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오늘의 인물

"우린 에베레스트 정상 8848m보다 1m 더 높이 올랐다"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비화 전한 당시 원정대장 김영도씨조선일보|채성진 기자|입력2012.12.31 10:12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 해발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고상돈의 무전이 베이스캠프를 울렸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대원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부둥켜안았다. 무전기를 쥔 김영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세계 8번째 등정국 영예를 조국에 안겼다는 감격이 벅차게 밀려왔다. 그로부터 35년, 당시 쉰셋이던 김영도(88)는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도전, 정복….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 단어지. 요즘 젊은이들도 그럴까."

↑ [조선일보]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고상돈. 왼쪽 아래에 눈에 파묻힌 삼각대 끝이 보인다. ‘8848+1m’에 올랐다는 증거다.

↑ [조선일보]‘영원한 원정대장’ 김영도가 1977년 에베레스트에서 사용한 목제 아이스 피켈을 들었다. “도전, 정복….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 단어지.” 피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도전 끝에 오는 진한 감격이 있어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했다. / 허영한 기자

경기 의정부 김영도의 자택 서재에는 세계 각지 고봉(高峰)에 관한 자료와 불가능에 도전했던 산악인들의 저서가 가득했다. 책상 위엔 이탈리아 산악인 발터 보나티의 '내 생애의 산들'이 놓여 있었다. 미수(米壽)가 되도록 번역과 저술을 쉬지 않는 그가 지난달 내놓은 번역서다. 서재엔 에베레스트 원정 때 사용한 프랑스제 아이스 피켈이 훈장처럼 걸려 있었다. 손때 묻은 목제 손잡이가 반들반들했다.

"초등(初登)이란 말, 가슴 뛰지 않아?"

―이번에 열일곱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나의 에베레스트',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가'까지 6권을 썼고,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 같은 책 7권을 번역했지. 편저까지 합하면 그쯤 되겠어. 이번에 번역한 보나티 책은 꼬박 8개월 걸렸지.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2008년 잃고 꽤 오랫동안 번민했어. 그러다 마음 다잡고 매달린 책이야. 산에 가고, 산에 대한 책을 읽고, 산 체험을 글로 써야 완벽한 산악인이 되는 거지."

―시작이 이렇지요? 산은 나에게 처음부터 자아를 실현하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렇지. 결국 등반이란 고소(高所)를 지향하는 열정이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야. '초등(初登)'이란 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아? 위대한 등반가들은 '어떻게' 오르는가가 아니라 '왜' 올라야 하는가를 고민했지. 높이(altitude)보다 산을 만나는 태도(attitude)가 중요한 거야. 건강 챙기러 그냥 산에 다닌다는 말이 나는 싫어."

책장을 넘기는 김영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니까 1977년 우리는…" 얘기는 어느새 35년 전, 눈 덮인 에베레스트로 거슬러 올라갔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죠.

"상돈이 등정 때도 감격스러웠지만, 난 박상렬이 살아 돌아왔을 때 더 울컥했어. 1차 공격조로 보냈는데 8740m에서 폭설을 만난 거야. 셰르파였던 앙 푸르바가 무전을 때렸어. '노 옥시전, 아이 다이(No oxygen, I die·산소가 떨어졌다. 죽을 것 같다).' 상렬이는 쓰러져 대답이 없었지. 영하 40~50도에 바람까지 불었으니 체감온도가 어땠겠어. 슬리핑백과 식량은 없고, 산소는 없고. 나는 이 말만 했어. '유 머스트 컴 다운(You must come down·반드시 내려와라)."

―무전할 힘도 아끼라고 간단히 끊었군요.

"맞아. 다음 날 저녁, 무전에서 고상돈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지. 상렬이가 갔구나 싶었어. 어떻게 된 거냐 다그쳤더니 상렬이가 살아 돌아와 너무 반가워서 울었다는 거야. '야, 인마!' 그때처럼 상돈이에게 큰소리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상렬이가 6500m 베이스캠프로 귀환하자 대원들이 얼싸안고 환영했지. 난 텐트 밖으로 안 나갔어. 화나고 고맙고 기쁘고…. 그냥 눈물만 펑펑 흘렸어."

"우리는 8848+1m에 올랐다"

―그래서 고상돈에게 기회가 왔군요.

"처음엔 한정수도 함께 보내려 했는데, 대신 경험 많은 펨바 노르부를 셰르파로 붙였어. 마지막 기회였거든. 산소가 모자라 더 버틸 수도 없었어. 프랑스제 산소통 50개의 주입구 직경이 마스크 연결 커넥터와 달라 쓸 수가 없었어. 아찔했지. 근데 아이스 폴(빙폭) 정찰 나간 대원들이 프랑스제 산소통을 13개나 주웠다는 거야. 사이즈가 맞는 제대로 된 걸로. 천우신조(天佑神助)! 고상돈이 정상 정복할 때 쓴 산소통이 이거였다니까. 기막히지."

―8849m에 올랐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고상돈이 무전을 받고 다들 좋아서 날뛰는데, 한정수가 등정 고도가 8849m라고 해. '무슨 헛소리냐'며 웃고 말았는데, 나중에 확인했더니 그 말이 맞는 거야. 고상돈이 만세 부르는 사진에 중국 원정대가 심어 놓은 삼각대가 보이는데. 꼭지 부분만 빼고 눈에 다 파묻혀 있어. 다른 원정대 사진에선 삼각대 전체 모양이 다 보이거든. 그러니 우리가 1m 더 높이 오른 게 맞는 거야."

―이듬해 북극 탐험대를 꾸렸지요.

"에베레스트 정복 이후 극지 도전 열풍이 불었지. 한 신문사에서 막무가내로 남극에 도전하자고 해. 나는 못 간다고 했어. 준비도 충분히 안 됐는데 급하게 갈 순 없잖아. 거기가 놀러가는 곳도 아니고. 쇄빙선 임차도 쉽지 않았어. 그렇게 석 달을 끌다가 '대신 훈련 삼아 북극에 가자'고 합의 봤지."

―등반과 횡단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히말라야가 수직의 세계라면 북극은 수평의 세계야. 고산병은 없지만 끝없는 설원을 달리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지. 육분의(六分儀)로 측량하면서 달렸어.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그땐 어디 그랬나. 400㎏의 썰매를 에스키모 개 15마리가 끌었어. 개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그린란드를 달렸지. 북위 80도까지."

가슴속에 묻은 대원들

에베레스트 원정을 한 해 앞둔 1976년 2월 16일, 대원들이 훈련하던 설악산 공룡능선 골짜기에 폭설이 쏟아졌다. 대원 6명이 눈사태에 파묻혔다. 박훈규 등 3명은 구조됐지만 최수남·송준송·전재운 등 3명은 사흘 뒤 시신으로 발견됐다.

"대원을 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최수남은 아내와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지. 나머지 둘은 총각이었고.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다들 에베레스트는 물 건너갔다고 했지. 나는 아니었어. 희생을 이기고 넘어가야 한다며 밀고 나갔지."

―기억에 남는 대원은 누구인가요.

"지옥을 뚫고 살아온 박상렬, 그리고 정상에 선 고상돈. '불사조' 박훈규의 끈질긴 생명력도 잊을 수 없어. 훈규는 석유 초롱 운반 같은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지. 출렁거리고 냄새 나서 다들 피했지만, 걔가 꼭 그걸 챙겼어. 에베레스트에는 합류하지 못했지. 설악산에서 죽다 살아난 뒤 말리는 홀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던 거야. 그러다 1979년 고상돈과 북미 최고봉 매킨리 정복에 나섰지. 몇 개 팀이 초등 경쟁을 벌였어. 해발 6194m 정상에 올랐지만 하산 길에 빙벽에서 추락! 고상돈과 이일교는 목숨을 잃었지만 훈규는 기적적으로 살았지. 참, 상돈이가 출국 사흘 전 연맹 사무실에 찾아온 게 생각나. '에베레스트 성공했다고 매킨리를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 후방에서 상황 잘 판단하고, 후배에게 꽃을 안겨줘라' 했어. 그게 마지막이었지. 산악인 운명이라는 게…."

―셰르파들과의 인연도 남달랐을 텐데.

"셰르파의 우두머리를 사다(sirdar)라고 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간 사람만 자격이 있어. 라쿠바 텐징은 이탈리아 원정대와 정상에 올랐는데, 사람 품성이 아주 좋았지. 고상돈과 정상 정복한 펨바 노르부는 나중에 한국에도 왔어. 가장 아쉬운 건 앙 푸르바야. 체력이 대단하고 집념도 있었지만 정상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곤 했지. 박상렬에게 붙여준 것도 이번에는 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끝내 안 됐어."

1924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김영도는 평양에서 자랐다. 해방 후 혼자 38선을 넘어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철학과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에 지원해 보병 17연대에 배속됐다. 1950년 9월 14일 경주 사방리 형제산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학도병 60명 가운데 그의 동생을 포함한 40명이 전사했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통역 장교로 선발됐고 대위로 예편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강사 시절에는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가르쳤다. 성동고 교사로 5년여 근무하다 정당인으로 인생행로를 틀었다.

―공화당 사무국에 오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기관인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시작했지. 민주공화당 창당(1963년) 직전이야. 당에서 10여년 일하며 선전부장과 기획조정실장, 사무차장을 지냈어. 1973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6년 활동했지."

―산악계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난 전문 등산인은 아니야. 지리산 천왕봉,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적도 없거든. 근데 공화당 시절 오치성 사무총장이 불러. 대통령 선거도 다가오니 국민들 관심을 끌 만한 뭔가를 하라는 거야. 산장(山莊)이 필요한 것 같아 전국 명산에 30여동을 지었지. 이게 소문이 나서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이 됐어."

8000m의 윤리

알피니즘이 상업주의에 오염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은데.

"장비가 발전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고어텍스가 없던 시절, 산악인들은 혹독한 추위와 싸우고 그걸 극복하면서 등반의 진짜 의미를 찾았지. 도전 끝에 오는 진한 감격, 인생은 그런 순간이 있기 때문에 살 만한 거야. 정복한 봉우리가 몇 개인지, 얼마나 빨리 올랐는지가 뭐 그리 중요해."

―피할 수 없는 위험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합니까.

"위험에 도전하는 것. 그게 등반의 정신이야. 하지만 원정대 발대식에서는 늘 이렇게 말해. '산은 도망가지 않는다. 이번에 오르지 못하면 다음에 또 가면 된다'고. 내가 생존해야 다음 도전이 있는 거잖아."

―등정 시비와 등반 윤리를 놓고 산악계가 시끄러웠는데.

"등반에는 심판도 룰도 관중도 없어. 스스로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하면 되는 거지. 등반이 먼저냐 구조가 먼저냐를 놓고도 따지지만, 원래 산악인은 외롭게 죽는 거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는 히말라야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는 말도 있어.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는 것. 그게 8000m 고지의 윤리야."

―성공한 리더였습니까.

"그런 것 같아. 난 대원들에게 믿고 맡겼어. 리더의 리더십과 조직원의 파트너십이 조화를 이뤄야 해. 리더 하나 세워놓고 이것저것 요구만 해서는 일이 안 돼. 대통령 뽑아놓고 뭐든 다 해 달라고 쳐다보기만 하지 말라는 얘기지."

김영도는 지치지 않았다. 그는 "나이로 늙는 게 아니라 이상(理想)을 잃을 때 늙는다"고 했다.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펄펄 끓는 꿈이 있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제작 협찬: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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