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를 다시 생각하며

2020. 12. 2. 12:33통일,민족

 
 

입력 : 2020년 11월 14일 (토) 23:29:27
최종편집 : 2020년 11월 15일 (일) 04:24:44 [조회수 : 1905]

 

 

 

얼마 전 조찬 모임을 마치고 시간이 나 삼청공원을 걸었다. 젊은 시절 자주 걷고 사색하고 노래하고 친지들과 담소하며 노닐던 공간이다. 10월말 가을이 깊어가고 산과 공원은 전혀 새로운 풍광을 그리고 있다. 봄사월이 여기저기 핀 꽃들의 노래라면, 유록의 초여름 지나 이제 산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우리에게 전개하고 있다. 이 계절은 색채의 대 향연, 웅혼한 교향학의 울림, 아니면 인상파 화가들의 조용한 원색화들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이 마티스나 피카소의 야수파나 큐비즘의 어떤 것이어도 좋으리라. 떨어지는 낙엽과 발길에 채이는 잎새들에서 인간은 우주의 진리를 터득해 왔다. 이 땅의 대 시인 제망매가의 주인공은 “생사로란 예이샤매... 이에 저에 떠딜 잎다이...”라 읇었고, 서양의 시성 호머(Homer)도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라고 노래했다. 옛 생각에 젖어 길은 걷다가 삼청공원의 한 모퉁에서 두 개의 시비(詩碑)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바로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와 어머니의 백로가(白鷺歌)라 할 수 있는 시비가 그들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1337년(충숙왕 복위 6)출생하여 1392년(공양왕 4)까지 살다간 이 땅의 대표적인 학자, 정치가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으로 불렸고,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 어머니는 이씨(李氏)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이 되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그의 많은 공적 중에 당시 명나라와 불편한 시기에 모두 외교사절을 기피할 때 과감히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큰 공을 세웠고, 1386년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 관철시켰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하고, 국가기강을 정비하여 불필요하게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하며, 의창(義倉)을 재건해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개선하였다.

학문을 좋아해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났고, 후에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같음을 확인되어 그 총명함을 탄복하였다. 그의 스승인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포은 정몽주의 올곧음과 바름은 그의 시대관과 행동에 있다. 우리는 승자중심(勝者中心)의 역사관에 기초한 사관과 인기 위주의 드라마 등에 많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조선 개국과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등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는 포은의 정치, 시대관을 고답적이거나 시대 뒤떨어진 주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로 노래한 조선의 창업은 위화도 회권시 이성계가 제시한 사불가론(四不可論: 以小逆大/夏月發兵/擧國遠征, 倭乘其虛/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등에서 보듯이 사대주의적이며,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며 웅비하는 비전의 부재를 지적할 수 있다. 동시에 선대 고조선과 삼국, 고려 시대의 아름다운 전통들을 되살리는 정책과 철학, 민족의식의 결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역성혁명 등으로 미화하고 창업한 조선은 세종의 위업 등에도 불구하고 200년 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존립이 흔들리고 당쟁과 반상의 갈등, 빈부격차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혁신의 실패로 마침내 일제에 병합되어 사라지게 된다. 특히 조선의 유교 중심의 정치와 제도의 공고화 및 소중화(小中華), 지나친 형식주의, 차별주의 제도와 사상 등은 변혁과 세계의 변화하는 사상 등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강고한 기제(機制)로 작용하며 일반 백성의 아픔을 외면해 왔다.

함석헌 선생이 정신사적으로나 민족정신의 측면에서나 조선시대 일대의 사건으로 가장 평가받아야할 사건으로 사육신 사건을 드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당대의 정치적 성공이나 실패보다 면면히 흐르는 정신과 민족혼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강조한 것은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포은 정몽주의 정신과 충절 그리고 정신사적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포은은 1401년(태종1)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비는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조의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우리민족의 분단과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정치와 경제발전 및 민주화도 일시적 정치세력의 이해득실이나 성패로 보기보다 미래지향적이며 특정 정권의 문제라기보다 민족전체와 전 역사를 통찰하는 접근이 요청된다. 시간적으로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까지 아우르며 공간적으로도 인식과 연구의 폭을 넓혀 포괄적이고 전향적 역사인식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포은과 사육신의 민족혼과 충절의 정신이 다시 조명되며, 민족의 평화 통일의 길을 한걸음씩 나가아는 노력과 역사인식이 지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적 팬데믹과 남북의 경색 국면에 내용과 맥락을 오늘에 접목하여 포은의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와 어머니 ”가마귀 ᄊᆞ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셩ᄂᆡᆫ 가마귀희 빗츨 ᄉᆡ올세라/청강에 죠히 씨슨 몸을 더러일가 ᄒᆞ노라“란 두 편의 시가 새롭게 이해되고 되뇌어지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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