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산 자작나무, 하얀 알몸이 처연한…‘北國의 겨울 悲歌’

2008. 11. 27. 22:03건강과 여행

하얀 알몸이 처연한…‘北國의 겨울 悲歌’
강원 인제 응봉산의 자작나무숲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응봉산 임도에 올라 내려다본 자작나무 숲. 이곳에는 서울 여의도 크기의 두 배나 되는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는 일찌감치 깊은 겨울이 당도해있습니다. 활엽수들은 다 나뭇잎을 떨궜고 가장 늦게 잎을 내려놓는다는 낙엽송마저도 양지 바른 쪽에 있는 것들만 겨우 가지 끝에 노란 잎을 달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날카로운 펜화의 날렵한 선처럼 서있는 겨울 숲은 참으로 적막하고 또 황량합니다.

하지만 자작나무 숲만큼은 다릅니다. 자작나무는 겨울에 더 빛이 납니다. 겨울이 돼서 잎을 다 떨군 후에야 눈부시게 하얀 알몸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자작나무의 하얀 알몸은 눈부시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합니다. 이국적인 정취는 멀고 먼 북유럽 설원의 땅을 떠올리게 한답니다.

그 자작나무를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자작나무는 춥고, 높은 곳에서 삽니다. 간혹 남쪽에서 흰 둥치를 가진 거제수나무(물자작나무)나 사스레나무, 혹은 은사시나무를 자작나무로 착각하곤 합니다만, 순백의 진짜 자작나무는 강원 태백이나 정선, 혹은 진부령을 넘어가는 깊은 산중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강원도 일대를 뒤지며 수소문한 끝에 믿을 수 없는 규모의 자작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강원 인제군 남면 수산리. 소양호 한쪽 자락을 따라 찾아들어간 산속 마을에서 엄청난 규모의 자작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누구는 응봉산이라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매봉이라고 부르는 산 사면을 따라 자작나무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전체 2000㏊의 조림지 가운데 자작나무가 심어진 땅이 600㏊(6㎢·181만5000여평)라고 했습니다. 어림해보자면 서울 여의도 면적(2.95㎢)의 두배쯤 되는 넓이지요. 적게 잡아서 1㏊당 1500그루씩만 계산한다 해도, 이 일대에만 90만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는 셈입니다.

산골마을의 계곡에는 쩡쩡 얼음이 잡혀가고 있고, 계곡을 끼고 선 산촌마을 집의 낮은 처마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그 마을을 지나 응봉산을 구불구불 넘어가는 임도 위에 올랐습니다. 해발 600m쯤을 오르내리는 그 길에서 내려다 본 자작나무 숲은 장관이었습니다. 때마침 첫 눈이 화르르 날리는 때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마주친 자작나무 숲은 ‘동화속의 겨울나라’와 같았고, 먼 곳의 숲은 마치 잘 발라낸 흰 뼈들을 늘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수산리를 찾아가거든 굳이 임도를 다 오르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마을 안쪽으로 거미줄처럼 나 있는 길을 따라 어디로 들든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있기 때문입니다. 꼭 자작나무가 아니라도 볕 한줌 들지않는 산골마을의 작은 집들이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지 싶었습니다. 겨울 산길을 터덜터덜 걷는 것도 좋겠고, 춥다면 훈훈한 차 안에서 나른한 재즈음악을 틀어놓고 느릿느릿 달려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겨울의 산촌풍경이란 쓸쓸하기도 하고 또 황량하기도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정면에서 만나는 겨울’의 모습이란 딱 그런 것이지요.

홍천·인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8-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