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17) 관리, 교육과 시험을 통해 백성을 이롭게 할 스승이 되다

2017. 7. 4. 12:16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시험과 학교는 이란성 쌍둥이

조선시대 후기 한 지역에서 열린 과거시험장 풍경. 19세기에 병풍으로 그려진 작품이다.<br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후기 한 지역에서 열린 과거시험장 풍경. 19세기에 병풍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남에게는 때론 충격이 되기도 한다.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도 그러했다. 오랜 과거 전통에다 근대 이후 마련된 갖가지 국가고시들, 우리에게는 당연하기까지 했지만 유럽인들에겐 생각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1870년대 영국이 시험으로 관리를 뽑기 시작하기 전에는 대체로 그러했다는 얘기다. 

■시험이 중국을 망쳤다! 

1840년 아편전쟁을 필두로 전통의 강호 중국은 신흥 강호 서구와 부딪힐 때마다 초라하게 패했다. 여전히 입으론 ‘서양 오랑캐’니, ‘서양 도깨비’니 하며 그들을 무시해댔지만 행동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름 서양의 장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양무운동이었다. 중국 정신은 놔둔 채 서구의 앞선 과학기술만 도구 차원에서 수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신과 분리된 행동은 얼마 가지 못하는 법, 양무운동은 처절하게 깨졌다. 그러자 정신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드디어 기회가 닿아 근대적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무술변법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수구세력의 친위 쿠데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앞선 문명을 향한 개혁이 줄줄이 쓴맛을 보는 동안 서구 열강은 중국을 야금야금 먹어갔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는 중국에서 무려 1300여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림은 1889년 10월 <점석재화보>에 실린 중국 과거시험장의 모습이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는 중국에서 무려 1300여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림은 1889년 10월 <점석재화보>에 실린 중국 과거시험장의 모습이다.

급기야 변곡점에 도달했다. 1900년 의화단 봉기가 일어나자 영국 등 여덟 열강은 이를 빌미로 2만여명의 인민을 도륙하고 베이징을 점령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다간 중국이란 문명 자체가 소멸될지 모르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중국이 이리도 허약해졌는지, 원인 분석이 다각도에서 수행됐다. 이때 과거(科擧)가 중국문명을 말아먹은 ‘원흉’으로 지목됐다. 이유는 사서오경에 대한 판에 박힌 해석을 팔고문(八股文)이란 경직된 문체에 담아내다 보니, 학문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관리는 그만큼 무능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 자락에 있는 숭양서원. 중국 4대 서원의 하나로, 송대 이후 유학의 주류였던 이학(理學)의 주요 발원지다.

중국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 자락에 있는 숭양서원. 중국 4대 서원의 하나로, 송대 이후 유학의 주류였던 이학(理學)의 주요 발원지다.

한마디로 ‘죽은 학문’을 하였기에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왔던 중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뜻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로 전환되던 시기, 유럽에서는 경이로움의 대상이 됐던 과거가 정작 그 본향에서는 문명을 망친 주범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시험과 학교의 이중주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과거는 1300여년 동안이나 채택되었다. 이것이 중국을 망친 원흉이라면,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중국은 왜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전반적으로 나쁜 제도면, 설사 도입된다고 해도 그렇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는 없다. 단점으로 인한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와 교육의 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거가 요새로 치자면 국가고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서경>에 보면 순임금이 기라는 현신에게 귀족의 자제를 모아 책임지고 가르치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경>은 정치에 관한 초창기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경전이다. 이는 이미 꽤 오랜 옛날에 군주가 교육을 직접 챙겼다는 말이다. 정치와 교육이 엮여 있었다는 뜻으로, 이러한 양상은 순임금 이후로도 이어졌다. 맹자의 증언을 들어본다. 

“상(庠), 서(序), 학(學), 교(校)를 설치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상은 기른다는 뜻이고,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며, 서는 활을 쏜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 불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 불렀으며,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불렀습니다. 학은 하, 은, 주 모두에 있었습니다.”(<맹자>)

이는 맹자가 군주에게 올린 간언의 일부다. 여기서 하는 순임금의 선양을 받은 우임금이 세운 나라이고, 은과 주는 각각 하와 은 다음에 선 나라이다. 교육을 군주가 직접 챙기는 전통은 이처럼 국가가 꼴을 잡던 시점부터 생성되어 후대로 도도하게 계승됐다. 

천자를 ‘군주는 곧 선생’이라는 뜻의 ‘군사(君師)’라 부르던 관습도 같은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어느 시기든 통치계층은 집권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했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피지배층에 실질적 도움과 이로움을 안겨주는 방식으로 이를 해소했던 셈이다. 바로 여기서 교육이 고안되고 정치의 핵으로 설정되었다. 백성에게 도움이 되려면 관리를 그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 서, 학, 교와 같은 기관에서 길러낸 관리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직접 행할 줄 알았다. 농업을 관장하는 관리는 사무실에서 농업 관련 행정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직접 논밭을 갈며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관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는, 곧 관리는 백성의 스승이라는 명제의 실상이 바로 이것이었다. 

교육은 이처럼 시작부터 관리 양성과 한 몸을 이뤄왔다. 관계(官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성적으로 수직적 등급의 세계다. 관리이든 지망생이든 간에, 이들은 피치 못하게 평가를 받아야 했다. 무엇을 얼마큼 할 줄 아는지를 파악해야 인재를 효율적으로 배치, 활용할 수 있기에 그러했다. 고대 중국의 교육을 전적으로 논한 <예기> ‘학기(學記)’에서 “격년으로 상호 비교하여 성취를 평가한다”고 못 박았듯이, 국가가 개입된 시험은 교육이 고안됐던 시점부터 늘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교가 이처럼 차세대 통치계급을 키우던 장치였던지라, 그것도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과거는 이러한 전통의 소산이었다. 당연히 다름도 있었다. 옛적 시험이 학교에 입학한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시행됐다면, 과거는 평민에게도 그 문호가 열려 있었다. 공자가 일찍이 <논어>에서 천명했던, 가르침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 정신을 실현한 셈이었다. 그러나 관리가 되고자 한다면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자신이 정한 세계관과 지식을 표준의 이름으로 관리 지망생의 내면에 심을 수 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관리가 될 수 있었음이다.

이것이 근대 초기 중국 지식인들이 과거를 중국 쇠망의 원흉으로 꼽았던 이유였다. 위정자가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면 관리 지망생들의 국정철학 공유가 문제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반대라면 위정자들만 결딴나는 게 아니라 국가가 망가져 결국 인민 모두가 도탄에 빠지기 때문이다. 반면 위정자 입장에서는 망할 땐 망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때는 분명 이익이었다. 더구나 전근대 시기 중국은 대체로 군주를 위시한 위정자들이 국가를 사적으로 소유하던 때였다. 그들에게만 장점이 많았던 과거가 국가에 크게 이로운 제도라는 외피를 입고 오랜 세월 지속됐던 것이다.

■논리와 감성, 중국을 묶어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과거라는 문명 장치가 지닌 장점이 더 있었다는 얘기다. 과거는 단지 위정자에게만 이익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전근대시기 중국이 깔고 앉아 있던 문명 조건 때문에 그렇다. 

공자는 이름값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명(正名)’론에서, 예악형벌이 일관되게 집행돼야 비로소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활에 임하게 된다고 하였다. 예악형벌은 문물제도의 다른 표현으로, 지금의 사회제도 전반을 가리킨다. 곧 사회제도가 일관되게 구현돼야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이 안정화된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현재를 살아감은 한층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다. 미래는 이렇게 현재에 늘 깊숙이 개입해있다. 하여 미래가 손에 잡혀야, 달리 말해 예측이 가능해야 현재의 생활이 유의미해진다. 힘 있는 자들이야 미래를 자기 뜻대로 만들어갈 수 있지만, 그럴 힘이 없는 이들은 미래가 예측 가능하지 못하면 현재 생활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문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건 사회적 약자에게도 이롭다. 악용의 여지를 최대치로 줄여간다면, 표준적 세계관과 지식의 공유가 문명의 안정적 운영에 쏠쏠한 터전이 될 수 있다. 과거가 사회적 약자에게도 장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대부들이 사서오경의 진리로 천하를 교화하자는 이상을 품고 과거에 응시했던 까닭이다. 더구나 근대와 같은 문명 토대의 구비가 불가능했던 시절, 표준적 세계관과 지식의 공유는 그 넓은 중국을 예측 가능한 세계로 묶어내는 데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게다가 과거는 감성 차원에서도 중국을 예측 가능한 세계로 인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왕조 내에서도 과거의 시험과목이 종종 바뀌기도 했지만, 시가 창작 역량의 평가는 빠진 적이 없었다. 당대에는 이 역량을 가장 중시하기도 했다. 이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과거는 천자의 이름을 내걸고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이다. 공평무사함을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데, 시가 창작과 같은 주관성과 감성 위주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가 창작 역량을 중시했음은, 이를 제외하고는 그 넓은 강역의 수많은 인민을 ‘감성 공동체’로 묶어낼 마땅한 문명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임금이 기더러 귀족의 자제를 가르치라고 했을 때 그 콘텐츠가 음악이었음이, 한대에 ‘미술부’ 같은 부처는 없어도 음악을 관장하는 악부가 있었음이, 오경 가운데 <시경>이 독보적 지위를 점하곤 했음이, 다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얼마 전 사법고시 폐지가 헌법에 합치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젠 법학전문원에서 법조 인력이 양성된다. 외무고시가 폐지된 후로는 국립외교원에서 외무 관료를 배출하고 있다. 학교가 시험을 대신하는 형국이다. 중국사로 치자면, 과거 이전으로 회귀한 셈이다. 세계화나 제4차 산업혁명 같은 말로 대변되는 오늘날, 관료는 한층 제고된 전문성과 수월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시험이 아닌 학교라는 형식이 이를 충족하는 데 더욱 유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일반 시민은 어떠해야 할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사회와 문명이 필요한 이상, 시험과 학교를 일률적으로 폐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형질의 전환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지니고 있는 답은 ‘학교-짓기-시험’이라는 회로의 구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지면을 달리하여 상술하기로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0281922005#csidx7be0f8b4e28279d84cd11b52aac67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