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는 역사의 주인 '정신적 도장'
2010. 2. 6. 03:19ㆍ정치와 사회
[4·19 50년을 말한다] <1> 소설가 최인훈-문학평론가 김치수 대담
정권교체 의미보다 문명의 주기 바꾼 사건
50년 너머 역사 속에 다함 없이 계승되는 게 중요
5·16 쿠데타로'실패한 혁명' 단정은 잘못
민주주의 근본 틀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이룬 것
정권교체 의미보다 문명의 주기 바꾼 사건
50년 너머 역사 속에 다함 없이 계승되는 게 중요
5·16 쿠데타로'실패한 혁명' 단정은 잘못
민주주의 근본 틀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이룬 것
최인훈(오른쪽), 김치수씨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노동을 담당하는 예술가로서 인류가 제시한 표준에 처지지 않겠다는 직업적 허영심으로 난세를 헤쳐왔다"며 4·19세대 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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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4ㆍ19혁명이 일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50년 전, 1960년 4월은 작가 최인훈씨가 그 해 발표한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소설 <광장> 서문에 쓴 대로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보람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4ㆍ19로 인해 비로소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체험했고, 우리 말과 글을 온전히 쓰는 한글세대가 등장했으며, 시민들은 역사의 주역임을 자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4ㆍ19는 결코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영구 지속될 혁명이다.
한국일보는 4ㆍ19 50주년을 맞아 매주 목요일자에 문화기획 '4ㆍ19 50년을 말한다'를 연재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굳건한 기둥인 4ㆍ19세대의 생생한 목소리로, 4ㆍ19 이후 반 세기 한국 역사와 사회, 문화의 변동을 짚고 미래를 위한 고언을 듣는 고품격 에세이다. 첫 순서로 '4ㆍ19정신의 완벽한 미학적 구현'으로 평가받는 <광장>의 소설가 최인훈씨와, 한국문학의 예술적 경신을 선도해온 문학평론가 김치수씨의 대담을 게재한다. 지난 25일 경기 고양시 최인훈씨 자택에서 진행된 대담은 한국일보와 문학과지성사가 함께 마련했다.
▦김치수= 4ㆍ19혁명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스무 살 대학생이었는데 벌써 칠십이 됐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최인훈= 1960년 4월에 직업군인으로 광주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회와 차단된 곳이다보니 신문 기사, 풍문으로 혁명 소식을 접했다.
한국일보는 4ㆍ19 50주년을 맞아 매주 목요일자에 문화기획 '4ㆍ19 50년을 말한다'를 연재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굳건한 기둥인 4ㆍ19세대의 생생한 목소리로, 4ㆍ19 이후 반 세기 한국 역사와 사회, 문화의 변동을 짚고 미래를 위한 고언을 듣는 고품격 에세이다. 첫 순서로 '4ㆍ19정신의 완벽한 미학적 구현'으로 평가받는 <광장>의 소설가 최인훈씨와, 한국문학의 예술적 경신을 선도해온 문학평론가 김치수씨의 대담을 게재한다. 지난 25일 경기 고양시 최인훈씨 자택에서 진행된 대담은 한국일보와 문학과지성사가 함께 마련했다.
▦김치수= 4ㆍ19혁명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스무 살 대학생이었는데 벌써 칠십이 됐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최인훈= 1960년 4월에 직업군인으로 광주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회와 차단된 곳이다보니 신문 기사, 풍문으로 혁명 소식을 접했다.
▦김=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도중 깡패들의 습격을 받은 것에 격분한 서울대생들이 이튿날 오전 시위에 나섰고, 나도 대학 동기인 고(故) 김현(문학평론가)과 대열에 합류했다. 광화문 중앙청 앞은 서울 지역 대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 경무대 쪽으로 진출하는데 경찰의 발포로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순간 길갓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신당동 하숙집으로 돌아오면서 트럭을 탈취한 시위대가 피 묻은 옷을 펄럭이며 질주하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4월 26일 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서면서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당시엔 우리가 뭔지 모르고 했던 일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낳으리라곤 생각 못했다.
▦최=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4ㆍ19는 내 인생에서 결정적 사건이었다. 4ㆍ19는 시위 대열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 한국이란 장소에서 생활했던 모든 사람에게 자각 여부와 무관하게 '정신적 도장'을 찍었다.
▦김= 선생의 대표작 <광장>은 선악의 대결 구도,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인간조건을 형상화하던 이전 소설과 달리, 이념과 현실의 괴리에서 고통받는 인간조건의 부조리를 표현하며 한국 소설의 모더니티를 보여준 탁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광장>은 4ㆍ19혁명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4ㆍ19가 가져온 자유민주주의가 분단된 남과 북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릴 수 있게 만든 것 아닐까. 선생은 <광장> 서문에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도 썼다.
▦최= 동감한다. 그해 가을 <광장>이 나오기 직전 발표한 소설이 <가면고>였는데, 그것은 정치적 분위기가 전혀 없는 일종의 구도소설이었다. 몇 달 사이 내 작품에 큰 단절이 생긴 것이다. 보통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변모할 땐 중간 형태의 작품들이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데뷔 당시 내 미적 취향은 선현의 경지에 닿고자 하는 전통적 동양 지식인에 가까웠다. 그런 취향이 유지됐다면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가 됐을 것이다.(웃음) 하지만 4ㆍ19의 충격이 내 지적인 타성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광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월남한 피난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 4ㆍ19가 정신사적 측면에서 미친 영향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실제 모델이 있나. 거기 대해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다.
▦최= 6ㆍ25전쟁 당시 남과 북의 포로 군인 70여명이 원대 복귀를 거부하고 인도행 배를 탄 일이 실제 있었다. 이 사건이 <광장>의 모티프가 됐지만, 이들 석방 포로 중 이명준 같은 인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명준은 순전히 문학적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인물이다.
▦김= 이듬해 5ㆍ16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는 점을 들어 4ㆍ19를 '미완의 혁명' 심지어 '실패한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써서 4ㆍ19에 큰 정신적 영향을 미쳤던 함석헌 선생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됐다는 것만으로도 4ㆍ19는 성공했다고 본다. 단번에 완성되는 혁명은 없다. 프랑스혁명도 한 세기 이상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하며 수많은 목숨을 대가로 치른 뒤에야 완성됐다. 중요한 것은 혁명 정신이 어떻게, 얼마만큼 계승되고 있는가다.
▦최= 동감한다. 4ㆍ19 이전 한반도 거주자들은 개화기, 식민통치, 이승만 독재를 거쳤는데, 세 시기는 권력 형태만 다를 뿐 매우 동질적인 시간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세 시기 모두 자기 바깥의 권위에 의해 모든 생활자가 동원된 체제인 것이다. 그런 전제적 생활의 리듬 내지 패턴이 최초로 갈라지는 모습을 우리가 똑똑히 목격한 사건이 4ㆍ19다. 만약 3ㆍ1운동이 없었다면 인간적 품위라는 입장에서 굉장히 괴롭게 식민지 역사를 회고해야 할 것이고, 그건 4ㆍ19가 없었다고 가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4ㆍ19는 정권교체 같은 통상적 의미의 정치적 부침을 넘어, 문명의 주기가 바뀌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굳이 4ㆍ19혁명의 성공 여부를 따지자면 그런 의미에서 유감없이 성공한 정치적 사건이다.
▦김= 5ㆍ16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경제발전,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국민들의 자유를 억누르려 했지만 그럴수록 시민 저항은 더 거세졌다. 이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부를 무너뜨렸던 4ㆍ19 정신의 계승일 것이다. 이 때문에 군사정부도 자유민주주의의 근본 틀마저 깰 순 없었고, 이런 틀이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가능했다. 4ㆍ19혁명을 통해 시민으로 거듭난 개인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의식을 갖고 산업발전의 주역으로 나섰던 것이다.
▦최= 군사반란에 의해 4ㆍ19의 성과가 모두 무화됐다는 주장은 얼른 귀에 들어올지는 몰라도 아무 깊이도 없는 천박한 얘기다. 4ㆍ19 이후 문민정부가 지속될 수 없을 만큼 혼란과 위기가 심각했다는 분석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내 기억에 군사반란이 일어날 무렵 신문, 방송은 차츰 혼란이 가라앉고 있다고 보도했었다. 설령 혼란이 심했다 해도 모처럼 바람직한 궤도에 올라선 역사를 흐트러뜨린 것은 성급한 처사였다. 근대 유럽 역사에서 보듯 성숙한 문명은 오랫동안 호된 값을 치른 후에야 얻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을 봐도 어제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오늘은 황제를 찾고, 광장에서 왕과 왕비를 처형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왕조의 혈족을 다시 왕으로 삼는다. 시행착오를 낭비로 여겨선 안된다.
▦김= 4ㆍ19혁명 50주년이란 말은 4ㆍ19가 50년의 세월에 걸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ㆍ19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최= 50년이 아니라 아마 다함 없이 살아있을 것이다.
▦김= 4ㆍ19혁명은 혁명의 주역이자 한국사의 독특한 세대인 '4ㆍ19세대'를 낳았다. 이들은 해방 후 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면서 한글로 사유하고 글을 쓴 최초의 세대다.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교육, 민족주의 사관에 바탕한 역사를 배웠다. 이들의 세대적 감수성과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 4ㆍ19세대의 문학을 낳았다고 본다. <광장>은 그런 4ㆍ19정신을 가장 정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최= <광장>을 발표하고 두세 달 지나 전방 사단에 근무하고 있는데 육군본부의 호출이 왔다. 갔더니 공보 담당 장교가 "참모총장이 '<광장>이란 작품이 화제라는데 그걸 쓴 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 보라'고 지시해서 불렀다. 그러니 긴장할 것 없고 서울로 휴가 왔다고 여기고 잘 있다 가라"고 했다. 옹고집 군대 문화였다면 훨씬 혹독한 정신적 압박이 있을 법한 일인데 무사히 넘어간 것 역시 4ㆍ19의 작은 여파가 아니었나 싶다.
▦김= 예술 작품은 어떤 의미에선 그 시대가 겪고 있는 좌절과 절망의 징후일 것이다. 4ㆍ19세대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들이 봉착한 허무주의적 사유, 개인적 기념비를 쌓으려는 위정자의 오만에 대한 이청준의 폭로 등은 우리 세대의 좌절과 역사적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광장>의 이명준이 죽음을 감행하며 드러내고자 한 시대의 징후는 무엇이었나.
▦최= 왜 이명준이 죽어야 했는지 가끔 생각한다. 낙관적인 독자들은 이명준이 조국의 상황을 문제시했다면 바다에 투신할 것이 아니라 재외 통일운동의 기수로 활동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가 죽는 것이 심미적으로 납득이 된다.
▦김= 혹시 이명준의 죽음은 이념의 허구성을 깨닫고 은혜와 나눈 사랑에서 진실을 발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사랑의 진실과 영원히 하나되려면 죽은 은혜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
▦최= 현실 생활이 저 멀리 희미한 환상의 그림자를 느끼며 현실이란 몸통과 마주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창작은 환상을 몸통으로, 현실을 희미한 그림자로 여기는 것이다. 용납된다면 "이명준은 희미한 그림자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환상적인 답변을 하겠다.(웃음) 그걸 두고 우주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누군가 꾸짖는다면 나는 "4ㆍ19 정신에는 그런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겠다.
▦김= 그 말씀으로 이명준이 영원히 살 가능성을 열어놓으신 것 같다. 아울러 4ㆍ19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지도 알 수 있게 됐다.(웃음)
▦최=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4ㆍ19는 내 인생에서 결정적 사건이었다. 4ㆍ19는 시위 대열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 한국이란 장소에서 생활했던 모든 사람에게 자각 여부와 무관하게 '정신적 도장'을 찍었다.
▦김= 선생의 대표작 <광장>은 선악의 대결 구도,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인간조건을 형상화하던 이전 소설과 달리, 이념과 현실의 괴리에서 고통받는 인간조건의 부조리를 표현하며 한국 소설의 모더니티를 보여준 탁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광장>은 4ㆍ19혁명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4ㆍ19가 가져온 자유민주주의가 분단된 남과 북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릴 수 있게 만든 것 아닐까. 선생은 <광장> 서문에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도 썼다.
▦최= 동감한다. 그해 가을 <광장>이 나오기 직전 발표한 소설이 <가면고>였는데, 그것은 정치적 분위기가 전혀 없는 일종의 구도소설이었다. 몇 달 사이 내 작품에 큰 단절이 생긴 것이다. 보통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변모할 땐 중간 형태의 작품들이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데뷔 당시 내 미적 취향은 선현의 경지에 닿고자 하는 전통적 동양 지식인에 가까웠다. 그런 취향이 유지됐다면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가 됐을 것이다.(웃음) 하지만 4ㆍ19의 충격이 내 지적인 타성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광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월남한 피난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 4ㆍ19가 정신사적 측면에서 미친 영향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실제 모델이 있나. 거기 대해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다.
▦최= 6ㆍ25전쟁 당시 남과 북의 포로 군인 70여명이 원대 복귀를 거부하고 인도행 배를 탄 일이 실제 있었다. 이 사건이 <광장>의 모티프가 됐지만, 이들 석방 포로 중 이명준 같은 인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명준은 순전히 문학적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인물이다.
▦김= 이듬해 5ㆍ16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는 점을 들어 4ㆍ19를 '미완의 혁명' 심지어 '실패한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써서 4ㆍ19에 큰 정신적 영향을 미쳤던 함석헌 선생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됐다는 것만으로도 4ㆍ19는 성공했다고 본다. 단번에 완성되는 혁명은 없다. 프랑스혁명도 한 세기 이상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하며 수많은 목숨을 대가로 치른 뒤에야 완성됐다. 중요한 것은 혁명 정신이 어떻게, 얼마만큼 계승되고 있는가다.
▦최= 동감한다. 4ㆍ19 이전 한반도 거주자들은 개화기, 식민통치, 이승만 독재를 거쳤는데, 세 시기는 권력 형태만 다를 뿐 매우 동질적인 시간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세 시기 모두 자기 바깥의 권위에 의해 모든 생활자가 동원된 체제인 것이다. 그런 전제적 생활의 리듬 내지 패턴이 최초로 갈라지는 모습을 우리가 똑똑히 목격한 사건이 4ㆍ19다. 만약 3ㆍ1운동이 없었다면 인간적 품위라는 입장에서 굉장히 괴롭게 식민지 역사를 회고해야 할 것이고, 그건 4ㆍ19가 없었다고 가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4ㆍ19는 정권교체 같은 통상적 의미의 정치적 부침을 넘어, 문명의 주기가 바뀌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굳이 4ㆍ19혁명의 성공 여부를 따지자면 그런 의미에서 유감없이 성공한 정치적 사건이다.
▦김= 5ㆍ16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경제발전,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국민들의 자유를 억누르려 했지만 그럴수록 시민 저항은 더 거세졌다. 이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부를 무너뜨렸던 4ㆍ19 정신의 계승일 것이다. 이 때문에 군사정부도 자유민주주의의 근본 틀마저 깰 순 없었고, 이런 틀이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가능했다. 4ㆍ19혁명을 통해 시민으로 거듭난 개인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의식을 갖고 산업발전의 주역으로 나섰던 것이다.
▦최= 군사반란에 의해 4ㆍ19의 성과가 모두 무화됐다는 주장은 얼른 귀에 들어올지는 몰라도 아무 깊이도 없는 천박한 얘기다. 4ㆍ19 이후 문민정부가 지속될 수 없을 만큼 혼란과 위기가 심각했다는 분석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내 기억에 군사반란이 일어날 무렵 신문, 방송은 차츰 혼란이 가라앉고 있다고 보도했었다. 설령 혼란이 심했다 해도 모처럼 바람직한 궤도에 올라선 역사를 흐트러뜨린 것은 성급한 처사였다. 근대 유럽 역사에서 보듯 성숙한 문명은 오랫동안 호된 값을 치른 후에야 얻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을 봐도 어제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오늘은 황제를 찾고, 광장에서 왕과 왕비를 처형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왕조의 혈족을 다시 왕으로 삼는다. 시행착오를 낭비로 여겨선 안된다.
▦김= 4ㆍ19혁명 50주년이란 말은 4ㆍ19가 50년의 세월에 걸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ㆍ19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최= 50년이 아니라 아마 다함 없이 살아있을 것이다.
▦김= 4ㆍ19혁명은 혁명의 주역이자 한국사의 독특한 세대인 '4ㆍ19세대'를 낳았다. 이들은 해방 후 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면서 한글로 사유하고 글을 쓴 최초의 세대다.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교육, 민족주의 사관에 바탕한 역사를 배웠다. 이들의 세대적 감수성과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 4ㆍ19세대의 문학을 낳았다고 본다. <광장>은 그런 4ㆍ19정신을 가장 정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최= <광장>을 발표하고 두세 달 지나 전방 사단에 근무하고 있는데 육군본부의 호출이 왔다. 갔더니 공보 담당 장교가 "참모총장이 '<광장>이란 작품이 화제라는데 그걸 쓴 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 보라'고 지시해서 불렀다. 그러니 긴장할 것 없고 서울로 휴가 왔다고 여기고 잘 있다 가라"고 했다. 옹고집 군대 문화였다면 훨씬 혹독한 정신적 압박이 있을 법한 일인데 무사히 넘어간 것 역시 4ㆍ19의 작은 여파가 아니었나 싶다.
▦김= 예술 작품은 어떤 의미에선 그 시대가 겪고 있는 좌절과 절망의 징후일 것이다. 4ㆍ19세대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들이 봉착한 허무주의적 사유, 개인적 기념비를 쌓으려는 위정자의 오만에 대한 이청준의 폭로 등은 우리 세대의 좌절과 역사적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광장>의 이명준이 죽음을 감행하며 드러내고자 한 시대의 징후는 무엇이었나.
▦최= 왜 이명준이 죽어야 했는지 가끔 생각한다. 낙관적인 독자들은 이명준이 조국의 상황을 문제시했다면 바다에 투신할 것이 아니라 재외 통일운동의 기수로 활동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가 죽는 것이 심미적으로 납득이 된다.
▦김= 혹시 이명준의 죽음은 이념의 허구성을 깨닫고 은혜와 나눈 사랑에서 진실을 발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사랑의 진실과 영원히 하나되려면 죽은 은혜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
▦최= 현실 생활이 저 멀리 희미한 환상의 그림자를 느끼며 현실이란 몸통과 마주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창작은 환상을 몸통으로, 현실을 희미한 그림자로 여기는 것이다. 용납된다면 "이명준은 희미한 그림자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환상적인 답변을 하겠다.(웃음) 그걸 두고 우주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누군가 꾸짖는다면 나는 "4ㆍ19 정신에는 그런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겠다.
▦김= 그 말씀으로 이명준이 영원히 살 가능성을 열어놓으신 것 같다. 아울러 4ㆍ19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지도 알 수 있게 됐다.(웃음)
최인훈 ▦1936년 함북 회령 출생 ▦서울대 법대 중퇴 ▦1959년 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이 자유문학에 추천돼 등단 ▦1977~2001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 <광장> <회색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화두>,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 <유토피아의 꿈> <길에 관한 명상> 등 ▦동인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서울극평가그룹상, 이산문학상 등 수상 ▦현 서울예대 명예교수 김치수 ▦1940년 전북 고창 출생 ▦서울대 불문학과, 대학원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 불문학 박사 ▦196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1970년 평론가 고 김현, 김병익, 김주연과 계간 '문학과 지성' 창간 ▦1979~2006년 이화여대 불문학과 교수 ▦평론집 <한국 소설의 공간> <문학과 비평의 구조> <공감의 비평을 위하여> <문학의 목소리> 등 ▦현대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수상 ▦현 이화여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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