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대통령, DJ가 만든다”에 “동의합니다”?

2006. 10. 19. 21:40정치와 사회

“다음 대통령, DJ가 만든다”에 “동의합니다”?
DJ 강연·인터뷰 등 잇따른 호남행, 그 뒤 쫓는 ‘용’들의 ‘Go West’
입력 :2006-10-19 14:36:00   이기호 (actsky@dailyseop.com)기자
▲ 지난 11일 전남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내년 대선 구도에서 그의 역할론이 한층 힘을 받고 있다. ⓒ뉴시스 
차기대권의 캐스팅보트는 호남이 쥐고 있는가. 호남과는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할 것 같았던 한나라당의 서진정책이 노골화되고 있는 가운데 차기집권을 향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범주내에서 현정부와의 적정한 관계를 설정한 금도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북핵 파문이 이어지며 햇볕정책이 도마에 오르게 되고 대선이 점점 다가오면서 호남표를 의식한 제 정치세력의 행보가 이어지면서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권의 한축으로서 전직대통령을 넘어서는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게 됐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핵 문제가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김 전대통령의 입장에서 평생의 숙원인 통일문제와 영호남 화합, 두 화두를 주체적으로 풀어나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해진 쪽은 그동안 호남에 공을 들여온 한나라당. 최근 들어 한나라당의 ‘빅3’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나란히 ‘광주의 어른’ 고 홍남순 변호사의 빈소를 찾았으며 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맹공을 펼쳤던 DJ정부-참여정부의 ‘햇볕포용정책’을 며칠 사이 ‘성공한 햇볕정책’과 ‘실패한 포용정책’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DJ, 나아가 호남을 의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호남이 호락호락 한나라당의 구애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DJ의 호남 내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한나라당은 끊임없는 친 DJ 제스처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정치개입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을 전후로 DJ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여권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은 긴장한 모습을 보인다.

주목해야할 점은 여권의 움직임에 일정한 패턴이 엿보인다는 것.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당의장이 독일에서 귀국한데 이어 2년여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추미애 전 민주당 의원이 정치 재개 의사를 밝혔다. 정대철 우리당 상임고문은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통합신당’을 제의했고, 김근태 우리당 의장도 민주개혁세력대연합을 언급하고 있다.

“Go west!” 한나라당 “햇볕정책과 포용정책 다르다”

‘Go west’는 말 그대로 ‘서쪽으로 가다’는 뜻이다. 한나라당의 서진정책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04년 8월말 연찬회 후 한나라당은 찬반 논란 끝에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대부분 점퍼차림으로 참배해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건’이었다. ‘당대표 박근혜’는 2004년 이후 5·18 행사에 참석해왔으며 올해에는 광주 거리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수호를 위한 ‘구국투쟁’을 벌이던 지난해 10월에도 박 전 대표는 “4·19 정신도 광주 5·18도 함께 안고가야 할 소중한 역사”라며 ‘만경대정신’과 차이를 뒀다. 그리고 올해 10월에는 드디어 광주 인권운동의 상징인 고 홍남순 변호사의 빈소를 방문했다.

▲ 지난 17일 고 홍남순 변호사의 장례식에 함께 참석한 손학규 전 지사(왼쪽)와 이명박 전 시장 ⓒ뉴시스 

5·18 국립묘지와의 인연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 전 시장과 손 전 지사도 나란히 빈소를 찾았다. 이 전 시장이 ‘5·18 국립묘지에서의 파안대소’로 비난 받았던데 반해 손 전 지사는 지난 1993년 민자당 의원으로는 처음 5·18 국립묘지와 광주민주항쟁기념식을 찾은 이래 해마다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으며 민심대장정을 벌이던 지난달 29일에도 5·18 국립묘지를 찾은 바 있다.

동격이던 ‘햇볕-포용정책’도 며칠 만에 격이 달라졌다. “햇볕은 핵무기를 키웠다”(전여옥 최고위원), “햇볕정책의 무원칙한 대북퍼주기”(나경원 대변인)에서 “참여정부의 포용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까지 망쳐 놨다”(강재섭 대표)로 1주일 사이에 돌변했다.

한나라당은 ‘관전자 DJ’를 원하지만…

한나라당과 소속 대권후보들의 호남구애는 사실상 DJ에 대한 짝사랑에 다르지 않다. 특히 ‘독재자의 딸’이라는 남다른 성장배경을 가진 박 전 대표는 재임 27개월 동안 호남을 17차례 방문했고, DJ의 생가를 찾았을 뿐 아니라 DJ를 만나 부친의 과오를 사과하기도 했다. 이들의 친DJ 제스처에는 DJ가 계속 ‘관전자’로 남아주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동서연합’ 즉 영호남연대의 선점을 승리의 관건으로 보는 시각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영남과 보수층만으로는 승리가 쉽지 않은 한나라당은 ‘한민공조’ 등을 외치며 필승카드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동서화합의 상징으로 ‘DJ-박근혜’ 연대설이 꼬리를 물고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가능성은 현재 희박해보이지만 성사만 된다면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간, 영남과 호남간의 연대라는 최상의 카피가 붙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문이 진정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정계개편과 관련된 구체적인 일정이 공공연히 나오는 시점에서 DJ의 역할이 자연스레 부각되고 있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온 김 전 대통령도 때마침 9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것(분당)에 여당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며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가 본격화되고 정리가 필요한 시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결국 비극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분당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당연히 합당을 포함한 정계개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 DJ의 발언에 대해 대다수 매체들은 ‘전통 지지세력의 복원에 대한 소신’으로 해석했다.

▲ 대권주자들의 호남행은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힘을 얻어보자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뉴시스 
보수층의 무차별 공세에 다시 나선 DJ

‘분당이 비극의 시작’으로 정치재개를 알린 김 전 대통령은 이후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의 비난에 본격적으로 맞섰다. 지난 10일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혹평’을 들었던 그는 다음날 광주 전남대 강연에서 “만만한 것이 햇볕정책이냐”며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의 통화까지 공개했다. “내가 ‘왜 포용정책이 죄가 있느냐, 포용정책이 긴장을 완화시켰으면 시켰지 악화시킨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말했더니 대통령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세력의 무차별 공세를 겪으면서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정치적 영향력 확보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정치적 영향력의 확보는 차기정권 창출을 전제로 한다. 햇볕포용정책을 지키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국지전 감수’ ‘검색에 불응하는 북한 상선에 대한 발포’ ‘평화를 위한다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등을 외치는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한다.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고, 한나라당은 ‘원론적 표현’이라며 공식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Go west’에는 ‘서쪽으로 가다’는 뜻 이외에도 ‘죽다’ ‘떨어지다’는 속어적 의미를 갖는다. 차기 정권창출을 위해 ‘DJ-박근혜’ 조합까지 고려했던 한나라당이었지만 햇볕정책에 대한 무차별 공세는 역설적으로 DJ 정치복귀의 이유만 제공했다. 한나라당은 뒤늦게 ‘햇볕’과 ‘포용’을 구별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나누며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민주, 허물 서로 사과 후 합당’ 방식 제안

전통지지층의 복원이 필요한 시점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당의장과 추미애 민주당 전 의원이 악수하는 사진이 전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의 1등 공신이면서 끝까지 민주당을 지켰던 추 전 의원은 우리당과 민주당을 연결시킬 적역으로 꼽힌다. 대구출신의 추 전 의원이 나서는 정계개편은 ‘호남세력 재결집’이라는 지역주의 비판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 민주당 지킴이의 이미지가 강했던 추미애 전 의원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만남은 범여권의 정계개편에 또 하나의 재료로 인식되고 있다. ⓒ뉴시스 

이런 시점에서 DJ의 ‘정치적 양녀’로 불리는 추 전 의원이 밝힌 “용광로에 뛰어들 각오”는 눈길을 모은다. ‘어려운 상황인데 힘을 보태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한 말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라며 “당근”이라고 말했고, 추 전 의원의 법무법인 아주 대표변호사 취임식에 참석했던 정 전 의장도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늘 승리했다”며 “오누이 같은 애틋함”을 강조했다.

사실 그동안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개별적으로 방문한 주요 인사들에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주문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열린우리당이 분당과 대북송금특검에 대해 사과하고, 민주당이 노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사과한 후에 합치는 방식까지 제안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분당, 특검, 탄핵의 과정에 있었던 노 대통령의 입장에선 하기 힘든 역할이다.

뉴스위크지와의 인터뷰, 전남대 강연을 통해 햇볕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했던 김 전 대통령은 오는 19일 서울대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오는 28일경에는 퇴임 이후 처음으로 고향인 목포를 찾는다. 재임 시절 ‘지역감정 해소’를 이유로 ‘서해안 고속도로 무안-목포 구간 개통식’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고향을 향하는 전직대통령. 정치권이 술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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