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협약 건

2021. 9. 4. 22:16통일,민족

간도 · 간도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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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협약 무효’로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간도가 단군 이래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지배한 땅이고, 17세기부터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아 있던 것을 19세기 후반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개간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간도를, 강탈한 외교권을 빌미로 일본이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간도’라는 명칭이 근대 이전에 기원한다고 생각한다. 즉, 간도란 고대에 사용되던 ‘터’(神州 · 神鄕을 의미)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간도가 조선 태조의 선조가 다스리던 두만강 북쪽 지역의 ‘알동[斡東]’에서 전화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간도 명칭의 유래를 끌어올릴수록 간도의 범위는 넓어지고 모호하게 된다.그러나 문헌상에 나타나는 간도 용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간도 인식과는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 ‘간도’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0년대이다. 1885년 조 · 청 국경회담을 마치고 조선 측 감계사 이중하(李重夏)가 고종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1877년 종성과 온성 사이 두만강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작은 땅을 주민들이 개간하고 이를 ‘간도(間島)’라고 불렀으며, 그 후 종성, 회령, 무산, 온성 네 읍의 주민들이 점차 두만강 건너편의 개간지를 확대해 나감에 따라 이를 모두 간도라고 불렀다고 한다.초기에는 두만강 맞은편의 개간지를 가리키던 간도 명칭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간도 문제에 개입하면서 그 범위가 남만주 일대로 확대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후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하고, 대러시아 전략과 조선 방어라는 측면에서 간도 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러일전쟁 직전 조 · 청 국경 교섭에 개입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국경 교섭을 미루어줄 것을 요청한 일본은, 1906년 11월 박제순 참정대신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보호를 요청한 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간도 파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열강의 비난 및 청국, 러시아와의 마찰을 회피하기 위해 제1차 러일협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7년 8월에야 용정촌(龍井村)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개설하여 간도 점령의 첫발을 내딛었다.‘통감부간도파출소’에서 조사 · 정리한 문헌에 따르면, 간도는 고려의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복속시킨 땅이자 조선의 이성계가 여진을 정벌하고 복속시킨 땅이다. 정묘호란 때 체결된 강화조약으로 간도는 양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간광지대’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유지되다가 19세기 후반 조선인이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간도의 범위는 두만강 이북 라오예링(老爺嶺)산맥 이남의 남만주 일대라고 한다.이처럼 간도 용어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국경 문제로서 간도 문제가 제기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대한제국)의 간도 인식과 일본의 간도 인식이 달랐다. 조선은 두만강 대안 지역의 조선인 개간지를 간도라고 부른 데 비해 일본은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범위를 간도라고 불렀다.이러한 간도 인식의 차이에 주목할 때, 오늘날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인식이 일본의 간도 인식, 즉 ‘통감부간도파출소’의 간도 인식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근거로 간도협약 무효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의 인식 속에 있는 간도는 통감부간도파출소에서 간도 점령을 위하여 만들어낸 간도의 이미지인 것이다.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국수적인 고토 회복 의식은 간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중국 측의 입장에 반대하면 할수록 만주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와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간도협약’에 이은 조선의 강제병합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이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함에 따라 간도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남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 지배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등장한 독립운동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이처럼 ‘훈춘사건’, ‘청산리전투’, ‘간도참변’과 연관되어 있는 ‘간도출병’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1918년의 ‘시베리아출병’, 1927년의 ‘산동출병’ 등의 용례처럼 단순히 해외로의 군대 파견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제한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미 중국의 영토로 확정된 상태에서 일본 측에서만 사용하고 있던 ‘간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일본 측이 훈춘사건을 조작했고 중국 당국과는 연락이나 사전 교섭 없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점에서 ‘출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적절하다. 중국 측으로서는 ‘일본군의 만주 습격’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만, 한국 측으로서는 ‘만주 독립군 습격’이라는 의미가 담길 수 있고, 또 만주 독립군에 대한 일본군의 일련의 공격이라는 맥락에 놓일 수 있는 용어가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 ‘간도출병’은 1920년 10월에 발생한 ‘훈춘사건(琿春事件)’을 구실로 일본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마적단의 훈춘 습격을 조작하고 마적단 토벌과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조선주둔군 제19사단,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관동군 등 2만여 명의 정규군을 출동시켜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김좌진 · 홍범도 부대의 ‘청산리전투’가 벌어졌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부르는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 그렇다면 간도 용어에 담겨 있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조선인 이주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는 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용어의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용어 자체를 폐기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단지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간도 용어의 역사, 19세기 후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간도 인식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간도 영유권 문제에 가려진 간도 조선인(‘조선족’)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면 간도 용어는 새로운 관계 속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시야에서 간도 조선인 문제는 간도 귀속 문제에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간도 조선인은 회유나 통제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그렇지만 간도, 더 넓게는 만주에 스며 있는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의 이주와 정착, 지배와 갈등의 역사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면 간도의 역사는 일국사의 시야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 또한 조 · 청 국경회담이 벌어지던 1880년대에 간도 명칭이 출현했지만 간도 귀속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국경회담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것은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토문’이 두만강(중국 측 명칭은 ‘圖們江’)과 동일한 강인가 아닌가라는 점이었다. 즉, 두만강의 국경선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토문’의 해석이 쟁점이 되었던 것이지 간도 귀속을 결정하기 위하여 ‘토문’의 해석을 두고 대립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청과 일본은 처음부터 간도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으며, 약 2년에 걸친 교섭의 결과 일본은 간도 영유권을 청에게 양보하고 그 대신 만주의 이권을 차지했다.
  • 1909년 ‘간도협약’ 당시 당사국이었던 중국과 일본은 간도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위하여 간도 문제를 날조했다고 생각하는 중국은 간도 명칭을 거부하고 간도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반면 간도 문제를 조선 점령과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생각한 일본은 간도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간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이러한 대립은 간도 귀속 문제를 결정하는 조약 명칭에도 반영되어, 중국 측의 조약 명칭은 「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이며, 일본 측의 조약 명칭은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日淸協約)」이다. ‘간도협약’으로 간도의 영유권은 중국에 귀속되었지만 중국은 일본의 영토 침략에 맞서 영토 주권을 수호했다는 생각이었고, 일본은 자신의 영토인 간도를 중국에게 넘겨주었다는 생각이었다.
  • 러일전쟁 이후 간도 점령을 획책하고 있던 일본은 간도의 영역을 남만주 일대로 상정하고 간도가 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1906년에 간행된 『만주지지(滿洲地誌)』에서는 하이란장(海蘭河) 이남, 두만강 이북의 땅을 간도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간도를 한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으로 소개했으며,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대륙 낭인들의 견해가 신문에 자주 실리곤 했다. 또한 통감부와 일진회는 간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간도의 범위를 하이란장 너머 지린(吉林) 지방까지 확대시켰다.
  • 1930년대에 간행된 윤정희(尹政熙)의 『간도개척사』에도 간도 명칭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간도개척사』에 따르면, 1880년 회령부사 홍남주(洪南周)가 대기근의 구제책으로 두만강 맞은편의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이를 ‘간도’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 처음 개간한 땅은 회령 서쪽 25리 되는 평야 100여 정보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 개간지가 확대되어 길이 500리, 폭 40∼50리에 달했다고 한다.
  • 17세기에 ‘간광지대(間曠地帶, 중립지대 또는 무주지)’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산하이관(山海關) 이동의 봉금지대 전체를 간도라고 하거나,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土門江)이 쑹화장(松花江)의 지류라는 주장을 근거로 쑹화장에서 헤이룽장(黑龍江, 러시아 측에서는 아무르강이라 부른다)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아래쪽을 간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간도(間島)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 ⓒ Joowwww/wikipedia | Public Domain
  • 그러나 ‘동북공정’으로 알려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4년 여름,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카드로 ‘간도 되찾기’가 제기되면서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고토라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2004년 7월에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발족하고, 9월에 국회의원 59명이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을 발의했으며, 온라인 공간에서도 간도 되찾기와 간도협약 무효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해방 이후 최초로 간도 문제가 대중적 이슈로 떠올랐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갑작스런 도발에 분노한 국민들에게, 만주와 연해주를 포괄하는 저 넓은 간도가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라는 소식은 중국의 역사 왜곡을 일거에 뒤집는 후련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 ‘간도(間島)’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자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고토(故土)라는 이미지이거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던 독립운동의 근거지라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교과서를 배우면서 흘려들었던 어슴푸레한 기억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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