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산보다 좋은 투명 원유, 우리 바다서

2014. 4. 20. 17:55자연과 과학

중동산보다 좋은 투명 원유, 우리 바다서 캐낸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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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산보다 좋은 투명 원유, 우리 바다서 캐낸다

 

 

34만 가구, 차 2만 대 쓸 가스·기름 매일 우리 바다서 캐낸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4.13(일)

 

대한민국, 산유국 진입 10년 … 국산 원유·가스 채굴 현장을 가다

 
지난 7일 헬기에서 촬영한 동해-1 가스전 플랫폼의 모습.
멀리 보이는 순찰선은 동해-1에 식료품을 공급한 뒤 일주
일간 주변을 돌며 경계 임무를 수행한다. 조용철 기자
 
돌발 퀴즈. 다음 중 대한민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보기는 두 개다. ①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②산유국

주저 없이 1번에 동그라미 친 사람은 ‘땡’이다. 정답은 ②번. 우리나라는 엄연한 산유국이다.

달력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범한 날인 7월 11일은 알고 보면 대한민국 산업 역사상 꽤 의미 있는 날이다. 바로 한국이 산유국으로 인정받은 날이다. 올해는 특히 이 기념일이 10주년을 맞는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영해 내 대륙붕에서 10년 전부터 원유가 쏟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2004년 대한민국을 세계 95번째 산유국으로 만든 ‘동해-1’ 가스전, 10년째 원유와 가스가 솟고 있는 그 현장을 지난 7일 찾았다.

부산 김해공항을 이륙한 헬기는 30여 분을 날아 울산 동남쪽 58㎞ 해상에 닿았다. 사방 검푸른 물결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 노란색 철골 구조물이 작은 섬처럼 솟아 있었다. 헬기에서 해상 플랫폼으로 내려서자 초속 15m의 바닷바람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플랫폼 한쪽으로 로봇 팔처럼 뻗어 있는 불기둥이었다. 한국석유공사 박정회 해상운영팀장은 “플랫폼에 비상상황이 생길 경우 지하에서 올라오는 가스를 차단한 뒤 이미 올라와 있는 가스는 태워 없애야 직원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며 “육상 원유기지는 황 성분 같은 불순물을 태우기 위해 연소기를 켜두지만 동해-1은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목적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중동산보다 좋은 투명 원유 하루 1000배럴
동해-1은 하루 천연가스 5000입방피트(ft3), 원유(컨덴세이트) 1000배럴을 생산한다. 컨덴세이트는 천연가스가 응결돼 액체 상태로 올라오는 물질이다. 박 팀장은 “동해-1이 ‘가스전’으로 분류됐음에도 우리나라가 산유국에 들 수 있었던 건 바로 가스뿐 아니라 원유가 함께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곳 원유는 중동의 검고 끈적한 원유와 달리 맑고 투명하다. 한국석유공사 신용화 홍보팀장은 “중동산 원유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어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쳐 아스팔트·등유·벙커C유·휘발유 등으로 분해해 사용하지만 동해-1 원유는 이물질이 거의 섞이지 않은 고품질 청정연료여서 간단한 가공절차만 거치면 바로 휘발유로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스·원유는 바닷물과 섞여 올라오는데 동해-1의 해상처리시설에서 바닷물 제거 작업을 거친 뒤 직경 35.6㎝, 길이 61㎞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울산 해안가 ‘육상처리시설’로 보낸다. 육상처리시설에서는 가스와 원유를 분리한 뒤 각각 한국가스공사와 S-오일에 판매한다. 동해-1에서 공급된 가스는 현재 울산 일대 34만 가구에 매일 공급된다. 원유는 하루 2만 대 가량의 자동차 운행에 사용될 양이 공급된다. 방기열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석좌교수는 “우리나라는 대략 하루 250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기 때문에 동해-1의 생산량 1000배럴은 0.04%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영해에서 난 자원을 우리 기술로 만들어 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통상 자국 내에서 생산된 원유·가스의 경제성을 수입품의 10배로 계산한다. 그 이유는 수입대체뿐 아니라 국세를 내고 고용을 유발하며 연관산업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실제 동해-1은 지난 10년간 17억5000만 달러의 수입 대체 효과, 3만5000명의 고용 창출, 2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방 석좌교수는 “하루 1000배럴의 생산량이지만 가치로 따지면 해외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 1만 배럴과 맞먹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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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붕에서 원유와 가스를 뽑아올리는 네 개의 파이프라인.
 
동해-1은 대한민국 유전개발 기술 확보의 ‘공부방’이 돼 왔다. 가스·원유를 뽑아 올리고 있는 플랫폼은 삼성엔지니어링이 설계하고 현대중공업이 제작을 맡았다. 망망대해에서 유전이 있는 곳을 찾아내고, 시추하고, 이를 뽑아낼 설비를 만드는 실력을 확보하면서 국내 기업들은 해외 유전 개발에 운영주체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박정회 팀장은 “해외 유전에 운영주체로 참여하는 것과 단순히 지분투자를 하는 것은 향후 수익 창출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며 “유전 개발 기술과 운영 노하우 등 종합적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운영주체로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가 ‘유전 개발의 프리미어리그’라고 불리는 아랍에미리트 3개 광구 사업에 뛰어들고, 23개국 55개 석유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국내에서 장기간 유전 개발 기술을 축적했기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가스·원유의 국내 생산량에 비해 생산기술만큼은 세계적이라는 얘기다.

유전도 생명체와 비슷하다. 생명체의 수명이 건강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면 유전의 수명은 ‘경제성’에 따라 가변적이다. 원유나 가스를 뽑는 일 자체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어서다. 생산비 이상으로 원유·가스를 뽑아내는 한 유전의 수명은 존속되지만 반대의 경우 문을 닫아야 한다. 연간 뽑아낸 가스와 원유의 가치가 생산비용을 웃돌면 작업을 계속하지만 그보다 적으면 가스와 원유가 일부 남아 있더라도 접어야 한다. 손해를 보며 계속 생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해-1은 당초 2016년께 운명을 다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이런 동해-1의 운명이 3년이나 연장되게 됐다. 인근 5.4㎞ 떨어진 지점에 ‘고래-8’ 구조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고래-8의 가스·원유를 동해-1으로 끌어올리면 기존의 설비와 수송 루트를 사용할 수 있게 돼 연간 고정비가 크게 낮아진다. 이렇게 되면 동해-1의 잔존량도 더 뽑아 쓸 수 있게 되고 고래-8도 단독 개발했을 때에 비해 채굴할 수 있는 양이 훨씬 많아진다. 특히 오는 12월 20여㎞ 떨어진 곳에 있는 6-1 광구 남부 지역의 경제성이 판가름 나면 동해-1의 수명은 추가로 연장될지 모른다.

 
동해-1 플랫폼은 해수면 위 50m 높이, 3층 구조로 건평은 약 3900㎡(약 축구장 절반 크기)에 불과하다. 이 공간에서 한국석유공사 직원 22명이 근무한다. 11명씩 네 개 조가 밀어내기 식으로 2주씩 근무한다. 직원들은 플랫폼에 근무 들어오는 날을 ‘입대’, 마치는 날을 ‘제대’라고 표현한다. 해상운영팀 김태진 담당역은 “한번 들어오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쓰게 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산 설비가 ‘셧 다운’되지 않도록 유지·보수하는 데 있다. 동해-1의 하루 매출은 7억원, 설비에 문제가 생겨 하룻동안 일을 못 하면 연 매출이 그만큼 줄어든다.

 
석유공사 박정회 해상운영팀장이 맑고 투명한 국산원유를
들어 보이고 있다.
 
?소음 심해 첫 6개월은 제대로 잠 못 자?
해상 근무는 육상 근무와 여건이 많이 다르다. 해상에서는 주말이나 공휴일이 의미가 없다. 직원들은 매일 오전 7시~오후 7시 12시간씩, 14일 연속 근무한 뒤 육지에서 2주간 휴식한다. 플랫폼 철골 구조는 해수면 아래로 150m나 뻗어 대륙붕 바닥에 고정돼 있는데 파도에 따라 좌우로 20㎝가량 흔들린다. 그러다 보니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근무하는 것처럼 쉽게 피곤을 느낀다. 특히 터빈엔진 4대 중 2대가 항상 돌고 있어 소음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김 담당역은 “6개월 이상 지나야 소음에 익숙해지고 그나마 잠도 좀 잘 수 있다”고 말했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어도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본인이 상주(喪主)일 경우엔 헬기나 배를 불러 급히 뭍으로 나올 수 있지만 그마저도 기상상태가 나쁘면 불가능하다.

해상 한가운데서 생활하다 보니 안전은 가장 민감한 문제다. 바람이 초속 40m 이상으로 강하게 불거나 유전 위치가 태풍의 진로 안에 들 경우 직원들은 규정상 대피하도록 돼 있다. 동해-1 주위에는 선박 한 대가 상시 대기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이 배는 식품과 식수를 싣고 와 동해-1에 공급한 후 일주일간 주위에 머물다 다른 배와 교대한다. 순찰선은 평소엔 다른 선박들이 동해-1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업무를 맡다가 가스전 안전에 이상이 생겨 직원들이 탈출해야 할 땐 구조선 역할을 한다. 김 담당역은 “해상 근무가 고되지만 인근에 원유가 펑펑 솟아 동해-1의 기여도가 더 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울산=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