을 놓고 문혁의 구호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극단좌파’와 서구식 민주혁명을 외치는 ‘극단우파’가 거리에서 충돌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질 만큼 갈등이 심각해졌고, 이런 정치적 위험이 시진핑 시대 신권위주의 2.0이 출현한 배경이라는 게 샤오궁친의 해석이다.시진핑 시대 신권위주의 2.0은 ‘강경 신권위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공산당의 전통 조직과 이념을 강화해 지도자와 당의 중앙권력을 고도로 집중시키고, 서구식 민주주의 같은 민감한 용어는 아예 거론하지 못하게 해 사회의 다원성을 억제하고, 통치질서의 안정성을 강화해, 개혁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고 개혁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명분이다.이런 해석에 대해, 시진핑이 집권했을 당시 중국 리버럴(중국에서는 우파) 세력이 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 급진적이거나 과격파가 아니었는데도, ‘존재하지도 않는 표적’을 설정해 독재정치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장보수 미국 컬럼비아대 객원교수 등)이 나온다. 신권위주의는 일정 기간의 강권 통치를 거쳐 민주화로 이행한다는 이론이지만, 시진핑 시대 들어서는 민주화 대신 ‘중국 특색을 가진 민주’가 최종 목표로 강조된다. 1972년 유신 당시 박정희 정부가 내세운 ‘한국적 민주’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보편가치와 민주제도를 ‘서구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당의 권력을 강화하고 국내의 비판과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치 모델을 영속화하려는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왕후닝의 역할은 1989년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이후 중국 지도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홍위병의 부활’로 두려워하고, 소련 해체가 중국에서 재현될 것을 우려해 정치개혁의 문을 닫으려 했을 때, 최고 지도부의 이런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념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지식인의 사상적 유능함이 현실 권력을 옹호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성과에 따라 왕후닝의 정치적 지위도 계속 상승했다.국내에서 공산당과 최고 지도자 시진핑의 권력을 극도로 강화한 신권위주의 2.0은 국제적으로는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해 중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가려는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정책과 나란히 추진되었다. 왕후닝이 설계한 일대일로는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 중국 중심 무역·금융 질서 구축, 에너지 공급 안정화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한, 시진핑 시기 중국 대외 전략의 핵심축이다.중국 국유은행들이 3조위안이 넘는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일대일로 참여 국가들의 기간산업 건설 분야에 대규모 자금을 차관 형태로 제공한다. 여기에 중국 기업과 노동력이 대거 진출해, 국내에서 과잉생산 문제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해외에서 광활한 새 시장을 확보하게 한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쳐 대규모 자원을 개발하고 에너지 수송로를 확보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확장해 가는 원대한 전략이다. 미국 중심 세계 질서에 도전해 중국의 ‘천하질서’를 확장시키려는 ‘21세기 신조공체제’라는 평가가 나왔다.2013년부터 추진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현재 중국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대일로 사업을 통해 중국은 3500억달러를 참여 국가들에 차관으로 제공했는데 이중 절반 가량은 고위험 부채로 평가된다. 국내총생산 대비 중국에 대한 부채의 비율이 아프리카 지부티는 80%이고, 이디오피아는 20%, 키르기즈스탄은 40% 정도로 평가된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중국이 이들 국가를 ‘빚의 함정’에 빠뜨려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전략적 요충지를 중국이 장악하는 사실상의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한다. 거액의 부채를 갚지 못해 함반토타 항구를 99년 동안 중국에 내준 스리랑카의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특히 올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위기에 빠진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에 부채 탕감이나 부채 상환 유예를 요청하고 있다. 중국 국내에서는 중국의 막대한 외환보유고가 해외에서 제대로 수익도 내지 못하고 낭비되는 데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코로나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이전처럼 중국의 기업과 노동자가 중동·아프리카까지 진출해 대규모 공사와 사업을 하는 모델은 당분간 불가능해졌다. 논란이 많은 사업을 정리하고 전략적 의미가 큰 국가와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이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국제·무역·금융 질서를 만들어내 중화의 천하질서를 복원하려는 일대일로의 장기적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청 제국이 서구 열강의 침입에 무릎을 꿇은 이후 중국은 서구를 어떻게 배워서 근대화와 부강을 이룰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실험해 왔다. 전통과 서구 과학·기술을 절충하려는 ‘중체서용’을 거쳐 봉건을 타파하고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배우려한 신문화운동, 문화대혁명 시기의 전통 파괴와 공자타도 운동에 이어, 1980년대부터는 서구식 근대화를 따라잡기 하려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제 시진핑 시대 부강해진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다가왔으니, 더 이상 서구식 모델은 필요치 않다고 선언하고 있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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