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 사건은 날조
2008. 8. 31. 02:30ㆍ정치와 사회
-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 사건은 날조
“그는 미국을 배신한 남자를 유혹하는 한국 여성이었다” 한 남한 사교계 인사가 미국 헌병 대령을 매료시켜 비밀정보를 입수한 후 다른 연인인 북한 최고 공산당원에게 이를 넘겨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 말, 북한이 공포에 사로잡힌 도시인 서울에 도달하자 김수임은 “고약한 국제 간첩”이란 명칭 하에 국군에 의해 사형 당했다. 그후 그의 행위는 치욕으로 남았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반공 열풍으로 한 TV 드라마에서 시청자에게 김수임의 ‘여성적 책략'이 북한 공산당의 ‘가장 치명적 무기'라고 밝혔다. 사회자 로날드 리갠이 진행한 TV 프로그램에서는 김수임을 ‘동양의 마타하리’ 라고 묘사했다. 코로넷 잡지는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이라는 주요 기사로 광대한 소비에트의 동양 여왕 ‘작전상 성관계' 라며 비방했다.
김수임과 그의 삼각관계는 격동의 과거사에 한 켠으로 묻혀져 사라졌다. 그러나 냉전의 오랜 겨울 동안 동면에 취해있던 “기밀” 이라고 낙인된 미국 군사 자료를 통해 진실은 살아남았다. 그를 되살리기에는 반년이나 늦어버린 지금에서야 진실이 밝혀졌다.
1950년 미 육군 정보국 기밀자료와 기밀제한 해제 자료 기록은 전혀 다른 김수임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 E.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접근권한이 없었고 김수임이 북측에 넘겨줄만한 기밀도 없었으며, 나중에 북한에서 사형이 집행된 김수임의 애인 이강국도 사실상 미 CIA(중앙정보국) 요원이었을 수 있다.
현재 자료를 종합해 봤을 때 간첩 논거는 그냥 단순 음모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기록은 “대령이 김수임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베어드 대령은 더 이상의 난처함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운명에 맡겨졌고 결국 남한 경찰의 고문에 의해 그가 하지도 않은 일도 허위자백했던 것으로 미군 당국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전했다.
역사가들은 서울 정권이 1950년에 10만명도 넘는 좌파와 지지자들을 비밀리에 사형시켰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 미국인 위한 김수임의 죽음은 살아있는 깊은 사적인 이야기로만 남았다.
김원일은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의 아들로 어머니에 대한 근거 없는 신화를 묻어버리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그는 “김수임은 역사적 혼란의 격류에 휘말려 익사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진 강한 여자다"고 말했다.
아들 김원일은 처음으로 미국 기밀문서의 비밀 제한 해제 자료를 찾아낸 미국 캘리포니아의 라세이라 대학의 신학 교수다. 그는 김수임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조명화 서울 영화 감독이 자기 편임을 알아냈다.
조명화 감독은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을 배신했다”며 “김수임을 위해 증언해 줄 수 있었지만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 버렸다"고 말했다.
상냥한 신학자(59)와 베테랑 영화 제작자(63)은 “1930년과 1940년에 교육받은 젊은 한국인은 일본 식민 통치가 사라진 뒤 좌파가 주름잡은 혼란스러운 나라를 개혁하는데 특혜를 받은 대상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존 R. 호지가 제 2차 세계대전때 남한의 책임자로서 공산당 진압을 약속했다.
1911년 출생한 김수임은 교육받은 엘리트였다. 고아로 미국 선교사에게 양육되었으며 한국의 명성 높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1936년 여성 행정관으로 서울 잡지에 해방된 젊은 여성의 새로운 세대로 기사에 실렸다. 똑똑하고 유행감각이 뛰어나며 세련된 정계 친구들이 있는 김수임은 독일 유학파이자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던 연상의 유부남인 이강국을 만났다.
김수임은 이강국을 사랑했고 이강국은 일본의 패배 후 정치적으로 부각됐다.그러나 미국의 통제 아래 들어 간지 1년 안에 그는 보안 위험 용의자로 체포돼 북한으로 다시 보내졌다.
김수임의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 기업에서 필요한 존재가 됐다. 미국 기밀문서 비밀 제한 해제 자료에 기록된 한국인과 미국인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56)의 비서로 고용됐고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의 집을 얻어주었으며 가끔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미 점령군이 철수 했을 당시 베어드는 한국 경찰을 지원하는 직위로 바뀌었고 그의 미국인 아내가 한국에서 베어드와 함께 살았다.
1950년 3월 1일 김수임은 더 이상 미국을 위해 일하지 않게 되었고 남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잡아들인 수 천명의 좌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14일 베어드가 한국을 떠난 9일 후 김수임은 한국 군사법정의 5명의 재판관을 마주했으며 공산당 동지에게 팔거나 빌려준 대령의 차를 소유한 것과 1946년 미군 부대 트럭으로 이강국을 북한 국경으로 운전해준 사실 등을 포함,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혐의로 그가 기밀로 분류된 1949년의 미군 철수 계획을 베어드로부터 빼네어 북한 공산당에서 넘길려고 했다고 기소됐다.
SEOUL, South Korea (CNN)/ 장보배 (JOINS)
1950년 6월 말, 북한이 공포에 사로잡힌 도시인 서울에 도달하자 김수임은 “고약한 국제 간첩”이란 명칭 하에 국군에 의해 사형 당했다. 그후 그의 행위는 치욕으로 남았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반공 열풍으로 한 TV 드라마에서 시청자에게 김수임의 ‘여성적 책략'이 북한 공산당의 ‘가장 치명적 무기'라고 밝혔다. 사회자 로날드 리갠이 진행한 TV 프로그램에서는 김수임을 ‘동양의 마타하리’ 라고 묘사했다. 코로넷 잡지는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이라는 주요 기사로 광대한 소비에트의 동양 여왕 ‘작전상 성관계' 라며 비방했다.
김수임과 그의 삼각관계는 격동의 과거사에 한 켠으로 묻혀져 사라졌다. 그러나 냉전의 오랜 겨울 동안 동면에 취해있던 “기밀” 이라고 낙인된 미국 군사 자료를 통해 진실은 살아남았다. 그를 되살리기에는 반년이나 늦어버린 지금에서야 진실이 밝혀졌다.
1950년 미 육군 정보국 기밀자료와 기밀제한 해제 자료 기록은 전혀 다른 김수임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 E.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접근권한이 없었고 김수임이 북측에 넘겨줄만한 기밀도 없었으며, 나중에 북한에서 사형이 집행된 김수임의 애인 이강국도 사실상 미 CIA(중앙정보국) 요원이었을 수 있다.
현재 자료를 종합해 봤을 때 간첩 논거는 그냥 단순 음모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기록은 “대령이 김수임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베어드 대령은 더 이상의 난처함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운명에 맡겨졌고 결국 남한 경찰의 고문에 의해 그가 하지도 않은 일도 허위자백했던 것으로 미군 당국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전했다.
역사가들은 서울 정권이 1950년에 10만명도 넘는 좌파와 지지자들을 비밀리에 사형시켰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 미국인 위한 김수임의 죽음은 살아있는 깊은 사적인 이야기로만 남았다.
김원일은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의 아들로 어머니에 대한 근거 없는 신화를 묻어버리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그는 “김수임은 역사적 혼란의 격류에 휘말려 익사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진 강한 여자다"고 말했다.
아들 김원일은 처음으로 미국 기밀문서의 비밀 제한 해제 자료를 찾아낸 미국 캘리포니아의 라세이라 대학의 신학 교수다. 그는 김수임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조명화 서울 영화 감독이 자기 편임을 알아냈다.
조명화 감독은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을 배신했다”며 “김수임을 위해 증언해 줄 수 있었지만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 버렸다"고 말했다.
상냥한 신학자(59)와 베테랑 영화 제작자(63)은 “1930년과 1940년에 교육받은 젊은 한국인은 일본 식민 통치가 사라진 뒤 좌파가 주름잡은 혼란스러운 나라를 개혁하는데 특혜를 받은 대상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존 R. 호지가 제 2차 세계대전때 남한의 책임자로서 공산당 진압을 약속했다.
1911년 출생한 김수임은 교육받은 엘리트였다. 고아로 미국 선교사에게 양육되었으며 한국의 명성 높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1936년 여성 행정관으로 서울 잡지에 해방된 젊은 여성의 새로운 세대로 기사에 실렸다. 똑똑하고 유행감각이 뛰어나며 세련된 정계 친구들이 있는 김수임은 독일 유학파이자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던 연상의 유부남인 이강국을 만났다.
김수임은 이강국을 사랑했고 이강국은 일본의 패배 후 정치적으로 부각됐다.그러나 미국의 통제 아래 들어 간지 1년 안에 그는 보안 위험 용의자로 체포돼 북한으로 다시 보내졌다.
김수임의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 기업에서 필요한 존재가 됐다. 미국 기밀문서 비밀 제한 해제 자료에 기록된 한국인과 미국인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56)의 비서로 고용됐고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의 집을 얻어주었으며 가끔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 미 점령군이 철수 했을 당시 베어드는 한국 경찰을 지원하는 직위로 바뀌었고 그의 미국인 아내가 한국에서 베어드와 함께 살았다.
1950년 3월 1일 김수임은 더 이상 미국을 위해 일하지 않게 되었고 남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잡아들인 수 천명의 좌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14일 베어드가 한국을 떠난 9일 후 김수임은 한국 군사법정의 5명의 재판관을 마주했으며 공산당 동지에게 팔거나 빌려준 대령의 차를 소유한 것과 1946년 미군 부대 트럭으로 이강국을 북한 국경으로 운전해준 사실 등을 포함,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혐의로 그가 기밀로 분류된 1949년의 미군 철수 계획을 베어드로부터 빼네어 북한 공산당에서 넘길려고 했다고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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