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과 정주영

2012. 12. 29. 07:13경영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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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⑥]
현대 정주영 VS 삼성 이병철
한국 경제부흥의 쌍두마차
박상하|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 저자 psangha1215@hanmail.net

두 사람의 말씨 또한 그런 인상만큼이나 큰 차이점을 나타냈다. 이병철의 화법은 대단히 신중했다. 예컨대 돌다리를 두들겨본 뒤 건너가는 사람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금 자신이 두들겨보고 나서야 비로소 건너가는 식이었다. 따라서 어눌하다고 할 만큼이나 말수가 적었으며, 충분히 숙고한 뒤에라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눌한 말씨와는 달리 상대의 말을 매우 정확하게 들을 줄 알았다. 화자의 발언을 분석해 요지를 정리하거나, 논점을 제시해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장단 회의를 주재할 때나 업무상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적에도 단번에 좌중의 흐름을 이끌어가곤 했다. 최고의 웅변은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노자의 말처럼 이병철의 말씨는 이처럼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정주영은 돌다리를 건너가면서 비로소 생각하고 입을 여는 쪽이었다. 할 수 있다는 일말의 확신만 들면 그는 곧장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왜 돌다리를 건너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단 건너가면서 확신이 어떻게 들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자연스레 말이 장황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격 또한 극명하게 엇갈렸다. 정주영은 자신이 그린 청사진을 속에 담아두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또한 그 방향으로 직원들을 끝까지 이끌고 갈 정도로 열정과 배짱이 두둑했다. 반면 이병철은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했으며, 무엇보다 빈틈없이 엄격했다. 또 멈춰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명확히 구분하려 애썼고, 놀라울 만큼 감정 조절을 잘했다. 언뜻 섬세해 보이면서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담함이 공존했다.

요컨대 정주영과 이병철은 직선과 곡선, 단순과 복잡, 목적과 방법, 끈기와 재치, 우직함과 예민함, 저돌성과 신중성, 대범함과 섬세함, 행동 우선과 생각 우선, 경험 중시와 직관 중시로 대별해볼 수 있다. 또 이같이 크게 엇갈리는 두 인물의 성향은 경영철학과 기업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시끌벅적 vs 고독한 외톨이

두 사람은 성장 배경도 확연히 달랐다. 정주영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고향은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었다. 결국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네 번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인천 부둣가의 하역 일꾼, 고려대 신축 공사장의 막노동꾼, 풍전 엿공장 직공 등을 거친 뒤에야 왕십리에 자리한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고 2년여 뒤에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주인에게서 쌀가게를 물려받는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쌀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었고, 손에 쥔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밑천 삼아 지인과 함께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었다.

8남매 중 장남이던 정주영은 이때부터 부모님과 동생들을 고향에서 불러올렸다. 식구가 늘자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의 비좁은 셋방에서는 더는 살 수 없었다. 돈암동에 20여 평 남짓한 집을 새로 얻었으나 20명의 대가족이 살기엔 돌아눕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정주영은 아침밥상에 김치 한 가지와 국 한 대접을 고수했다. 공장 직원들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기에 절약하는 모습을 솔선해서 보여준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공장 직원들의 식사를 돈암동 집에서 만들어 매일같이 신설동 공장까지 머리에 이어 날랐다. 돈암동 집은 언제나 장터처럼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와 가족들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저마다 꿈을 키워나갔다.

이와 달리 이병철은 부유한 집안의 4남매 가운데 막내아들로 자랐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는 친구가 없는 외톨이로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13세에 경남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6세에 서울 수송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 이듬해 아버지를 졸라 서울 중동중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그는 중동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인 20세 때 새로운 세계를 찾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에는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지독한 감기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2세에 학업을 중단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혼 풍습에 따라 19세에 결혼한 그에게는 당시 이미 처자가 있었다. 가족을 어떻게 건사할까 고심하던 끝에 그가 결심한 것이 사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만 원(지금 돈 약 12억 원)으론 턱없이 모자라 지인 둘과 합자해 3만 원 규모의 정미소를 창원에 열었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으로, 이병철은 정미소 사장으로 각기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보리 잔디 vs 年17배 성장

8·15 광복 이후 정주영은 미군정으로부터 적산(敵産) 토지 일부를 불하받아,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이어 현대건설사를 세웠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모든 것을 잃고 부산 피난길에 오른다. 각지에서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건설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 미군 숙소와 군수물자 집하장 건설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고 그랬는지 아우 정인영이 때마침 미군사령부 맥칼리스터 중위의 통역으로 배치되었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인영에게 건설업자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주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주영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어느 분야인가?”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소.”

“그럼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겠는가?”

“물론 만들 수 있고 말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