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로의 여명 시기 역시 숱한 현인들이 최선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절정의 사상들을 제시했다. 2016년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출간 500주년을 맞는 해다. 이 책은 ‘유토피아’라는 말과 함께 근대 이후 인류에게 ‘이상주의’ ‘이상적 정치공동체’의 시원 모델로 불려왔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일반적 해석처럼 비현실적 이상주의나 완전한 이상국가 철학이 아니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가난과 수탈에 찌든 조국의 현실에 대한 현실적 개혁 방안이었다. 즉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이며, 총체주의가 아니라 부분주의였다. 그는 유토피아를 ‘최적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노예·용병·식민지 전쟁을 말하는 부분을 보면 『유토피아』가 이상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핵심 내용을 보자. 세습이 아닌 인민의 결정에 의한 군주 선택, 폭군 방벌, 상향식 민주제도와 국가 운영, 공공 사안에 대한 공적 결정의 유일 정당성 강조와 사적 결정 엄금, 6시간 노동, 공동 식사 등 그가 제시한 ‘당시의’ ‘꿈같은’ 유토피아는 ‘훗날’ ‘실제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이 중 무엇이 허구이고 이상주의인가? 재산 공유 주장을 이유로, 『유토피아』를 급진 이상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좌파 공산주의와 우파 보수주의의 곡해가 아닐 수 없다.
세습의 부정과 인민의 지도자 선출은 이제 보편현실이 되었다. 폭군 방벌은 근대성과 근대 시민혁명의 골간이었다. 공적 결정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요체였다. 오늘날 유럽연합 15개 국가의 노동시간은, 전체 1일 연평균은 4.8~4.9시간, 근로일 연평균은 6.8~6.9시간이다. 즉 유토피아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공동 생활’ 단위를 갖는 거의 모든 공동체에서 실시되던 공동 식사는 유치원·학교·대학·교회·병원·직장에서는 이미 일상이다.
마을에서 출발하는 모어의 구상은 인류의 빛나는 ‘최적 공화국’ 현실을 표상한다. 플라톤은 최적 정치 단위 규모를 5040명으로 말한다. 노자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서로 옮겨 다니지 않을 정도의 작은 나라와 적은 백성(소국과민·小國寡民)을 제안한다. 이상적 도시국가로 해석돼 온 폴리스의 실제 크기는 정밀 연구에 따르면 최소 1000명(대략 1250명)에서 도시 기준 최대 2만 명 사이였다.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미국 건국의 교부 토머스 제퍼슨은 모어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면’을 완전한 ‘기초공화국’으로 삼아 ‘군 공화국’ ‘주 공화국’ ‘연방 공화국’으로 상향 구성을 추구한다. 놀랍다. 마을 자치와 자율에서 출발하는 대의민주주의다. 최적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 미국 기초공화국의 평균 인구는 2000~3000명이었다. 간디 역시 판차야트라는 70만 개 마을을 ‘공화국’(판차야트)으로 삼아 타르카(20개 마을)→지역→주→전 인도 판차야트를 상향식으로 구성한다.
유토피아는 이상국가가 아닌 현실적 최적 공화국을 의미한다. 인간의 노력에 따라 현재와 미래에 실현될 실제 정치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행복과 안녕, 자유와 평등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실천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 블로흐가 언명하듯 ‘있지-않음’이 아니라 ‘아직-아님’이다. 즉 ‘아직-아니’ 실현되었을 뿐인 현실인 것이다.
DA 300
2017년 한국은 민주화와 민주헌법 30주년을 맞는다. 2018년은 민주공화국 수립 70주년이다. 2019년은 민주공화국 헌법 도입 100주년이다. 너무도 살기 힘들어 인간 숫자 자체가 줄어드는 나라를 만든 부끄러운 우리 세대는 30·70·100주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데메 ‘마을 평민들’(demos)의 지배 체제를 말한다. 오늘의 한국에서 헌법 속의 ‘민주공화국’은 현실이 아닌 이상일 뿐이다. 100년 민주공화국 ‘이상’을 대한민국 ‘현실’로 만들 창신을 다그치자. 그것이 청년들과 약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삶터인 마을공화국부터 대한공화국을 시작하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