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 마르크스주의자

2010. 9. 12. 04:52정치와 사회

마르크스주의자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은…

[프레시안 books 인터뷰] 테리 이글턴

기사입력 2010-09-10 오후 10:02:49

수년간의 기자 생활 도중에 적지 않은 외국의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그들 중 다수는 한국에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지난 4일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테리 이글턴도 그런 인물이다. 그의 방한 소식을 듣자마자 인터뷰를 계획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더구나 '프레시안 books'는 최근 두 차례에 걸쳐서 그의 책(<신을 옹호하다>, <반대자의 초상>)을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글턴과의 인터뷰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를 초청한 고려대학교 영미문화연구소에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는 답변을 받았다. 영미문화연구소 측의 전언에 따르면, 그의 거절 이유는 이렇다. '나는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데,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실제로 이글턴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수차례에 걸쳐서 "자신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는 최근에 휴대전화가 생겼지만, 그것도 들고 다니지 않으려고 노력한단다. 왜냐하면 길을 걷다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이글턴다운 대답을 들으면서 수긍이 갔다. 사실 1943년생인 그의 나이(67세)를 염두에 두면, 7박8일간의 이번 방한 일정은 빡빡했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서울, 광주, 대구에서의 총 다섯 차례의 강연이라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싶었을 것이다.

▲ 테리 이글턴. ⓒ프레시안(최형락)

마르크스주의자, 신을 말하다

다행히 한국에서의 공식 일정이 시작된 지난 6일 오전 짧게라도 이글턴을 만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기자들과의 만남주선했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이 만남에서 그는 '종교', '윤리', '신념', '사랑'을 얘기했다. 마침 2009년에 펴낸 <신을 옹호하다(Reason, Faith and Revolution)>(모멘토 펴냄)가 나온 탓인지 기자들의 질문도 대동소이했다.

그 자리에서 나왔던 인상 깊은 이글턴의 얘기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쏟아진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신을 옹호하다>를 보고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신을? 이런 반응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아는 독자라면 이 책에 놀랐을 리가 없다. 나는 영국 맨체스터아일랜드계 노동자의 가정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1966년에 낸 첫 책(<The New Left Church)>도 진보적 가톨릭 운동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신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발터 베냐민, 에른스트 블로흐와 같은 이들도 신학의 자장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일궜고, 남아메리카의 성직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만남을 통해서 '해방 신학'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었던 전통을 세웠다.

최근에는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좌파도 신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실을 돌파할 무기를 찾는 좌파에게 신학이 새로운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신을 옹호하다>와 올해 출간한 또 다른 책(<On Evil>)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1990년대 이래 좌파가 현실에서 힘을 잃어가고 나서, 좌파는 자기 생각을 반성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만하지 않고, 타자에게 열린 모습으로의 변화를 꾀했다. 이때 그들을 사로잡은 주제가 바로 윤리의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바로 신학이 부상했다."


마르크스주의자, 윤리를 말하다

그러나 윤리는 이글턴이 비판하던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후기구조주의자들도 집중했던 문제가 아닌가? 최근의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급진 좌파들의 윤리에 대한 관심과 후기구조주의자의 그것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를까? 또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평소에 궁금했던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이글턴은 국내에도 최근 소개된 2003년 서평모아 펴낸 책에서(<반대자의 초상(Figures of Dissent)>) 알랭 바디우를 평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히 언급했었다. 그 동안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생각도 좀 더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기회다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푸코, 데리다와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윤리의 문제에 집중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주장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밝히려면 아주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윤리를 얘기하려면, '오늘날 윤리의 기반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반에 대해서 답을 못한다.

데리다의 경우를 보자. 그는 윤리에 대한 논의를 펼치면서 칸트를 언급한다. 그러나 칸트는 윤리를 말하면서 '당위', '의무'를 강조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방식은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윤리를 얘기하면서 칸트가 아닌 어떤 원천이 있을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했던 '덕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자기실현의 한 수단으로서의 '덕성'을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윤리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조하건대, 덕성을 얘기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얘기를 2007년에 펴낸 책(<The Meaning of Life)>에서도 강조했었다."


실제로 이글턴은 2008년에 윤리학에 대한 책(<Trouble with Strangers : A Study of Ethics>)도 한 권 펴냈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추상적 도덕'보다는 윤리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이날은 현장의 분위기 탓인지, 이런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사랑을 말하다

아마 이날 가장 인기를 끈 이글턴의 답변은 '사랑'이었다. 물론 그가 얘기한 사랑은 남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오늘날 사랑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다. 사랑을 한정된 의미로만 사용하면 그것의 풍부한 의미를 포착하지 못한 채, 그것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사랑은 '성적인 것', '낭만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넓은 의미의 사랑을 정치적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얘기했던 이상향, 즉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사회다."


이글턴이 얘기한 '사랑'은 최근 한국, 일본에서 대안적인 공동체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우애'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자유-평등-우애) 중에서 가장 홀대 받았던 '우애'가 거의 200년 만에 세계 곳곳에서 강조되는 모습도 흥미롭다.

마르크스주의자, 신념을 말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이글턴은 '신념(faith)'을 강조한다. 그는 이날 오후 4시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바로 이 신념을 얘기했다. 약 30분에 걸친 강연에서,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서 기대했던 명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예수가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기꺼이 제국에 반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 제국의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를 따라서 순교자의 길로 들어섰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 등에서 일종의 '신념'의 원형을 본 듯하다. 그는 이런 '신념'이야말로 (이슬람, 기독교, 과학, 시장)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이 시대를 극복할 일종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신념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글턴이 강조한 대로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비극적 휴머니즘이 이 시대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대답의 몫은 우리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마르크스주의자, '빨갱이' 잡는 신문과 인터뷰하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첫 날을 보낸 이글턴은 저녁에도 쉬지 못한 듯하다. 이날 저녁 그가 한 보수 언론의 인터뷰에 응한 사실을 뒤늦게 들었다. 이 인터뷰가 누구의 의도였든 "세계적으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가 한국까지 와서 한 일이 "빨갱이 때려잡자"는 언론과의 인터뷰라니! 그의 말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10일 현재까지 이 언론은 어찌된 일인지 이글턴과의 인터뷰 내용을 부분만 공개했다. 그와의 인터뷰 사실을 알린 짧은 기사의 시작은 이렇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굉장히 후진적 방식으로 실천하는 신(neo) 스탈린주의 체제입니다. 북한은 보편주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강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