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2009. 4. 28. 18:09자연과 과학

아이작 뉴턴


“만약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편지에 이런 글을 썼던 사람 자신도 과학의 거인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편지를 쓰던 당시에 이미 거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작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 날 영국 링컨셔의 울스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세 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가 목사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뉴턴이 열 살 되던 해 의붓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뉴턴의 이복 형제 셋을 데리고 울스롭으로 돌아왔다. 뉴턴은 의붓 아버지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훗날 그는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적으면서 “새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들과 집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들이 농부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농장으로 불러 허드렛일을 시킬 정도로 교육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뉴턴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1661년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뉴턴이 공부하는 것을 여전히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했음에도 어머니는 아들의 학비를 아까워 했다. 그래서 뉴턴은 학교의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근로 학생 자격으로 공부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 전국적으로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문을 닫았다. 뉴턴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이 이번에는 어머니도 아들에게 굳이 농장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뉴턴이 고향에서 생활한 1665년과 1666년을 사람들은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 두 해는 뉴턴의 창조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때였다. 훗날 뉴턴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 중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싹텄다.


 

 

사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1666년 과수원의 사과나무 아래서 졸고 있던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졌다. 잠에서 깬 뉴턴은 사과가 왜 아래로 똑바로 떨어지는 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데에는 어떤 힘, 즉 중력이 작용하며 그 힘은 행성을 포함해 우주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화는 정말로 사실일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말년에 뉴턴 자신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적어도 네 번은 주장했다.

 

‘기적의 해’는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고작’ 중력 따위의 문제로 과부하가 걸리기에는 너무도 뛰어났다. 그는 이 시기에 스물 두 개나 되는 문제들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유율법이라고 부른 계산법 즉 오늘날의 미적분도 만들어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빛의 성질도 연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빛은 흰색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빛이 원래는 여러 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프리즘을 써서 증명했다. ‘기적의 해’ 동안 그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뉴턴이 캠브리지에 남아 있었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나이 스물 네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흑사병이 잠잠해지자 대학의 문도 다시 열렸고, 뉴턴도 캠브리지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특별 연구원 자격으로 급여를 받아가며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연구에만 몰두했다. 교수 식당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행처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도 없었다. 1669년 수학 교수인 아이작 배로가 루카스 석좌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뉴턴에게 물려주었다. 보수도 많아졌고, 강의는 일주일에 단 한번만 해도 될 정도로 의무도 줄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구에만 몰두했다. 강의에도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절 그는 먹는 시간이나 자는 시간까지도 아까와 했다.

 

 

1672년 그는 기존의 굴절 망원경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반사 망원경을 발명해 왕립 학회에 보냈다. 학회는 즉시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왕립학회 회원들과 불화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학회에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도용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다 광학에 관한 뉴턴의 논문이 처음으로 왕립 학회의 회보에 실렸을 때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로버트 훅이라는 학자가 장문의 비판 글을 쓴 것이다. 뉴턴도 훅의 비판에 답하는 글을 썼고, 서로 반박 글이 오고 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다툼은 훅이 죽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처음 비판을 받은 지 무려 3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 일은 과학계 전체로 볼 때 큰 손실이기도 했다. 뉴턴은 자신의 광학 연구 성과물을 훅이 죽고 난 다음에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미적분과 관련해서도 일어났다. 오늘날 ‘미적분 우선권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일의 상대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는 독일 학자였다. 1675년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미적분법을 발표했다. 하지만 뉴턴은 미적분은 자신이 먼저 고안해 낸 것이고,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사실 뉴턴은 이미 기적의 해에 미적분법을 생각해 냈었고 그것을 원고로 작성해 1669년에 스승 아이작 배로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뉴턴이 먼저 고안한 것은 맞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분명 라이프니츠가 먼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이 영예를 나누어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뉴턴은 “두 번째 발명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논쟁의 해결을 왕립학회에 요청했다. 그리고 수학 역사상 가장 큰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이었고 논쟁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 추잡한 다툼 역시 1716년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끝이 났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발표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일에 인색했던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데는 에드먼드 핼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뉴턴이 책을 쓰도록 설득했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1686년 4월 28일 책의 1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왕립 학회에 발표하게 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총 세 권의 책을 발행하는데 들어간 인쇄 비용까지도 자신이 부담했다. 이 기념비적인 책은 뉴턴의 세 가지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 천체의 운동에 관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걸작으로 칭송 받았다. 그리고 철학자 존 로크 같은 이는 뉴턴을 신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1727년 3월 20일, 뉴턴은 여든 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뉴턴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거인이었다. 그리고 훗날 또 다른 과학자들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보았다.

 

 

아이작 뉴턴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개괄하는데 유용한 책으로는 <프린키피아의 천재>(리처드 웨스트폴/ 사이언스북스)와 <만유인력과 뉴턴>(게일 크리스니안슨/바다출판사) 등이 있다. 뉴턴과 다툼을 벌인 과학자는 앞에서 소개한 훅이나 라이프니츠 말고도 여럿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되게 당한 이는 왕실 천문학자였던 존 플램스티드일 것이다. <독재자 뉴턴>(데이비드 클라크, 스티븐 클라크/ 몸과마음)은 권력을 가진 뉴턴이 그에게 어떤 모진 짓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린키피아의 천재만유인력과 뉴턴독재자 뉴턴

 

뉴턴은 역학뿐만 아니라 광학에도 대단한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눈에 압력이 가해질 때 시각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뾰족한 물건으로 자기 눈을 찔러 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광학과 관련된 뉴턴의 실험에 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로버트 P 크리즈/지호)의 넷째 장 ‘뉴턴의 프리즘 빛 분해’를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