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을 위로하는 사람들

2016. 2. 14. 06:11정치와 사회


[세상읽기]욥을 위로하는 사람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사람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위로를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줌”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따듯한 말과 행동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어떤 말과 행동이 사람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것일까?

이런 말들은 어떤가? “밥은 먹었어?”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때?”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서 꾹꾹 담아온 얘기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 봐요” “오늘 하루 어땠어? 별일 없었어? 말 안 해도 알아, 많이 힘들었구나” “인생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긴 다리를 건너면 겨울 지나듯 새 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지요”와 같은 말들 말이다.

이 말들은 모두 마포대교 양쪽 난간에 쓰여 있는 것들이다. 서울시와 삼성생명이 자살방지 캠페인으로 공동기획해 2012년 9월부터 시민들의 공모를 받아 써놓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위로의 말을 전하는 행동은 어떤가?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었을까?

이 캠페인은 해외 유수 광고제에서 수십차례에 걸쳐 상을 받는 등 크게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2월11일자 세계일보 기사 “‘생명의 다리’ 위로가 독이 되다, 마포대교의 눈물”에 따르면 역효과가 났다. 캠페인을 벌이기 이전보다 투신자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2011년 11명(사망 5명)이었던 투신자가 2012년 15명(사망 6명), 2013년 93명(사망 5명), 2014년 184명(사망 5명)으로 폭증한 것이다. 서울의 한강 다리 29개에서 2014년 한 해 투신(시도 포함)한 사람이 396명(사망 11명)인데, 그 절반 가까이(46.5%)가 투신 장소로 마포대교를 선택했다. 결국 서울시와 삼성생명은 지난해 연간 1억5000만원 수준인 운영비 지원을 중단했고 위로문구 조명을 껐다.

‘욥을 위로하는 사람들.’ 상대를 위로하다 오히려 상처를 주는 자들을 가리킨다. 구약의 욥기에 나오는 이들이다. 욥은 신앙심이 깊은 부자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재산과 자식을 잃고 심한 병에 걸려 자신의 태어남마저 저주할 정도로 고통받는다. 이때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위로한다며 찾아와 목청을 올려 신에 앞서 말한다. 모든 게 다 너의 잘못 때문이라고. 그러니 벌을 달게 받고 신께 용서를 빌라고. 너의 정직함을 인정받으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이라고.

이들은 욥에게 결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자신의 경험과 과거의 전례와 교리에 기대어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욥을 탓하며 진부한 훈계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욥과 함께 있지도, 욥의 고통을 조용히 들어주지도, 욥을 여전한 친구로 대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마포대교’가 딱히 욥의 친구들처럼 굴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찾은 이들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벗의 부재와 빈털터리에 혼자인 자기를 확인시켜줬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흐르는 강물 위에 덩그러니 놓인 다리 위에나 와서야 누가 해주는 것인지도 모를 위로를-듣는 것도 아닌-눈으로 읽어야 하는 자신을. 그래서 한층 더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굳이 마포대교를 찾아 투신하는 사람이 유독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괴로움과 슬픔을 극한으로 몰고가 미련없이 세상을 등질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 어디서도 받지 못하는 위로를 그런 식으로나마 접해보고 떠날 수 있어서일까?

모르겠다. 다만 이런 바람을 가져본다. 위로, 사람이 ‘직접’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서로 꼬옥 부둥켜안고 “그래, 그래” 하며 괴로움과 슬픔을 그냥 쓰다듬으며 존중해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괴로움과 슬픔을 참아내고 이겨내고 잊어야 할 것이 아닌, 자유롭게 표현하고 나눠 가질 마음과 살림의 징표로 살피고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정치권이 총선 준비로 한창 바쁜 지금, 묻자. 정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대표하기’를 통해서. 그런데 대표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뭘까? ‘재현’이다. 스스로 ‘상처받은 자의 역’을 맡아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다. 욥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욥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고통의 근원을 진정 없애고자 할 것이다. 그저 욥을 위로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욥 그 자신인지 ‘절대주권자인 신’의 눈으로 지켜보고 심판할 일이다.


'정치와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엔 대북 제재 결의  (0) 2016.03.03
영남패권주의, 홍세화 선생님께  (0) 2016.02.15
왜 대북정책은 실패하는가  (0) 2016.02.12
북핵 5자회담  (0) 2016.02.06
유럽과 동북아  (0) 201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