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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규 기자
단 0.2%포인트 차이였다. 미국 민주당 아이오와 경선 결과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49.8%,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은 49.6% 였다. 승자는 힐러리였다. 민주당은 “역사상 가장 적은 표 차이로 힐러리가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이겼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누구도 샌더스를 패자라 부르지 않는다.
[똑똑한 금요일] ‘대세’ 클린턴 위협한 샌더스 경제학
미 방송사인 NBC는 “경선 초기 아이오와에선 샌더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런데 샌더스 바람이 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샌더스 논쟁’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라고 선언했다. ‘다수를 위한 정치’처럼 은유적으로 자신을 암시하지 않았다.
정치판에서 솔직함은 직설적 비판을 부르는 법이다. 아니다 다를까. 워싱턴포스트(WP)가 가장 먼저 나섰다. 올 1월 하순 WP는 “샌더스는 극히 일부 미국인에게 소설 같은 상품을 파는 정치인”이라고 공격했다. 이어 경제 매체인 포브스가 나섰다. “샌더스의 철학은 고통을 공유하자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샌더스 논쟁은 바람이 됐다. 논쟁 덕분에 아이오와에서 그의 인지도가 올랐다. 단숨에 ‘굴러온 돌’의 약점이 사라졌다. 그는 2005년에야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전까진 무소속이었다. 반면 힐러리는 터줏대감이었다. 남편이 대통령이었다. 그 자신은 국무장관이었다. 샌더스가 자신의 약점을 다른 쟁점으로 덮어버린 셈이다. 바로 경제다.
샌더스 공약도 솔직하다. ‘전쟁 대신 인프라’ ‘노동자 기업 인수’ ‘월가와 한판’ 등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 시절 ‘중산층 복원’ ‘성장을 위한 도전’ 등을 내걸었다.
블룸버그통신은 “샌더스 공약을 보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또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뚜렷하다”고 평했다. 샌더스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있다. “최근 30년간 늘어난 부 가운데 절반 이상이 1% 부호들에게 집중됐다”는 얘기다. 미국 사회 최대 이슈인 불평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힐러리도 불평등을 지적하긴 한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이력과 개인 재산, 인맥 때문에 불평등 이슈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샌더스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의 ‘전쟁 대신 인프라’는 소련 공산당이 1917년 내세운 ‘전쟁 대신 빵’만큼이나 간명하다.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전쟁하는 돈으로 도로나 학교를 짓겠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은 줄 수밖에 없다. ‘노동자 기업 인수’는 별 성과 없이 고액 보수를 챙긴다는 경영자를, ‘월가와 한판’은 머니게임에만 치중하는 금융자본을 겨냥한 것이다.
샌더스는 “미국에서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 점에선 공화당 경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와 닮은꼴이다. 샌더스는 중국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며 “일자리를 중국에 넘겨줄 수 있는 무역협정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처럼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긴장할 만한 공약이다.
보수진영은 최근 좀 더 체계적으로 샌더스 공격에 나섰다. 미 금융계 목소리를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의 경제정책을 “18조 달러(약 2경1600조원)짜리 고비용 공약”이라고 지적했다.
모두를 위한 건강보험을 도입하면 15조 달러가 들어가고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데 1조2000억 달러가 든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들어갈 돈이 그렇단 얘기다. 해마다 1조8000억 달러꼴이다.
미 연방정부 한 해 예산은 3조 달러 안팎이다. WSJ 보도대로라면 연방지출 씀씀이가 50% 정도 더 늘어야 한다.
샌더스 캠프는 “기득권 언론이 의도적으로 세금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고 발끈했다. 그러곤 “18조 달러가 더 드는 정책이 아니라 절감할 수 있는 공약”이라고 반박했다.
샌더스는 돈 먹는 하마인 기존 건강보험을 폐지해 32조 달러를 절감하고 월가 금융자본의 머니게임을 억제해 증시 불안을 해소하면 공적자금 등이 줄어들어 3조5000억 달러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서를 내놓았다.
샌더스 캠프는 “절감액이 10년 동안 36조 달러에 이른다”며 “투입 금액 18조 달러를 빼고도 그만큼의 돈이 남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샌더스는 얼마나 사회주의적일까. 샌더스 공약을 보면 국영화 정책은 없다. ‘노동자들이 다니는 회사를 인수해 스스로 경영하도록 지원한다’는 공약만 있다.
포브스는 “노동자 기업 인수도 자본주의 소유를 인정하는 제도”라고 했다. 부유층에 세금을 더 물려 복지를 늘린다는 게 샌더스 경제정책의 핵심이다.
톰슨로이터는 “공약이나 경제철학에 비춰 샌더스는 1990년대 이후 유럽 좌파와 비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라고 보도했다. 유럽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요 대기업 국유화 등을 포기했다. 대신 사회안전망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상당히 온건한 쪽이란 얘기다.
그런데도 샌더스와 가까운 편(리버럴 진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달 22일 뉴욕타임스(NYT)에 쓴 칼럼에서 샌더스의 이상주의를 경계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이상론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용주의를 내세웠다”며 “루스벨트가 만든 제도는 기존 것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샌더스의 건강보험 공약 등이 기존 것을 대체하려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크루그먼은 “현재까지 샌더스가 거둔 정치적 성과는 의미 없을 수 있다”며 “그는 공화당(보수진영)의 공격 머신에 아직 노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본선에서 보수 세력이 똘똘 뭉쳐 나설 때 샌더스가 ‘브라이언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다.
브라이언은 19세기 말 민주당-인민주의 연합후보로 나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1860~1925년)이다. 그는 1896년 대선에서 윌리엄 매킨리 공화당 후보와 맞섰다.
브라이언은 “월가의 금본위제가 인류를 억압하는 황금 십자가”라고 외치며 월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브라이언은 금은본위제를 주장하며 선거기간 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역풍이 왔다. 당시 기준으로 그의 진보적인 정책에 위기를 느낀 보수진영이 총궐기했다. 보수진영은 똘똘 뭉쳐 브라이언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겼다.
실제 샌더스가 본선에 나가면 질 것으로 보는 정치 평론가가 많다. 다만 샌더스가 올 미국 대선의 최대 이슈인 불평등을 선점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WP는 “힐러리도 ‘진보 브랜드’를 차지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고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정치·경제사에 새로운 매듭이 만들어지는 형국이다. 브라이언 라이터 교수는 최근 샌더스 열풍을 ‘샌더스 모멘트(moment)’라고 불렀다. 그는 허핑턴포스트에 쓴 칼럼에서 “샌더스가 레이건 컨센서스(정치경제 패러다임)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라이터 교수에 따르면 루스벨트 컨센서스는 1930년에서 80년까지 50년 동안 이어졌다. 그사이 공화당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경제정책 등은 거의 루스벨트 것을 모방했다.
루스벨트 패러다임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집권으로 끝났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중심으로 한 공급 중시 경제정책이 주류가 됐다. 민주당 출신인 빌 클린턴이 8년간 집권했지만, 정책은 레이건의 정책과 비슷했다. 이런 레이건 패러다임이 샌더스 등장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은 3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샌더스의 후보지위 자체가 위험한 모멘트(dangerous moment)”라고 말했다. ‘돈의 지배자’인 그의 직감에 샌더스 열풍 자체가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위험해 보이는 모양이다.
DA 300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버니 샌더스는…
출생: 1941년 뉴욕 브루클린 유대계 집안
교육: 64년 시카고대학 졸업
결혼: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사실혼
정당: 72~79년 리버티유니언당 대표
2005년~ 민주당
시장: 81~89년 벌링턴시
하원의원: 91~2007년
상원의원: 2007년~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