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 따가운 햇빛이 눈부시다. 1930년대에 지어진 화려한 모스크바의 지하철 '마야코프스키' 역을 거쳐 '바리케이트' 역 바깥으로 막 빠져나온 참이다.
소련시대에 문화예술인 아파트였던 스탈린 양식의 높다란 건물을 마주보며 지하도를 건너 '체홉의 집' 기념관에 도착한다. 나로서는 세 번째 안톤 체홉과 대면하는 자리다. 러시아의 여느 박물관에서처럼 평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 같은 할머니들이 입장권을 팔고 방문객들을 안내한다.
건물 1층 벽 '닥터 체홉'이라는 자그마한 동판 간판이 한때 이 집에 살았던 주인공의 또 다른 직업이 의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단편소설의 완성자'라는 별칭 못지않게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명성을 얻은 드라마작가 체홉의 기념관답게 아담한 공연장까지 갖추고 있다.
그의 아내는 당시 유명했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 「세 자매」, 「벚꽃 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 등 4대 장막극의 공연 포스터들, 톨스토이, 고리키, 스타니슬랍스키 등 당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던 러시아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사진들이 공연장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던 나는 모서리에 놓인 특별한 책 한 권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그의 문학 세계에만 관심을 두었더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환기에 처한 러시아사회를 고심하며 살았던 한 예민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19세기 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여행을 감행한 모험가였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내가 지난 겨울 모스크바의 시내 책방 '돔 끄니기'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바로 그 책, 『사할린 섬』이다.
아직 '소련'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살아 있던 15년 전 어느 봄날, 어머님의 눈물 이외에는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는 낯선 길을 떠나 러시아 유학을 감행해야 했던 나 자신의 외롭고 고단했던 지난 여정과 겹쳐, 나는 체홉의 그 책을 그의 은밀한 내면의 기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연히도, 그가 반겨 줄 이 아무도 없는 이방인으로서 극지 기행을 감행한 때와, 당시까지도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심장부로 내가 뛰어들었던 때가 똑같이 서른의 나이였다는 것도 이 책에 관해 색다른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무슨 야만의 환상인가!'라는 동료들의 빈정거림 속에 체홉이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으로 단신 모험을 떠난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부설되기 전인 1890년이다. 아직 젊은 나이의 그는 모스크바대학 의학부 출신 의사로서, 권위 있는 푸쉬킨 상을 수상한 촉망받는 작가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봄볕 따스한 4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역에서 머나먼 '지옥으로 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때로는 러시아의 젖줄 볼가 강을 오가는 기선을 타고, 때로는 기차와 마차로 길을 달려 광활한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의 타타르 해협을 지나 드디어 한여름인 7월 중순 사할린 섬 북부에 도착한다. 거의 석 달간의 여로였다. 정확히 석 달하고도 이틀간 이 '지옥의 섬' 조사활동을 마친 작가는 더욱 먼 길을 돌아가는 귀로에 올라 그해가 저물어가는 12월 8일 지친 심신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귀환한다.
체홉이 세상 끝에서 보고자 한 것은 무엇이며, 그 고행길을 부추긴 진정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 자신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고 반복해서 말했던 그런 중대한 여행이, 마치 언제 있었냐는 듯, 그는 고난의 시베리아 길과 사할린 섬에서 특별한 감정과 혼신의 힘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곡진한 운명에 관해 한 편의 문학작품도, 한 편의 그럴 듯한 회상기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사할린 섬』이라는 제목의 위대한 사회학적 보고서가 전부다.
19세기 중반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20세기 후반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에서 처절하게 고발했던, 그 권력의 야만과 인간의 타락에 관한 정밀한 기술이 체홉의 일차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사할린에서 본 '모든 것'에는 섬에 주둔한 정부측 우두머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접촉했던 하급 관리들, 정치범들, 유형수들의 생활과 별반 다름이 없었던 계약직 고용원들, 지옥 같은 섬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여자들, 그리고 여러 원주민들의 세밀한 일상생활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방문 면담하면서 그들의 생활환경, 건강상태, 권력당국의 조치, 유형수들의 심리 등을 꼼꼼히 조사하고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작성한다. 그 결과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남게 된 『사할린 섬』이다.
이태 전 나는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바의 문학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안톤 체홉을 만났다. 다정한 동네 의사로서,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로서, 또 안정된 가장으로서 생활했던, 사치스럽지 않지만 넉넉했던 집과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가 손수 심었던 나무들은 거목으로 자랐으며 집필실로 쓰인 건물의 발코니에는 여름 꽃들이 만발하고, 울타리를 따라 걷는 가로수길 '사랑의 오솔길'은 감미로웠다. 작가는 그곳에서 그에게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을 쓰고 직업적인 의사로서 주민들과 함께 하며, 사회사업가로서 근처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 기증한다. 그와 교류했던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빨랴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체홉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모스크바에 발을 디딘 이듬해, 그러니까 14년 전이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연방'이 탄생했지만 우리는 아직 러시아어에 서툴렀다. 그해 여름 후배와 떠난 얄타 여행은 모험이었다. 바다는 가슴 저리도록 짙푸르러 흑해라는 이름값을 했고, 해변에 누운 반라의 여인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풍경은 스러져가는 제국의 잔해처럼 어쩐지 스산했다.
그때 결핵에 걸린 체홉이 말년을 보내며 「개를 동반한 여인」을 집필하기도 했던 아담한 체홉박물관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지역 사범대학 출신 박물관 해설가 스베타의 안내로 작가의 흔적들을 구경하고 나와 거닐었던 작은 정원, 그 정원에 가득한 나무와 풀꽃들이 바로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우리 땅의 그것들과 똑같은 종류들임을 발견한 기쁨으로 흡족했던 기억이 새롭다.
조부가 해방농노였던 작가,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잡문을 써야 했던 고학의 대학생, 그리고 곤궁한 이웃들의 일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의사 안톤 체홉은 자신의 청춘을 걸고 나이 서른에 감행한 극지 여행을 단지 '문학'의 소재로만 여길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자기의 땅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가혹한 운명에 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옹호하는 전통에 선 러시아 작가로서 체홉은 오히려 건조하고 냉정한 『사할린 섬』의 기록을 통해 작가로서 당대에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명료하게 증언했던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