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무죄’ 판결

2011. 1. 24. 13:49정치와 사회


[칼럼] 죽산 조봉암의 ‘무죄’ 판결을 환영하며

요즘 내 생각들 2011/01/24 10:00 정운현

지난해 말 대법원이 박정희 유신시대의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데 이어 또 하나의 과거사 청산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사법(司法)살인’의 첫 희생자인 죽산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선생에 대한 ‘무죄’ 판결이 그것입니다.

지난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이승만 정권 당시 국가변란과 간첩혐의로 기소돼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로써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 선생에 대해 사법부가 반세기 만에 ‘사법살인’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


경기도 강화군 출신인 선생은 3·1운동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이후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검거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습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습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건국의 주역'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한 후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한 선생은 인천에서 제헌국회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무소속 구락부의 추천과 이승만의 권유로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은 선생은 식민잔재와 반봉건적 유제를 일소에 앞장섰으며 농지개혁은 선생의 대표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어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재선돼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초기 우리 의정사를 이끈 지도적 정치인으로, 말하자면 건국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선생은 차점으로 낙선하면서 선생은 거물정치인으로 부상하였고, 이때부터 비극은 서서히 잉태되었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선생은 216만 표, 선거도중에 타계한 신익희는 추모표 185만 표를 얻었고 이승만은 504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지만 부정선거라는 논란이 잇따랐습니다. 낙선한 선생은 이 해에 진보당을 창당, 이승만에 맞서려다 결국 간첩죄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승만의 정적 제거의 일환으로 시작된 ‘진보당사건’의 정치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우선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가세했고, 이 과정에서 불법구금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1심 재판부에서 간첩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원심판결을 확정해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때문에 선생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심 재판부의 재판장 유병진 판사가 나중에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등 사법부도 정치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보당사건 관계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장면. 오른쪽 두번째(흰옷)가 죽산 선생


선생이 사형이 집행(1959. 7. 30)된지 반세기만인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선생의 유족들이 방청석에 앉아 초조하게 선고 결과를 기다리는 가운데 이용훈 대법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내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 등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지만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 판결로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며 과거 사법부의 과오를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선생은 반세기만에 이승만 정권이 씌운 간첩 누명을 벗고 사면 복권이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52년만에 간첩혐의 벗어.. 사법부, 과오 인정

이날 재판정을 지켰던 선생의 딸 조호정씨(83)는 재판이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나 “아침까지도 불안했는데 이렇게 좋은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이제 내가 죽어도 편하게 아버지를 뵐 수 있겠다”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조씨는 이어 “50여 년 동안 비워둔 부친의 비문에 이제야 (글을) 새겨 넣을 수 있게 됐다”며 “정적(政敵)을 이렇게 없애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은 사형집행 전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지향해야할 일임에도 그 때문에 사형을 당해야 했던 것이 이승만 정권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이승만 정권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이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음모로밖에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승만은 정적 제거계획에 따라 희생된 선생은 현실의 권력투쟁에서는 졌지만 역사의 평가에서는 결국 승자가 됐습니다. 따라서 선생에 대한 재평가 및 명예회복 작업은 이제부터라도 본격화돼야 하며,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 서훈도 마땅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선생의 묘소와 비석. 묘소 뒷면은 그간 비워져 있었다.


* 이 글은 24일자 <메트로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