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김만배 기자, 이태성 기자, 황재하 기자, 한정수 기자] [[서초동살롱<64>]시대의 희생양, 강기훈씨의 인생은 누가 책임지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52)에게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가 14일 오전, 원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옥살이까지 한 강씨는 24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됐습니다. 해당 사건은 결국 조작이었음이 드러난 셈입니다.
사법부가 뒤늦게라도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이 남습니다. 1991년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은 강씨는 2008년이 돼서야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는데요. 대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는 데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서울고법 재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에 대한 검찰의 상고 이유를 살피는 데도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습니다. "당시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었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4장짜리 판결문이 전부였습니다.
◇ '유서대필'·'자살방조' 유죄에서 무죄로…24년간의 역사
강씨 사건의 발단은 1991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집단 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이어서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 분신이 이어졌습니다.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도 같은해 5월8일 서강대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숨진 김씨의 옷에서는 유서 2장이 나왔습니다.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해당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가 대필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강씨는 유서 대필과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습니다. 강씨는 줄곧 무죄를 주장했으나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의 형이 확정됐고 복역후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습니다.
당시 전민련 등은 동료의 자살을 부추긴 것으로 몰리며 도덕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 운동권 단체들은 혁명을 위해 동료의 자살을 방조한 파렴치한 사람들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녀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수세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이 국면을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친구 한모씨가 김씨의 노트와 낙서장 등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제출하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조사에 나섰습니다. 국과수는 뒤늦게 "김씨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과거사정리위는 2007년 "강씨가 유서 대필을 하지 않았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했습니다.
강씨는 2008년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2월 "검찰이 제출한 다른 증거만 갖고는 피고가 유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상고했고 대법원의 판단도 원심과 같았습니다.
◇ 시대의 희생양, 강씨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는 사법부
강씨에 대한 재심 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14일, 강씨의 선고를 보기 위해 수십여명이 대법원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강씨의 무죄를 확인하고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직후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은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의 사필귀정의 판단은 강기훈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모두가 함께 얻어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감격스럽다기보다는 비통할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판결 선고 후 강씨의 변호인은 "앞으로 이 사건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아니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명명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강씨 측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금 청구 등의 논의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강씨가 24년 만에 세상 앞에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1991년 당시 강씨를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던 검사와 판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당시 강씨를 기소했던 주임검사인 신상규 변호사는 고검장까지 승진한 뒤 2009년 변호사 개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장인 임대화 변호사는 과거 특허법원장을 지냈고 강씨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했던 박만호 전 대법관은 과거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특히 당시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판결 선고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또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요.
강씨는 최근 간암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 법정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법부와 당시 관계자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24년간 억울한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온 사람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요. 사법부는 자신들의 과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김만배 기자 mbkim@mt.co.kr,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황재하 기자 jaejae32@mt.co.kr, 한정수 기자 jeongsu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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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과 변호인들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씨 무죄 확정판결 기자회견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뉴스1 |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52)에게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가 14일 오전, 원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옥살이까지 한 강씨는 24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됐습니다. 해당 사건은 결국 조작이었음이 드러난 셈입니다.
사법부가 뒤늦게라도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이 남습니다. 1991년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은 강씨는 2008년이 돼서야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는데요. 대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는 데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서울고법 재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에 대한 검찰의 상고 이유를 살피는 데도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습니다. "당시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었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4장짜리 판결문이 전부였습니다.
◇ '유서대필'·'자살방조' 유죄에서 무죄로…24년간의 역사
강씨 사건의 발단은 1991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집단 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이어서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 분신이 이어졌습니다.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도 같은해 5월8일 서강대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숨진 김씨의 옷에서는 유서 2장이 나왔습니다.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해당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가 대필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강씨는 유서 대필과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습니다. 강씨는 줄곧 무죄를 주장했으나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의 형이 확정됐고 복역후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습니다.
당시 전민련 등은 동료의 자살을 부추긴 것으로 몰리며 도덕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 운동권 단체들은 혁명을 위해 동료의 자살을 방조한 파렴치한 사람들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녀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수세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이 국면을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친구 한모씨가 김씨의 노트와 낙서장 등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제출하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조사에 나섰습니다. 국과수는 뒤늦게 "김씨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과거사정리위는 2007년 "강씨가 유서 대필을 하지 않았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했습니다.
강씨는 2008년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2월 "검찰이 제출한 다른 증거만 갖고는 피고가 유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상고했고 대법원의 판단도 원심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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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청사 /사진=뉴스1 |
◇ 시대의 희생양, 강씨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는 사법부
강씨에 대한 재심 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14일, 강씨의 선고를 보기 위해 수십여명이 대법원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강씨의 무죄를 확인하고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직후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은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의 사필귀정의 판단은 강기훈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모두가 함께 얻어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감격스럽다기보다는 비통할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판결 선고 후 강씨의 변호인은 "앞으로 이 사건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아니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명명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강씨 측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금 청구 등의 논의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강씨가 24년 만에 세상 앞에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1991년 당시 강씨를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던 검사와 판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당시 강씨를 기소했던 주임검사인 신상규 변호사는 고검장까지 승진한 뒤 2009년 변호사 개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장인 임대화 변호사는 과거 특허법원장을 지냈고 강씨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했던 박만호 전 대법관은 과거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특히 당시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판결 선고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또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요.
강씨는 최근 간암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 법정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법부와 당시 관계자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24년간 억울한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온 사람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요. 사법부는 자신들의 과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김만배 기자 mbkim@mt.co.kr,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황재하 기자 jaejae32@mt.co.kr, 한정수 기자 jeongsu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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