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도 먹을 권리 있다
2012. 10. 29. 23:03ㆍ경영과 경제
[경제]일하지 않는 자도 먹을 권리 있다
ㆍ‘기본소득’ 복지논쟁 새 화두로…“사회구성원 기본생활 보장 임금 지급하자”
지난 4월 18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시에서 만난 에두아르도 수플리시 노동자당(PT당) 상원의원. 수플리시 의원은 이날 상파울루주 캄파나스, 파울리니아, 아메리카나 등 3개 도시를 순회하며 기본소득(Basic Income)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매주 회사, 학교, 노동조합에서 강연 등을 통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취업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일정 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는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제기된 개념으로 현재 나미비아, 브라질 등 몇몇 국가에서 실험을 진행 중이거나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수플리시 의원은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으로 브라질 사회에서 ‘기본소득 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공동의장인 칼 와이더퀴스트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본소득에 관한 서한도 직접 전달했다. 지난해 1월에는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2004년 1월 8일 ‘시민기본소득’의 창설을 정한 브라질 연방공화국의 제10835호 법이 룰라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됐다. 룰라 대통령은 법안 승인식 연설에서 “우리의 임무는 이 법률을 기능하는 법률로, 실행되는 법률로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질에는 ‘실행되는 법률’과 ‘실행되지 않는 법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법은 여전히 ‘실행되지 않는 법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상파울루주 산투 안토니우 두 핀할이라는 도시에서 기본소득 법안이 시 의회에서 승인된 뒤 재원 마련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부 신자유주의자들도 지지
기본소득은 무상급식을 계기로 촉발된 한국 사회의 복지논쟁 한편에서 학계와 일부 진보진영으로부터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화두다. 물론 재원 마련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한 대안”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또 “내수시장 활성화를 위한 일시적인 보조금 지급이나 케인스주의적 타협으로 회귀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전 세계적 흐름이 인류가 이전보다 일을 덜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생산력이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고민해봐야 할 화두라는 지적이다. 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어떻게 공유할지를 전향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기본소득을 일부 좌파들만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일의 생활용 화학제품 체인업체 데엠(DM) 회장인 괴츠 베르너는 2006년부터 직접세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을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 기본소득일본네트워크에 따르면 일본에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들과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기본소득 논의를 지지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기존의 복지담론과 가장 차별적인 부분은 임금노동(고용)과 소득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무노동 무임금의 가치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왜 이 두 가지를 떼어놓자는 것일까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공식적으로 회사에 취직해 월급을 받는 것만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자주 거론되는 사례가 ‘지식iN’이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가 제공하는 지식iN은 ㈜NHN이 플랫폼만 깔아두었을 뿐 알맹이는 네티즌들의 소통이 채우고 있다. ㈜NHN에 ‘고용’되지 않은 네티즌들이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네이버 지식iN 검색은 사용자들이 올린 지식이 많아질수록 좋아진다”며 “말하자면 사회적인 생산력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기본소득 필요성은 커진다”고 말했다.
결국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몫을 돌려주자는 게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자연스럽게 고용과 소득의 고리는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본소득은 1998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제시하며 주장한 ‘근로 연계 복지’(일을 해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된 복지제도)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DJ 정부가 표방한 ‘생산적 복지’ 역시 근로 연계 복지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4월 23일 ‘2011년도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해 “생산적 복지, 일하는 복지”를 주문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근로 연계 복지라는 말 자체를 형용모순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노동’이라고 인정해주는 일을 해야만 소득과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징벌적이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활동 보장
기본소득운동은 최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고 이진원씨,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 등의 죽음 이후 예술노동에 주목하고 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2011년, 젊은 예술인의 죽음에 부쳐’라는 성명에서 “복지가 선별적·잔여적으로 남는 한,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고귀한 활동들인 예술노동,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며 “‘복지’라는 말이 임금노동이 아닌 다른 활동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난 4월 27일 서울 홍익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에서는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문화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기본소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음악가 단편선씨(본명 박종윤)가 이날 한 웹진에 기고한 글의 일부 요지를 소개했다. “‘음악’의 자율성을 가능한 한 추구하는 동시에 ‘음악가’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소득을 지급하는 제도’ 즉 ‘기본소득’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han.co.kr
지난 4월 18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시에서 만난 에두아르도 수플리시 노동자당(PT당) 상원의원. 수플리시 의원은 이날 상파울루주 캄파나스, 파울리니아, 아메리카나 등 3개 도시를 순회하며 기본소득(Basic Income)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매주 회사, 학교, 노동조합에서 강연 등을 통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인 에두아르도 수플리시 브라질 상파울루 주 노동자당 상원의원(왼쪽)이 2010년 1월 27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기본소득이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취업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일정 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는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제기된 개념으로 현재 나미비아, 브라질 등 몇몇 국가에서 실험을 진행 중이거나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수플리시 의원은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으로 브라질 사회에서 ‘기본소득 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공동의장인 칼 와이더퀴스트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본소득에 관한 서한도 직접 전달했다. 지난해 1월에는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2004년 1월 8일 ‘시민기본소득’의 창설을 정한 브라질 연방공화국의 제10835호 법이 룰라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됐다. 룰라 대통령은 법안 승인식 연설에서 “우리의 임무는 이 법률을 기능하는 법률로, 실행되는 법률로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질에는 ‘실행되는 법률’과 ‘실행되지 않는 법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법은 여전히 ‘실행되지 않는 법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상파울루주 산투 안토니우 두 핀할이라는 도시에서 기본소득 법안이 시 의회에서 승인된 뒤 재원 마련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부 신자유주의자들도 지지
기본소득은 무상급식을 계기로 촉발된 한국 사회의 복지논쟁 한편에서 학계와 일부 진보진영으로부터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화두다. 물론 재원 마련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한 대안”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또 “내수시장 활성화를 위한 일시적인 보조금 지급이나 케인스주의적 타협으로 회귀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전 세계적 흐름이 인류가 이전보다 일을 덜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생산력이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고민해봐야 할 화두라는 지적이다. 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어떻게 공유할지를 전향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기본소득을 일부 좌파들만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일의 생활용 화학제품 체인업체 데엠(DM) 회장인 괴츠 베르너는 2006년부터 직접세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을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 기본소득일본네트워크에 따르면 일본에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들과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기본소득 논의를 지지하고 있다.
4월 27일 서울 홍익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에서는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 기본소득네트워크 제공
기본소득론자들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공식적으로 회사에 취직해 월급을 받는 것만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자주 거론되는 사례가 ‘지식iN’이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가 제공하는 지식iN은 ㈜NHN이 플랫폼만 깔아두었을 뿐 알맹이는 네티즌들의 소통이 채우고 있다. ㈜NHN에 ‘고용’되지 않은 네티즌들이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네이버 지식iN 검색은 사용자들이 올린 지식이 많아질수록 좋아진다”며 “말하자면 사회적인 생산력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기본소득 필요성은 커진다”고 말했다.
결국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몫을 돌려주자는 게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자연스럽게 고용과 소득의 고리는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본소득은 1998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제시하며 주장한 ‘근로 연계 복지’(일을 해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된 복지제도)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DJ 정부가 표방한 ‘생산적 복지’ 역시 근로 연계 복지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4월 23일 ‘2011년도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해 “생산적 복지, 일하는 복지”를 주문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근로 연계 복지라는 말 자체를 형용모순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노동’이라고 인정해주는 일을 해야만 소득과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징벌적이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활동 보장
기본소득운동은 최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고 이진원씨,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 등의 죽음 이후 예술노동에 주목하고 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2011년, 젊은 예술인의 죽음에 부쳐’라는 성명에서 “복지가 선별적·잔여적으로 남는 한,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고귀한 활동들인 예술노동,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며 “‘복지’라는 말이 임금노동이 아닌 다른 활동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난 4월 27일 서울 홍익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에서는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문화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기본소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음악가 단편선씨(본명 박종윤)가 이날 한 웹진에 기고한 글의 일부 요지를 소개했다. “‘음악’의 자율성을 가능한 한 추구하는 동시에 ‘음악가’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소득을 지급하는 제도’ 즉 ‘기본소득’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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