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패러다임 3

2012. 9. 26. 17:44경영과 경제

철학의 빈곤으로 번영하는 자본주의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4>

김운회 동양대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8-08 오전 7:49:39


□ 머리가 제일 긴 공주가 여왕이 될거야.

엘리너 파전(Eleanor Farjeon)의 <일곱 번째 공주(The Seventh Princess)>를 읽으신 적이 있습니까? 못 보신 분을 위해 여기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과 그 책에 실린 <일곱 번째 공주> 삽화

아득한 옛날, 한 임금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임금은 아름다운 집시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임금은 왕비를 어떻게나 사랑했던지,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왕비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왕비는 공주만 일곱 명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왕비가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어느 공주를 이 자리에 앉히시렵니까?"

임금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그 때 사냥꾼들이 잡아온 하얀 몸에 긴 털을 가진 아름다운 백조가 갑자기 눈에 들어와 말했습니다.

"가장 긴 머리털을 지닌 공주를 그 자리에 앉히겠소. 그리고 나의 뒤를 이을 여왕으로 삼겠소."

왕비는 6명의 유모에게 임금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왕비가 맡았습니다. 그 날부터, 유모들은 자기가 맡은 공주의 머리털 가꾸기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들 곁에는 예쁜 백조 6 마리가 늘 함께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왕비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의 왕자가 와서 이 나라 여왕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머리 길이를 잴 날이 온 것이죠. 그런데 일이 난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6명의 공주의 머리털 길이가 모두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막내공주의 머리털은 아예 사내아이처럼 짧은 머리였습니다. 결국 아무도 여왕이 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도, 6명의 공주들은 유모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리털을 가꾸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결국 공주들의 머리털은 그들을 따르던 6마리의 백조처럼 하얗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요즘의 세계, 특히 한국 사회를 보면 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짱', '몸짱'의 이야기로 날이 지샙니다. '몸짱'을 만들려고 무리하다가 죽지를 않나 '얼짱'을 만들려다가 풍선처럼 된 얼굴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명한 모 여배우는 몸 하나가 재산이니 거의 하루 종일 헬스클럽에서 산다고 자랑합니다. 대부분의 유명 연예인들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거의 유사합니다. 물론 몸 가꾸기를 잘해야 그 직업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하겠습니까마는 인생의 대부분을 헬스클럽(fitness center)에서 보낸다니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류의 사회적 꼬임(social propaganda)에 열광하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은 더욱 가관입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마치 나병환자들이나 붕대귀신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많은 여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피부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TV를 보다보면, 때로는 충격에 빠집니다. 루이비똥(louisvuitton) 가방에 구찌(Gucci) 선글라스에 피부는 백옥같고, 앵두빛 입술에 허리는 조비연(趙飛燕)도 무색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파우스트(Faust)가 스파게티(Spaghetti)의 한 종류입니까?"라는 식이니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여자가 아름다우면 다 용서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인이면 다른 모든 일들도 다 잘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형색색 최고 명품으로 몸을 휘감은 마네킹을 보는 듯합니다. 저는 가끔 자본주의가 꼭 이 머리가 텅 빈 마네킹(mannequin)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패러다임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도 이 패러다임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는 말인데 토마스 쿤(Thomas Kuhn)이 자신의 주저인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에서 사용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 토마스 쿤과 주저 『과학혁명의 구조』

이 말을 우선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나 보고 우리의 논의를 시작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토마스 쿤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죠.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란 과거의 과학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 이상의 것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업적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과학 사회가 얼마동안 과학이 보다 나은 실제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인정한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뉴튼의 『프린키피아(Principia』, 라보와지에의 『화학』 등은 한 때는 연구자들 대대로 내려오면서 연구 분야에서 정통의 문제와 방법론을 은연중에 정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책들은 ①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함과 동시에 ② 모든 유형의 문제를 다시 개편하여 연구자들로 하여금 해결하도록 남겨놓은 융통성이 있는 업적인데 이런 두 가지 특성을 띠는 업적을 나는 이제부터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르기로 하는데 이 말은 정상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1)

토마스 쿤의 말은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과학사회(scientific community)의 구성원들이 그 시기에 공유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ideology) 또는 믿음(belief), 가치(value) 등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군요. 물론 토마스 쿤이 사용하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난해하기 때문에 단순한 정의(simple definition)를 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원래 언어학(linguistics) 용어로 많이 쓰인 말로 어원적으로 동사의 어형변화(inflection)라든가, 계열체(系列體), 모델(model), 틀(frame) 등의 말이었다고 하는데, 제가 앞으로 사용할 패러다임은 이보다는 포괄적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즉 이데올로기(ideology)를 결합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동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predominant ideology)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패러다임을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는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즉 개별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찬성하는 어떤 삶의 태도, 가치관, 인식방법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회를 구성 유지하기가 어렵죠.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사회구성원들이 이전의 패러다임에 동의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패러다임에 동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어떤 사람에 대하여 "섹시(sexy)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헤프다." 또는 "행실이 바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은 욕설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대 초반인 지금 이 말을 해주면 "더 할 수 없는 칭찬"의 말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이 말을 안 하면 상당히 섭섭한 일이 되었습니다. 패러다임이 분명 바뀐 것이죠.

패러다임의 힘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어 새로운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것을 그 자체로 파악하기보다는 기존 패러다임의 유지에 유리하게 재구성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사고를 혁명적으로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모든 것이 집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남과 다른 사고를 하면 이내 세찬 시련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주의만 해도 너무 견고하게 패러다임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심리적인 아노미(anomie) 현상이 만연한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 동안 지나치게 견고하게 굳어져서 마치 유토피어니즘(Utopianism)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처럼 생각되어진 듯합니다. 이제 그것을 과감히 부수고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어니즘 논쟁에 불을 붙일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2) 철학이 없어 번영하는 자본주의

어떤 시대든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predominant ideology)가 있습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때로는 강요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사회주의 계열은 무조건 진보(進步, progress)라고 하는 것을 듣고는 의아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적 관점이라니 그러면 볼셰비즘(Bolshevism) 또는 스탈린주의(Stalinism)가 과연 진보적인 패러다임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진보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권이 모두 몰락한 지금 그러면 진보의 축은 어디에 있을까? 이 모든 것은 결국은 패러다임의 다른 모습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패러다임은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인식의 방법 등을 넘어서 시대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그 시대를 통괄하고 있는 사고의 방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끊임없이 그 같은 공유할 수 있는 생각들을 공급하는데 그 생각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틀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harmful aftereffect)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정교해지고 치밀해지면서 오히려 허점과 오류가 나타나는 특성을 가지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은 큰 실수를 한 셈입니다.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정밀한 것은 자연과학이면 몰라도 사회과학에서는 이내 오류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주의는 허약한 틀을 가지고 지나치게 정교하게 분석을 시도한데다 나타난 데이터(data)들이 이내 검정되어지면서 이론적 허점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자본주의가 아직도 건재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철학적 기반이 형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의 하드코어(hardcore)에 들어가 보면 철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식적인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론가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지요. 제가 경제학을 처음 공부할 때 가장 실망한 것 가운데 하나가 벤담의 엉성한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 이론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이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유난히 마르크스에 빠지는 이유도 바로 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칸트(Kant)와 헤겔(Hegel)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학과 엉성하고 이론적 깊이도 없는 자본주의 경제학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 제레미 벤담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서는 "당신 말이 지나치지 않아? 그렇게 허약한 학문이 어떻게 수백 년을 견뎠지?" 라고 하실 분도 있습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허약했기 때문에 수백 년을 견딘 것이죠. 그만큼 뛰어난 적응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부품을 지나치게 정교하게 만든 많은 제품들은 고장 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작은 나사 하나가 빠져버려도 기계는 못 쓰는 경우가 많지요.

경제학 공부를 하지 못했던 분을 위하여 벤담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지 이해하실 테니 말입니다.

벤담(Bentham, 1748~1832)은 사람에게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 행위의 근본적인 동기라고 합니다. 인간에 있어서 쾌락은 선(善)이요, 고통은 불행(不幸)인데 이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리(公理, axiom)임을 역설합니다. 벤담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인간이 동기는 하나의 원칙 즉 자신의 만족도를 극대화하려는 욕구로 환원될 수 있으며 각 개인은 자신의 쾌락에 대한 유일한 판단자라고 역설합니다.(2) 즉 개인이 느끼는 쾌락은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에 쾌락의 양이 같다면 소크라테스(Socrates)나 마를린 먼로(Marilyn Monroe)가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같은 철학적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학입니다. 어떤가요? 너무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자본주의 패러다임(Paradigm of Capitalism)의 근간이라고 하니 한심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벤담의 쾌락이론을 바탕으로 효용이론이 만들어지고 정교화됩니다. 원래부터 벤담은 쾌락을 수량화(數量化)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근사하게 그것을 수량화하여 효용이론(utility theory)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효용이론이라는 것이 사실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쾌락을 수치화하는 과정에서 기수적 효용(Cardinal Numeral utility : 절대적 수량의 차이에 따른 만족도)이 아니라 서수적 효용(Ordinary Numeral utility : 순서의 차이에 따른 만족도 차이)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소비자 이론(Consumption theory)을 만든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쾌락을 수량화한다고 하면서 다만 순서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 순서의 차이를 보는 것을 수치화할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그것을 종합하여 일반 균형화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가능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철학적 기반 하에서 효용함수(utility function)가 만들어지고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y, 限界效用遞減法則)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효용이란 만족도(degree of satisfaction), 즉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할 때 느끼는 만족도 입니다. 한계효용 체감이란 과자를 자꾸 먹으면 그 과자가 물리듯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더 많이 소비하면 할수록, 그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용도 없는데 말만 복잡하여 경제학자들의 밥벌이에 적당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구축되어있다는 것이 아슬아슬한 일이기도 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최고의 산, 금강산 꼭대기를 죽을 힘을 다하여 올라 가보니 아무것도 없이 쓰레기 봉지만 나뒹굴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집착할 이데올로기도 없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살아남은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머리가 텅 빈 마네킹과 같이 자본주의가 정처도 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목숨의 길이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이렇게 태평할 수 있는 지가 말입니다. 그 와중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만 부추깁니다.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원초적 질료(質料)인 효용의 실체는 결국 개인의 욕망 충족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허무주의(虛無主義), 끝을 모르는 쾌락주의(快樂主義), 물신숭배(物神崇拜)가 판을 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현실적으로 최고효용이 비도덕적이고 인간의 핵(core)을 파괴하는 것일지라도 효용가치라고 하는 상부구조의 원형질이 존속하는 한, 음으로 양으로 번성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더러운 부엌 자체를 청결히 하지 않고서 바퀴 벌레 약만 친다고 해서 바퀴벌레의 번식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타인을 그 도구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존재하게 될 때 그 목적을 위한 각종 비즈니스들이 당연히 나타납니다. 오늘날 선후 할 것 없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어느 국가에 있어서나 중세의 페스트(pest)처럼 만연한 있는 '섹스(sex) 산업'들이 그 실체들입니다. 각종 성풍속(性風俗) 산업은 물론 심각한 인신매매와 납치까지도 산업화되어있습니다.

그리하여 태고 이래로 해방을 위해 몸부림쳐왔던 이브(Eve)의 딸들을 감언이설로 꼬여 놓고서 여러 저명한 카사노바들을 초빙한 후에 어느 여자가 가장 큰 효용(만족)을 줄 것인가를 심사하는 각종 미인대회가 등장하여 인간의 상품화를 위한 판촉(promotion)을 강화합니다. 한편으로는, 오랜 관성(慣性, inertia)으로 말미암아서 노예근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허영끼 많은 참가자들은 자신이 가장 큰 성적인 만족을 준다고 선정이 되면 도마 위의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며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한계주의(marginalism)의 원리에 입각하여 현지 촬영비용을 절감하고 유명세를 지불할 필요도 없이 열악한 조명장치와 싸구려 호텔 방 한 칸이면 촬영이 가능한, 다시 말해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이윤)"를 누릴 수 있는 한 각종 포(르)노영화(음란영화)가 시대를 선도하게 됩니다.

후쿠야마의 말대로 세계가 자본주의로 정리되고 있는 요즘,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성범죄(性犯罪) 때문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리고 성범죄자들을 잡는다고 난리가 아니지요.

말이 안 되지요. 인터넷을 열면 단 몇 초 만에 볼 수 있는 수 만 톤의 포노그라피(pornography)가 쌓여있습니다. 포노그라피 산업이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 1970년에는 포노그라피의 연간 판매량을 1000만 달러, 1985년 약 10억 달러, 2003년에는 연간 80억∼100 억 달러, 2006년 86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3) 이것은 미국 내 3대 네트워크 방송사인 NBC, ABC, CBS의 연간 매출액을 넘어서는 규모로 미국 내에서 포르노 산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4)

그리고 시대는 점점 더 섹시(sexy)한 여인이 '이상적 미인'이라고 사회적으로 프로파갠다(propaganda)하면서 치마는 자꾸만 올라가 사람의 성적 욕망을 있는 대로 자극해 놓고서, 성범죄를 마치 악마의 행위처럼 묘사합니다. 중국의 어떤 배우는 하룻밤의 화대가 18억원이라는 말도 들립니다. 대체로 부자들은 이런 류의 쾌락을 음으로 양으로 다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일반인들에게는 무슨 부처나 예수도 아니고 엄격한 성윤리를 강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더러운 오물로 가득 찬 끈적끈적한 부엌을 청소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사는 바퀴벌레만 나무라는 꼴입니다. 오해하지는 맙시다. 성범죄자들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 구조가 애당초 잘못 가고 있는데 그 부산물만 탓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2012년을 기준으로 자본주의의 대표 국가인 미국의 경우, FBI의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의 미국 내에서 강간(forcible rape) 건수는 매 6.2분마다 1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뉴스타운』2012.1.8).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1초마다 24명의 사람들이 강간을 당하거나 스토킹,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미국 국립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에 의하면, 여성들은 100만명 이상이 강간을 당하고 있으며 미국 여성들 5명 가운데 1명은 살아가면서 어떤 특정시점에 강간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아가 80%의 여성들이 25세 이전에 강간을 당하고 있었으며 남성의 25%는 10세 이전에 여성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19명중 1명은 생애 어떤 시기에 스토킹을 당했다고 합니다.(5)

▲ 2007년과 2010년 미국의 범죄 시계 통계(NCPC 및 FBI Report 재구성)

한국도 통계는 이보다 낮게 나와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성범죄를 철저히 은폐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회사나 조직에서 성희롱(性戱弄, sexual harassment)이 만연해 있고, 언제 어느 곳에 서 있든지 그 곳에서"수 킬로미터 안에서 매춘(賣春, Prostitution)이 가능한 나라"라고 합니다. 2011년 미국 국무부는 연례『인신매매실태 보고서』를 통해 한국을 "인신매매와 매춘의 천국"으로 규정했습니다. 미 국무부는 조사대상 국가들을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각각 분류하고 있는 데 한국은 10년째 1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서두에서 한국은 강제 매춘 여성의 공급국이자, 경유국이며 최종 도착국이라고 규정했습니다.(『스포츠경향』2011.6.28)

한국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여성 10명중 3명, 성매매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전체 성매매 여성이 189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하면서 20~35세 여성 가운데 3분의 1(30%) 가량이 성매매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코리아헤럴드』2011.12.9) 그리고 최근 한 유명 피임기구 제조업체가 세계 주요 36개국의 남녀 29,0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남자들의 외도율(外道率, the rate of sexual infidelity)이 세계 2위로 나타났습니다. 1위의 영예(?)는 태국(Thailand)이 가져갔습니다.(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압축 성장을 이룩하였는데 아쉽게도 이 분야는 태국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반면 여성 외도율은 나이지리아가 1위, 태국이 4위, 싱가포르는 5위를 차지했고 다행히 한국 여성은 상위 5위권에 들지 않았습니다.(『나우뉴스』2011.12.7)

한국 남자의 외도율은 1위이지만 한국 여자는 5위에도 속하지 않는데 성매매 관련 여성은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가히 섹스천국(Sex Paradise)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욕망의 진화(The Evolution of Desire)』의 저자인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는 '외도와 나이의 연관성'이라는 연구에서 "남성은 성적 능력이 왕성한 청년기부터 성적인 욕구가 강하게 지속되지만, 여성은 임신 가능성이 적은 중장년기에 외도(sexual infidelity) 욕구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묵시적으로 현재의 가장 커다란 효용 가치가 '섹스(sex)'임을 말해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관념이 확산될 때, 더욱 위험한 것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부추김으로써,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인과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주체적 해결의지를 방기(放棄)하게 만들게 된다는 점이죠.

물론 사람이 동물적인 속성을 본질의 일부로 가진 까닭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 관행일지라도 자본주의는 아무래도 지나칩니다. 정말 자본주의는 끝없이 그리고 모질게도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각종 범죄들과 공동체의 파탄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무서운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3) 밀물의 속도(velocity of flow)

다시 패러다임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매우 강력하고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쿤은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어떤 계기를 통하여 급격하게 바뀐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있는데, 그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사례가 나타나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위기(crisis)에 봉착합니다. 즉 기존의 이론의 틀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죠. 이것을 토마스 쿤은 어노멀리(anomaly) 즉 이상(異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어노멀리를 설명하는 패러다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normal science)가 되고 다시 거대한 패러다임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국 이런 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회과학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토마스 쿤의 설명은 느낌은 색다르지만 결국 헤겔(Hegel)의 변증법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양질전화(量質轉化)(6), 혁명(revolution) 등의 사회주의 철학이론을 일부 그대로 답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사회주의 철학이 공산주의나 무계급 사회의 실현으로 패러다임의 위기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죠.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어노멀리(anomaly)는 중심부(center)에서보다는 주변부(periphery)에서부터 변화가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패러다임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중심부에서 나타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죠. 정치적인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면 가장 피해를 보는 집단이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사회적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사람들이 사회적 모순을 첨예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정치적 소요가 파급되기 시작하면서 그 힘이 주변부에서부터 중심부로 이전하게 되기 시작하고 그 파급 정도나 정합성(整合性)에 따라 패러다임의 중심부의 지도계층에서도 균열이 발생하고 이것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지요.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마르크스의 혁명이론과도 거의 동일합니다.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진리(Truth)를 찾고 그것을 밝혀내면 될 일이지 무슨 패러다임의 변화니 하는 걸까?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는 인식의 틀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관적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패러다임이 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그(사상가, idealogue)들 사이에 대대적인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는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정치 또는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여 헤게모니(hegemony)를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외부에서 보면 학자들 간에 논쟁 중에 불과할 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내부에는 엄청난 헤게모니 쟁탈전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르크스적으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상부구조(上部構造, super structure)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복잡한 패러다임의 논의를 제가 본격적으로 하려는 걸까요? 그것은 제가 보기엔 지금이 패러다임이 요동을 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보시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디지털 시대에 진입하고 있어서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 많이 생긴데 비하여 제대로 된 패러다임의 논의가 진행되는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말은 무성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논의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으니 『문명의 충돌』이니 『역사의 종언』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죠.

디지털 시대를 생각해 보면 과거의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고방식이나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때로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 디지털 시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이야기는 지겨울 정도로 논의할 것이지만 한 가지만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리의 미래는 단순히 과거의 연장선상에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없이 현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현재나 미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밀물의 속도(velocity of flow)'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밀물의 속도는 매우 느린 듯 느껴지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갯벌에 낮잠이라도 자게 되면 이내 익사하고 맙니다. 밀물의 속도는 3살짜리 아기가 걸음마 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디지털 기술의 변화도 약간은 느리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기나긴 자본주의나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이라 사회과학 논문을 보면 그 적용되는 정도가 어떤 것은 6개월도 제대로 구실을 못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제게는 그런 논문들은 종이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에는 대학의 이름으로 수많은 논문들이 양산(量産)되고 있습니다. 차라리 통계회사에 입도선매(立稻先賣)하여 맡겨 버리면 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문들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됩니다. 현대의 논문은 진리를 논하고 패러다임에 대한 진정한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기술자를 흉내 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학문을 보면 인식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것을 '유리(羑里)'라고 불러왔습니다. 새로운 어떤 존재(존재양식, existence mode)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식의 틀(표현양식, expression mode)을 만듭니다. 그래서 인식의 틀이 어느 정도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게 됩니다. 깨어 있지를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인식의 틀(표현양식)을 그 존재(존재양식)의 참모습(entity)라고 착각합니다. 문제는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를 그 본질적 특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변증법의 반(反) 개념이나 아노멀리(anomaly)라는 것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래서 존재 그 자체를 존재로 인식하려고 하면 실존 그 자체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이 있고 그것은 결국 인식의 틀을 원천적으로 구성할 수 없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고대 사상가 노자(老子)는 이런 인식의 모순을 "도(道)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저 '변화(Change)' 자체를 패러다임의 불변적 구성 요소로 둘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쩌면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구성할 수 있을 지도 모를 테니까요.

필자 주석

1. Thomas Kuhn 『과학혁명의 구조』(정음사 : 1988) 32∼33쪽.

2. Jeremy Bentham,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 of Morals and Legislation, A Bentham Reader, M. P. Macked, ed.(NY : Pegasus, 1969)

3. President's Commission on Obscenity and Pornography. Report of The Commission on Obscenity and Pornography. (1970. Washington, D. C.: U. S. Government Printing Office). Eric Schlosser, Reefer Madness: Sex, Drugs, and Cheap Labor in the American Black Market

4. Jerry Ropelato, "Pornography Statistics 2007", Top Ten Reviews

5. 의학전문지 『헬스코리아뉴스』(2011.12.15)

6. 양질전화(量質轉化)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요한 개념으로 양(量)이 축적되어 쌓이면 어느 순간 질(質)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의 온도가 점점 증가하다 100도가 되면 물이 끓어 넘치고 0도 이하가 되면 얼음이 되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 보면, 양질전화는 물질 자체의 양질전화와 그 물질과 매개관계에 있는 존재에서도 양질관계가 나타난다. 원자는 물체의 구성단위로 개개의 원자일 때는 성질도 동일하지만 그것을 종합하는 양이 확대됨에 따라서 성질이 다른 물체가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매개 관계에 따라서도 그 성질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오존(O3)의 량도 량의 증감에 따라 약용량, 중독량, 치사량 등으로 나눠지지만, 이것을 먹는 사람이 어린이일 경우에는 약용량도 치사량이 될 수가 있다. 나아가 양적변화가 질적 변화를 초래하면 이것은 다시 질적변화가 양적인 변화를 또 초래할 수도 있다. 여러 원소로 만들어진 화약이 폭발하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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