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김대중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2011. 3. 8. 15:37ㆍ정치와 사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들의 유혈 시위 끝에 외국으로 망명해 쓸쓸한 최후를 맞았고, 박정희는 18년 장기 독재 끝에 부하에게 사살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군부 출신의 전두환ㆍ노태우는 퇴임 후 재판에서 쿠데타 주범으로 처벌받는 수모를 겪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로 불명예 퇴임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불과 1년여만에 자신에 대한 부패수사와 관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반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3번의 낙선과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숱한 고난과 곤경을 겪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한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게다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행로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그리 후한 것 같지 않다. 대체로 해외에 비해 국내의 평가가 크게 인색한 데다가, 그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의 집권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권시대 10년을 맛보았지만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난 진보개혁정권에서 이루어놓았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발전이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역행하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정권교체가 급선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더 우선적인 과제는 한국 최초의 진보개혁정부였던 김대중정부의 공과 과, 성과와 한계에서 대해 이제 한번쯤 찬찬히 되짚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정부로부터 계승할 것은 무엇이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정치인, 시민운동가, 학자, 문화예술인 등 각계 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연재하는 것이다. 우선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기념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과의 인터뷰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 인터뷰는 지난 2월 21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에서 있었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맡았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회고와 평가의 글을 차례로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김대중 도서관의 내력, 그리고 '나와 김대중'
프레시안 : 올 8월이면 김대중 대통령 서거 2주년이 된다. 서거 1주년인 지난해 8월 <김대중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그의 일생이 공식적으로 정리됐지만, 아직 김대중에 대한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의 집권에서 시작된 진보개혁정권 10년 동안(1998-2008년) 진전됐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이후 크게 후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대중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그의 성취는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다시 말해 계승과 극복의 과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 인터뷰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들은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우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퇴임하면 재임시절 그의 통치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한데 모아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통치시기를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김대중 도서관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도서관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전 문화부장관 ⓒ프레시안(손문상) |
김성재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아태평화재단'(Asia-Pacific Peace Foundation)이 그 모체다. 대통령은 대통령재임시인 2002년 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본래의 정신에서 이 재단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연세대학교가 이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퇴임 직후인 2003년에 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살고 있는 동교동 집 외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다.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내게 일임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께서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EU 공동체와 평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것은 그분이 평생 가지고 있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및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하신 후 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드신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재원은 대통령께서 내게 맡긴 그 재산으로 했다. 나는 그 당시 영국에서 안식년으로 연구하던 중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프리오'(PRIO, Peace Research Institute Oslo,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에 초청이 돼 1주일간 방문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프리오는 세계적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이 세운 연구소로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께 프리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프리오 같은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의 긴 편지를 썼다. 대통령은 이 편지에 대해 아주 흡족해 했다. 대통령께서 구상한 것에 내가 조금 도움을 드린 것이다. 아태평화재단은 처음에 동교동의 한 빌딩에 임대해서 있다가 김대중대통령 사저 바로 옆에 건축되었는데,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대통령을 비밀리에 감시하던 안가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세대학교가 기증받은 건물을 김대중도서관으로 개관하자 매우 기뻐했고, 당신이 애장했던 1만 3000여 권의 도서와 일생동안의 정치활동, 대통령재임시 통치 메모,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 관련자료 10만 여점과 노벨평화상 상금 중 3억 원도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통령 기념도서관 겸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프레시안 : 김대중 도서관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가?
김성재 : 김대중도서관은 민주주의, 평화, 빈곤퇴치의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대통령이 퇴임 후 계속 활동한 일들이기도 하다. 김대중도서관은 이 목적을 가지고 크게 다섯 가지 사업을 한다. 첫 번째는 미국의 전직대통령들 기념도서관처럼 전시관을 만들어 김대중대통령의 일생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다. 출생에서 서거까지 모든 사적 자료와 문서, 사진, 영상 자료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 평화통일 관련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두 번째는 국내외에서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 관련 사료를 발굴, 수집하고, 해제, 연구하며, 중요한 인사들의 구술사 프로젝트도 수행한다. 세 번째는 도서관 목적에 따른 주제별 연구를 국내외 학자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국제교류와 학술 심포지엄 및 세미나도 한다. 네 번째는 교육 과정인데, 미국의 케네디 스쿨과 같은 학술연구 및 교육과정으로 김대중평화아카데미 과정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고, 연세대 통일연구소와 협력하여 평화통일 관련 석박사 과정도 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지속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도서 및 자료를 출판하는 사업을 한다.
프레시안 : 김성재 관장과 김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이후 나는 1971년 대선 때 김대중후보를 위해 부정선거를 막는 표지키기 참관인 운동을 주도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으로 드린 3.1절미사에서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을 준비할 때, 나는 문익환목사님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대통령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연금 상태였고, 또한 이 일은 비밀리에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복'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연락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성명서 초안이 완성되면 '한복이 다됐다'고 연락하는 식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내가 교수로 있던 한신대에 김대중대통령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했었다. 1987년 김대중대통령께서 평민당을 만들 때는 나에게 정계에 입문하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후에도 두 번 전국구 의원을 하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부터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 등의 사회정책 자문역할은 계속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고, 문화부장관도 했는데.
김성재 :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대통령자문새교육공동체위원회 상임위원과 일본 대중문화개방 등의 문화정책 자문을 위해 문화관광부자문위원장을 했다. 99년에 국민여론 수렴과 개혁 그리고 공직기장을 위해 신설된 민정수석을 했고, 2000년에는 정책기획수석을 했다. 정책기획수석은 인사,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는데, 대통령께서 개혁적인 국정수행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이 때 대통령의 뜻을 따라 정보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 등 인권에 의한 국가복지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을 하다가 문화관광부장관을 했다. 김대중대통령 재임 5년 동안 함께 일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프레시안 : 김 관장은 40년 이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아 왔고,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내각에도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겠다. 김대중은 해방 이후 최초의 수평적 권력 교체를 이뤘고,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으며, 또 최초로 정권을 재창출한 대통령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나?
김성재 :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과 함께 성공했고,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 이것을 나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가다운 정상적인 국가가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국가부도사태의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세계 최선두 정보화와 세계10위권 경제발전, 복지국가와 문화국가, 6.15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화해협력과 자주적 국제외교, 노벨평화상 수상 등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전세계가 감탄했다. 국민들도 역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를 역주행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다시 방향을 전환할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맛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바람을 보라. 역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인권으로 복지를 보장받고,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어도 평화롭게 살고, 국제사회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우리 국민들이 세계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국민들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프레시안 : 오랫동안 김 전 대통령을 봐 왔는데, 김대중 리더십,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나?
▲ 5번의 죽을 고비와 20여 년 간의 투옥, 망명, 연금의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타협하거나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대중대통령이 옥중에서 쓴 메모가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용서 없이는 우리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오랜 당쟁과, 식민지를 거치면서 원한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용서로 풀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똑똑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발전을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우리 국민과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 대통령께서 서거 한 후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나는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고, 나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진면목을 알게 되고, 또 여기 와서 보니 내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면서 더욱 존경을 표하고, 후원에 참여하는 분들도 꽤 많다.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정부에 제기됐던 비판적 지적들
프레시안 : DJ의 재임 5년간 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 등을 그의 업적으로 꼽고 있다. 반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비판이 경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부분이다. 물론 현재 상황에 대해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기는 좀 그렇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3년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같은 평가에 대해 어떻게 보나?
김성재 : 우리사회 양극화 문제를 잘 못 인식하는 것 같다. 우리사회를 양극화 체제로 만들고 항존하는 빈민계급을 탄생시킨 것은 박정희군사정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은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는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얘기하는데, 절반만 맞는 잘못된 인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물론 경제개발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으로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한 불의한 독재개발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집약 정책으로 수출주도형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임금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명분으로 저곡가정책을 했다. 저곡가정책은 농민을 빈민으로 만들었다. 빈민이 된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서울과 공업단지가 있는 도시로 이농해서 저임금노동자와 도시빈민이 되었다. 이미 저임금 노동인데도, 빈민농민이 대거 몰려들자 노동자 공급과잉으로 저임금이 정당화되고 더 낮아졌다. 당시 노동자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어 잔업을 포함해서 16시간씩 코피 쏟으며 화장실도 못가고 일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이런 비참한 살인적인 노동현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런 극한에 처한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알리려고 '우리는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것이다.
박정희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을 희생시켰다. 당시 노조결성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민중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는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심지어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반공법으로 처벌했다. 반면에 도리어 산업기술과 경제가 일본에 절대적으로 예속당하는 산업 체제를 만들어 일본 경제를 살찌웠다. 이 결과 지금까지도 IT 분야외의 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본에 더 많은 로열티를 주어야 한다. 현재도 1년에 수백억 달러의 로열티를 일본에 주고 있다.
또한 군사정권은 권력유지와 부정한 특혜로 재벌과 대기업들을 갑자기 만들어 내었다. 현재 재벌들과 대기업 상당수는 이렇게 군사정권과 유착한 특혜로 된 것이지 정당하게 땀 흘리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된 것처럼 거짓 성공신화를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지금까지도 특혜, 탈법, 착취의 불의한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군사정권 때의 경제성장은 결코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때 우리나라 경제기반을 만들고, 성장시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빈부로 양극화 된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김영삼정부가 도입했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슬로건이 '세계화'였다. 1990년을 전후해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세계는 국경 없는 단일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세계시장 질서를 만든 것이 세계무역기구(WTO)였다. 미국은 이 WTO를 통한 신자유주의로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경제 상황에서 김영삼정부는 OECD에 가입하고 외화자유 정책을 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책도 없이 정치적 과시용으로 성급하게 경제 개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시장에 무작정 편입이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가 초래됐고,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이 때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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