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신영복,무히카

2016. 1. 16. 17:06정치와 사회


우리나라에도 재벌집에서 태어났지만, 
호세 무히카 처럼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고 단호박 같은 삶을 실천하시고 있는 분들을 취재한 기사가 있습니다. 
경남일보의 김주완기자님, 동서간의 갈등에서 초연하게 항상 바른 입장에서 다룬 기사들을 개제해 주었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좋은 글 이군요. 
우리 사회거 이처럼 기득권과 지도층에서부터 솔선수밤으로 
나이가 들수록 단호박 처럼 더 좋은 맛과 많은 영양가를 가진 '단호박' 인사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 합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557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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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거부하는 채현국·신영복·호세 무히카 이런 ‘단호박 할배’들은 처음이다
기사입력 2015.06.10 15: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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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둬라’는 제목의 한 인터뷰가 7만건 이상 공유되며 화제가 된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은 지난해 정우성, 손석희와 함께 ‘GQ 올해의 남자’에 선정됐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담론>에서 71세의 노교수는 상아탑 속 지식 대신 20년 동안 몸으로 깨친 수형생활의 사유를 조곤 조곤 전해준다. 그런가 하면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평전은 발간 한 달 만에 5쇄에 들어갔다. 이 세 명의 평균 연령은 78.6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헐렁한 위로 대신 머리를 치는 할배들의 ‘단호한 돌직구’에 청춘들은 더 공감하고 있다. 

우영규 시인은 신작 시집 <꼰대>에서 ‘자존이 빠져나간 껍데기’와 ‘각질 같은 아버지’라는 문장으로 ‘꼰대’를 정의한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죽어버리면서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현대사회에는 미이라 같은 어른들이 충분히 많다. 그들은 일단 “내가 젊었을 때는” “일단 묻지 말고 그냥 해”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나아졌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한 후 막상 말하면 화를 낸다. 이는 얼마 전 한 일간지가 소개한 ‘2030세대가 꼽은 꼰대의 특징’들이다. 스스로 멘토를 자처하다가도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만의 가치관과 비합리적 독설로 후배들의 기를 꺾어놓는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진짜 어른’을 위한 젊은이들의 갈증이 깊어져만 가는 요즘, 최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와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지금 노력 안 하면 너희도 저 꼴이 된다”고 말하는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20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강의를 정리, 신간 <담론>을 펴낸 신영복 교수가 ‘네오 어르신’으로 각광받고 있다.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 무히카 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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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 저/송병선/김용호 역/21세기북스

대통령 궁을 노숙자에게 내준 채 자신은 수도 외곽의 허름한 농가에서 생활하며 28년 된 낡은 자동차를 끌고, 월급의 90%를 기부하는 대통령. 이웃들에게 ‘페페(할아버지)’로 불리는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은 기득권을 내려놓은 정치인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군사독재에 맞서 1960년대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지도자로 활동하던 속칭 ‘로빈후드’. 6발의 총상을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생존, 수차례 탈옥 시도에 살인적 고문을 받으며 13년 독방생활을 한 무히카. 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된 그는 재임기간 동안 우루과이의 경제 급성장을 이뤘으며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로 만들고, 빈곤율과 실업률을 감소시키며 퇴임 때 65%라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많은 다큐멘터리와 어록을 통해 많이 알려진 그의 평전은 발간 한 달 만에 5쇄를 기록, 1만6000부가 인쇄됐다. ‘우리도 이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라는 띠지를 두른 채 출판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는 출간한지 한 달도 안돼 누적판매량이 500권을 넘어섰고, 사회과학 분야 1위를 4주째 이어가고 있다(인터파크 도서 4월 4주). 인터파크도서 설문조사에선 ‘전 세계 대통령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호세 무히카가 32%의 표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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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피플파워)

“책임감 없는 노인들을 봐주지 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2014년 한겨레 인터뷰를 보고 무척 자존심이 상했어요. 이런 지역인물을 미처 발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죠.” 25년의 기자생활 동안 숨겨진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내는 등 역사 속에서 사람을 찾는 일을 해온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는 상기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인터뷰나 자서전에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이사장을 설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제가 전혀 기자답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짓다 온 사람처럼 순박해서 인터뷰를 허락하셨다고 해요. 하하하.” 그렇게 진행된 네 차례의 인터뷰를 묶어 펴낸 <풍운아 채현국>은 ‘자신을 훌륭한 어른이나 근사한 사람으로 그리면 불태워버릴 것”이라는 살벌한 협박(!) 아래 탄생했다. 

책 속에서 채 이사장은 완고함을 드러내는 의지나 용기가 없는 집단으로 모 노인단체 등을 정의하고, 아는 것에 포박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법을 추구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다.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걸 깨닫도록 노력 안 한 사람들,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 늙은이 돼, 그 말입니다. 저 사람들 욕할 끼 아니고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거지.” “제일 싫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체 하면서 전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귀 안 기울이는 사람. 친한 체 하고 이해하는 체 하면서.”(<풍운아 채현국> 中) 



81세의 까도남, 채현국 “난 괜찮은 어른 아니라 깡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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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맛이 사는 맛>(채현국 구술, 정운현 기록/비아북)

“세상에 나 정도 어른은 꽤 있다.” <쓴 맛이 사는 맛>에서 채현국은 괜찮은 어른으로 권정생, 박완서, 김수영 등을 추천하며, 백낙청, 리영희, 임재경, 이우환, 방배추 등 이름만 말해도 알 만한 굵직굵직한 인물들과 어울린 일화를 소개한다. ‘히피’ 개념이 있기도 전인 55년에 찢어진 고등학교 훈련복을 입고 서울대 철학과를 활보하며 선배들에게 반말을 하는 등 ‘머리 빡빡 민 깡패’로 불린 채현국. 그는 “분노하라, 이승만!”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하고, 문화예술인들과 한량처럼 어울린다. 정권홍보를 거부하고 27세에 아버지가 세운 탄광으로 들어간 그는 1970년대 흥국탄광을 비롯, 24개 기업을 운영하는 거부가 된다. “남이 아플 때 내가 그들을 못 꺼내 주면 여기 아픈 사람이 있다고 소리는 질러줘야 하지 않습니까. 같이 맞아 죽지는 못하더라도 호루라기는 불어야지요.”(‘뉴스타파’ 인터뷰 中) 

서슬 퍼런 유신 시절,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주고, 도피생활을 하던 김지하 같은 민주화 인사를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탄광사고 후 광산을 정리하고, ‘흥국통상’ 역시 직원들에게 나눠준다. 방송 속 그는 지하철에선 청년들의 자리 양보를 만류하고, 쌍화차 대신 에스프레소 더블을 즐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넘치는 결기, 호통을 치다가 애교를 부리는 유연함. 그 속에서는 휴전협정 때 자살한 큰 형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 어린 시절 사흘 내리 굶기도 했던 아픔은 보이지 않는다. 156cm의 작은 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82세 노인인 현재도 어록만은 파격적이다. “쓰레기 같은 경쟁을 따라가지 말고, 청춘이 썩지 않는 길을 택해라. 공감은 해주되 아픈 말은 해줘야 한다.”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 시대의 꿈 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 



“추함을 거부하는 마음을 뻔뻔하게 가져보자. 곧 삶조차 내버리고 갈 판인데, 못 뻔뻔할 일이 뭐가 있느냐. 임금노예로 사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이 썩은 사회에서 괜히 희생 당했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비하’를 ‘겸양’이라고 말한다. 자기 삶을 존중 안 하면서 누구 삶을 존중한다는 말인가.” (‘노회찬의 정치카페’ 中) 



빨치산 청년의 죽음을 접했던 5살, 20대에 받은 사형언도, 4.19와 5.16을 거치며 새롭게 인식한 한국사회. 유년시절부터 감옥생활까지 모두 리콜한 <담론>에서의 신영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교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작업, 식사, 세면 등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에서의 반복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팔만대장경 같은’ 교도소 생활. 책 반입이 어려운 감옥에서 좀 더 오래 책을 읽기 위해 두꺼운 동양 고전을 택했다는 그는 밤중에 몰래 건빵을 먹던 목사,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놀랍도록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장기수 노인 등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 본다. 왕따 극복에 10년이 걸리고, 험한 욕설도 주고받으며 비슷한 수준의 인격적 파탄을 보여야 하며 하는 싸움, 8대 2가 아닌 6대 4 정도로 이겨야 회복되는 교도소 내 인간관계, 떡을 받으러 3대 종교 모임을 모두 다녔던 ‘떡신자’ 신영복. 책으로 리콜한 기억은 강렬하다. 다섯 중 한 명에게 돌아가는 공탄을 기다리던 사형집행자들, 총탄이 심장을 빗겨가자 피가 흐르는 얼굴로 ‘살려달라’고 하는 수형자들, 안구 기증을 약속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신 중위님 살고 싶다’고 허리를 안아오던 이름 모를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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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1935년 사업가 채기엽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방송국(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에 입사했다. 3개월 뒤 퇴사, 아버지의 탄광 운영을 돕는다. 전국 소득세 10위 거부가 되지만 1973년, 재산을 모두 분배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뒤에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1988년부터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뒤에서 돌보고 있다. 



20년 20일 동안의 ‘나의 대학시절’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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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신영복 저/돌베게)

신영복 교수의 10년만의 강의록 <담론>이 4월 4주 베스트셀러 4위(예스24)에 올랐다. 통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검열필 편지 속에 미처 쓰지 못한 말들, 징역살이의 고달픔과 재소자의 자살 등 동료들의 사형이 집행되던 남한산성에서의 서늘한 임사체험 등이 담겨 있다. 대학 서클 여러 개가 모이면 반국가 단체가 된다는 서슬 퍼런 60년대 국가보안법의 시절, 신 교수가 ‘나의 대학시절’이라 칭하는 20년 20일 동안의 감옥생활은 출소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강의> 등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담론>은 그로부터 10년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이듬해부터 강의를 시작,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있는 동안 이어져온 25년 간의 강의를 녹취록과 강의노트를 책으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므로,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없다’는 평소 지론대로, 책을 읽다 보면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성공회대 강의실에서 이어진, ‘정답’ 대신 ‘문제’ 중심의 강의를 눈으로 듣는 느낌이다. 427페이지의 묵직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담론>이 20~30대를 불러모으는 이유는 실천 없는 이론으로 허공에 뜬 삶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온몸으로 체험했던,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실천적 사유’를 제안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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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졸.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복역한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더불어 숲><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변방을 찾아서> 등이 있다. 



[글 박찬은 기자 사진 피플파워, 비아북, 돌베개, 매경DB, 알라딘,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82호(15.06.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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