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에 반사되는 프라하의 봄

2008. 2. 27. 13:29정치와 사회

유리에 반사되는 프라하의 봄
[매거진 Esc] 21세기 건축기행 2
댄싱빌딩과 프라하 안델에서 현대의 얼굴을 만나다
한겨레
» 밤의 프라하 안델. 천사 모습의 그래픽이 사라지고 화려한 조명이 켜진다.
체코의 체제 전환 이후 상점들과 중소기업은 사유화됐다. 곧이어 노동력과 기술적 인프라가 양호한 수도권 지역으로 투자가 집중됐다. 전체 외국인 투자의 49%가 프라하에 몰린 현실이다. 프라하 중심가에서 신규 건축이 허용되는 땅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 고전적으로 고정된 얼굴에 번쩍이는 현대의 얼굴을 첨가하고 싶은 거대 투자자들은 속이 탄다. 어느날 프라하 시내에 꽝꽝 푯말이 나붙는다. ‘개발 허용’. 그 자리에 프라하 현대의 얼굴들이 있다.

» 프라하 거리는 전통과 현대가 교차한다. 기념품 가게의 유리판에 고전적인 건물이 투영된다.
미군 포탄구덩이에 ‘새 이빨’을 헌정

덜컹거리는 전차의 창 너머, 멀리 이어진 좁은 골목길 끝에 낯익은 옷자락이 보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노래에 맞춰, 길모퉁이에 숨은 소녀가 미처 숨기지 못한 치맛자락처럼, 골목 끝에 삐져나온 유리로 퀼트된 치맛자락은 언젠가 패션쇼에서 본 미래주의 디자이너의 드레스 같다. 블타바 강변의 교차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7층짜리 주변 건물을 거느린 듯 선 건물은 그렇게 멀리서부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크 게리와 블라디미르 밀루닉이 함께 완성시킨 유명한 내셔널 네덜란덴 빌딩(1996)이다. 누구는 ‘댄싱빌딩’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프레드 앤 진저빌딩’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이런 건물이 프라하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원래 이 땅은 1945년 미군 폭탄이 떨어진 뒤, 비어 있었다. 건물주인 인터내셔널 네덜란드 그룹의 폴 콕은 텅 빈 이 땅을 ‘이빨 빠진 곳’이라 불렀다 한다. 유년시절을 프라하에서 보낸 그는 이 도시에 무언가 바치고 싶었고, 바로 이곳에 ‘새 이빨’을 끼워넣기로 한다.

» 국립박물관 앞에서 바라본 바츨라프 광장의 모습. 길이 750m, 폭 60m의 대로로서 바츨라프 광장 끝에서 이어지는 무스테크 광장에서부터 서울의 명동거리에 비할 만한 쇼핑 거리가 시작된다.
그의 꿈은 1968년 소련 침공으로 지연됐지만, 8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자유를 찾게 되고, 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그때서야 속도를 내게 되는데, 거기에는 하벨 대통령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보수적이고 재정도 부족했던 도시 프라하에 이런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자본가 폴 콕과 권력가 하벨 대통령의 대담한 결정이 바탕을 이뤘던 덕분이다. 거기에 열성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영리하게 대응한 밀루닉의 탁월한 집행 능력도 큰몫을 했다.


하지만 댄싱빌딩 들머리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다. 기둥 아래서 서성였지만 유리 표피와 휘어진 기둥을 만져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감격할 지경이다. 투명 유리와 극소화된 접합체들은 안쪽의 휘어진 기둥들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크리놀린 스커트(받침대를 넣어 부풀린 스커트)의 페티코트(속치마)처럼, 여인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벽면은 이 지방 건축가들이 애용하는 치장벽토(스터코)로 마감했다. 기존의 맥락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90년대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93년을 전후로 컴퓨터 기술은 전자혁명을 시작했고, 프라하에서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됐다. 테크놀로지 분야에서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댄싱빌딩의 구조를 가능케 했다면, 댄싱빌딩의 도시맥락적 파격은 댄싱빌딩이 체코 독립을 기념하는 기념비적인 조각상으로 기능하게 했다.

» 댄싱빌딩. 빌딩이 춤을 추는 듯하다. 무려 1300만마르크의 공사비가 든 댄싱빌딩. 프랑크 게리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이 건물을 동시에 작업했다.
후기 고딕에서 바로크와 아르누보, 그리고 큐비즘 돌풍까지 건축적 이벤트들로 가득 찬 프라하에서, 댄싱빌딩은 마치 큐비즘 이후 달리 내세울 것 없었던 건축적 부재의 빈틈을 메우려는 듯 프라하의 인상을 특징짓는 강력한 장소성을 만들어낸다. 일명 프레드 앤 진저, 할리우드의 유명 댄서들이 블타바 강변에서 춤을 춘다. 융은 ‘예술은 시대정신에 가장 결여된 형상을 출현시킨다’고 했다.

꽁꽁 언 발을 녹이려, 사실은 핑크빛이 예뻐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는 블타바강을 건너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스미호프를 향하는 좁고 어두운 길을 삐거덕거리며 천천히 달린다. 스미호프는 오래도록 노동자 구역이었다. 스타로프라멘 맥주공장 등 큰 공장들이 몰렸고, 지금도 프라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다. 전차는 길게 이어진 슬레이트 지붕과 우중충한 사회주의 시절의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좁고 인적 없는 길을 달린다.

» 댄싱빌딩. 빌딩이 춤을 추는 듯하다. 무려 1300만마르크의 공사비가 든 댄싱빌딩. 프랑크 게리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이 건물을 동시에 작업했다.
장 누벨이 구현한 따뜻한 하이테크

얼마쯤 갔을까. 전차는 20년대부터 스미호프의 새로운 중심지로 형성되기 시작한 안델거리에 정차했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다, 위에서 나를 굽어보는 거구의 검은 남자를 만났다.

프라하 안델. ‘프라하의 천사’라는 뜻으로 2000년 장 누벨이 만든 사무·쇼핑용 복합건물이다. 장 누벨은 부드러운 물결 모양의 유리 벽면에 그래픽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나와 마주친 거구의 남자는 바로 이 거리에서 촬영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장면이다. 그래픽 이미지는 건물의 방위와 빛에 따라 달라진다. 유리면들은 채광 시스템으로 빛을 차단하고, 불투명한 면들에는 천사에 관한 글귀나 광고문구가 적혀 있다.

» 댄싱빌딩. 빌딩이 춤을 추는 듯하다. 무려 1300만마르크의 공사비가 든 댄싱빌딩. 프랑크 게리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이 건물을 동시에 작업했다.
장 누벨이 구현하는 하이테크의 기계미학과 현대적 이미지의 차용은 회화적이고 때로는 시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의 하이테크는 따뜻하고 감정적이며, 무겁지 않다. 신비감을 창출하는 강렬한 이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건축은 ‘공간을 구성하는 기술’일 뿐 아니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업’이라는 그의 말이 건물에 드러난다. 건물은 고정돼 있으나 장소와 연관된 기억을 전하기 위해 사건들로 변화하는 풍경을 만든다. 천사는 유리에 반사되는 거리의 모습들과 융합된다. 하루에 수천 명이 지나는 이 길속에 있다.

천사는, 카프카 같다. 베를린에서 온 천사가 아니라 프라하의 천사 카프카 같다. 혹은 프라하가 낳은 수많은 음악가들과 예술가들, 작가들 같다. 그들이 하나의 실루엣을 이루며 거리를 굽어보고, 지금의 사람들 속으로 성큼 걸어 나오는 것 같다. 장 누벨은 단순한 장소성의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프라하의 ‘벨 에포크’에 대한 향수적인 은유로서 그를 데려다 놓은 것만 같았다.

프라하=글·사진 류혜숙/ 자유기고가

» 프라하의 전차. 프라하의 전통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중세도시의 정체성은 숨었네

온갖 종류의 건축양식이 뒤섞인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 신시가지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바츨라프 광장. 신시가지라고 하나 14세기에 조성된 이곳은 20세기 초까지 말 시장, 이후 피와 화염의 광장, 그리고 지금은 무스테크 일대와 연결된 프라하 최대의 쇼핑 거리를 형성한다. 유서 깊은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 은행, 사무실들이 들어선 양쪽의 건물들은 첨탑이나 돔 혹은 직선의 지붕선들로 하늘을 불규칙하게 재단하면서 온갖 종류의 양식이 뒤섞여 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자의 사무실처럼 딱딱한 건물에 사선 장식을 넣어 멋을 낸다든지, 고전적인 벽면을 넝쿨 담쟁이 같은 부드러운 아르누보의 문양으로 장식한다든지, 혹은 유리 입면에 삼각·원형·사각의 기하학적 형상을 새겨넣어 원래 구조물의 정체성을 감추어 버린다든지, 혹은 전체를 유리로 단순히 뒤덮는 식이다. 걷기 좋은 도시이자 동화 같은 천년 고도의 중세 도시 프라하가 보여주는 공간과 시간의 문맥 속에 현대의 수사학적 장치들을 슬쩍 끼워넣는 것이다.

관광 중심지로 집중 부각된 프라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부동의 프리미엄 속에서 서비스 부문의 필요와 중요성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변화임과 동시에 프라하 시 스스로의 자각이었을 것이다. 중심가가 지닌 고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요구에 부응할 방법으로 그들이 택한 것, 그것은 기존의 풍경을 모두 받아들이는 유리와 비교적 쉽게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데커레이션이 아니었을까.

» 프라하 지도
프라하 여행쪽지

빌딩 최고층엔 프랑스 식당

⊙댄싱빌딩은 지하철 카를로보 나메스티(Karlovo Namesti)역에 내려 블타바 강변 쪽으로 가면 찾을 수 있다. 빌딩 최고층에 최고급 프랑스 식당인 라 페를 드 프라그(La Perle de Pregue)가 있다. 월요일에는 저녁 7시부터 10시 반까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낮 12시부터 2시, 그리고 저녁 7시부터 10시 반까지 식사 시간에만 문을 연다.

⊙안델은 지하철 비(B)선 안델(Andel)역에서 내리거나 전차 12번을 타면 된다. 주변에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쇼핑센터, 그리고 안델 호텔이나 이비스(IBIS) 등의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변두리의 작은 중심으로 부상 중이다. 주민들에게는 활력의 요소로, 여행자들에게는 새로운 숙소 지역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