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18) 자기 생각 펼치게 하는 것이 교육…시험으론 사람을 잴 수 없다

2017. 7. 4. 12:16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사람 교육에 시험이 필요할까

로마 시대의 교실 풍경. 로마인들에게 교육은 곧 수사학이었다. 수사학은 말의 화장술이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하고, 일반 시민과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의 교실 풍경. 로마인들에게 교육은 곧 수사학이었다. 수사학은 말의 화장술이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하고, 일반 시민과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 서양에 가다 

서양 고대에는 동양의 과거(科擧) 같은 시험제도가 없었다. 이게 지난주(10월29일자)에 게재된 김월회 선생의 글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적어도 “다음 중 아닌 것은?” 따위의 시험은 없었다. 동양의 과거제도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이는 마테오 리치(1552~1610)이다. 니콜라스 트리고(1577~1629)와 함께 지은 <예수회의 그리스도교의 중국 원정기> 제1권 5장에서 리치는 “이 시험은 거의 전적으로 글쓰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힌다. 우리 귀에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들리지만, 필기시험은 당시 유럽인에게는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참고자료가 1586년 예수회에 의해 제정된 <강의편람>이다. 이 책은 16세기까지 유럽 대학의 평가 방식이 구술토론(disputatio 혹은 rigorosum)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리치 이후에 중국의 시험제도는 예찬되었고, 마침내 19세기 초반에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표준시험(standardized testing)’의 이름으로 채택된다.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동양의 과거시험과 표준시험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출제된 과거 문제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eat)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관리를 필기시험으로 뽑는다는 생각, 즉 표준시험의 도입은 명백히 중국의 관리 등용 시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표준시험! 교육 대중화에 기여하다 

현대에 표준 시험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중국 학교의 시험 장면이다.

현대에 표준 시험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중국 학교의 시험 장면이다.

하지만 구술토론을 중시하는 영국 대학들은 중국의 시험 방식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전통의 토론 방식과 학생들의 에세이를 읽고 평가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따라서 표준시험은 엘리트 교육을 목표로 하는 대학에서는 도입되지 않고, 대중교육 분야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표준시험 제도를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이 산업현장과 상업회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대량생산 체제로 운영되는 공장에서는 직원들로 하여금 단일하고 표준화된 지식과 정보를 숙지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표준시험은 어느 분야에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과 정보가 숙지되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표준시험의 도입은 소수 엘리트에게만 허용되었던 교육의 기회를 대중에게도 제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을 찍어야 하나. 표준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은 4개 가운데 단 1개의 정답을 고르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을 찍어야 하나. 표준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은 4개 가운데 단 1개의 정답을 고르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표준시험이 검증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산업혁명 덕분이었다. 전통적인 구술시험 방식이 급작스럽게 늘어난 학생들의 수를 감당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고, 표준시험이 대안으로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표준시험은 점차 영역을 확장해 나중에는 대학입시의 한 방식으로까지 도입된다. 입시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표준시험은 거침없이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한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을 거쳐 심지어 한국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표준시험이 한국에 어떻게 안착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보다 엄밀한 추적이 필요하지만, ‘수능시험’에서 보듯 표준시험이 가장 대박이 난 곳은 한국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과 누구에게나 공정한 평가 잣대를 적용한다는 점에서 표준시험의 도입은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표준시험이 의미 있는 제도라는 점에는 하등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표준시험의 위세가 대단했음에도 영국의 대학들, 나아가 서양의 대학들은 “다음 중 아닌 것은?” 같은 형식의 표준시험을 대학입시의 주요 방식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왜일까? 유럽의 대학들은 왜 표준시험에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것일까. 

■상품 생산에는 정답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표준시험이 요구하는 정답들은 공장에서 상품 생산을 위해 알아야 하는 도구적 성격이 강한 기초정보들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장에서 요청되는 경험, 기술, 정보를 폄하하려는 취지는 결코 아니다. 이것들도 절대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 역사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과 사태의 해결에 요청되는 지식과 정보, 그것들을 교육하는 방식은 표준시험의 방식으로 물어지고 검증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데에 있다. 즉 삶의 문제는 ‘고시’ 따위의 시험으로 검증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과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구성하는 지식들의 구조와, 물건과 상품을 만들 때에 동원되는 지식들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를 들어 유럽의 대학들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인 인문학의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 요컨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를 담당하는 엘리트들이 표준시험의 방식으로는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요즈음 대한민국의 이른바 고시 출신 엘리트들의 눈부신 활약상이 그 단적인 증거 사례들이니까. 

■사람의 교육에는 정답이 없다 

서양의 대학들이 표준시험을 인정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상품을 만드는 데에는 정답이 있지만 사람을 교육하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그들의 대학입시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Abitur)가 그 증거이다. 이들 시험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은 정답도 없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자기 생각과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서양 교육의 특징을 한마디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독창성과 고유성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답들이 구조적으로 혹은 원리적으로 동일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결국 유럽 대학들은 동일한 답을 요구하는 표준시험을 대학입시에 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수사학이 곧 교육 

그렇다면, 서양의 대학들이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법을 교육의 중심으로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비투어나 바칼로레아와 같은 시험제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로마시대의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수사학학교에서 실행된 모의연설연습(declamatio)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그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Declamatio라는 말은 declare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 동사는 사적인 자리에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공적 자리에서 연설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이 동사는 특히 공적인 사실을 전파하고 알리는 전령의 고유 업무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리스의 수사학이 로마의 학교교육으로 수용되면서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행위인 연설을 교육하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모의연설연습’이라는 번역은 사실 정확한 우리말 옮김이 아니다. 어쩌면 ‘자기주장교육(self-assertion education)’ 정도가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수사학과 연설에 대한 로마인들의 초기 인식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사학과 연설이 말만 공허하게 잘 꾸미도록 가르치는 아부나 화장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하고, 일반 시민과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이해했다. 즉 수사학이 곧 교육이었다. 실제로 로마의 중등교육에서 수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을 주요 교육 내용으로 제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수사학이 로마에 소개되었을 때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수사학과 연설에 대한 로마인의 반응이 냉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수사학학교’가 로마에 처음 문을 연 해는 기원전 93년이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폐교 명령이라는 철퇴를 맞는다. 이 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로마의 명연설가, 크라수스. 그는 뛰어난 변론가이자 수사학의 옹호자였다. 크라수스의 제자 키케로는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그와의 대담을 바탕으로 연설가의 본질을 서술했다.

로마의 명연설가, 크라수스. 그는 뛰어난 변론가이자 수사학의 옹호자였다. 크라수스의 제자 키케로는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그와의 대담을 바탕으로 연설가의 본질을 서술했다.

키케로(기원전 106~43년)에 따르면, “라틴어 수사학 강의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 혹은 인간이 되게 하는 데 가치 있는 학식”(<연설가에 대하여>)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혀의 훈련만 제공하고 뻔뻔함만 키우는 기술만을 가르치는 나쁜 교육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폐교 명령을 내린 사람은, 키케로의 스승으로 연설과 변론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이자 그래서 변호사를 양성하는 학문이었던 수사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크라수스(기원전 2세기 활약)였다. 키케로는 크라수스가 이런 폐교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에 당시 그 학교의 교육 방식이 공화정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고 어린 학생들의 내면세계를 메마르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수사학학교에 몰려들었던 학생들은 오로지 혀놀림을 통해서 큰돈을 벌 수 있는 변호사가 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젊은이들이 돈으로만 몰려갔던 로마 교육의 실제는 로마 공화국과 로마의 공동체 정신을 무너뜨리고 어린 학생들의 영혼을 말살하는 결과로 곧장 이어졌고, 결국 로마 공화국은 몰락하고 만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플라톤 이래로 수사학에 퍼부어졌던 비난과 힐난이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수사학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각은 그리스인들보다 로마인들이 강했다. 

■사람을 기르는 학문의 운명은?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수사학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중등교육과정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일까? 수사학을 살린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자기의 생각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 곧 수사학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공동체의 의제로 만들 수 있는 소양을 제공하는 교육과 학문이 수사학이었다는 소리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기원전 92년 폐교 사건도 실은 수사학에서 제공된 정치적인 역동성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각자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민주사회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토록 비하와 천대를 받아왔고 실제로 지금도 받고 있는 수사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저력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로서 말이다. 이것이 어쩌면 서양인들이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우리의 중학생에 해당하는 로마의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놓고 수업 시간에 자기 생각을 펼치고 서로 경쟁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으로 진격할지 말지를 고민한다. 왜냐하면 신탁이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진격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말이다.’(대 세네카의 <설득연습>) 

여기서 “당신이라면 가겠는가? 간다면 그 이유는?” 혹은 “가지 않는다면, 그 근거는?”이라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 두 물음 중 한쪽을 선택하고, 자신의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시험 문제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입장에서 주어진 신탁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했다. 지도자라면 이런 신탁을 놓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 학생들은 수사학을 통해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자신의 주장을 펴고 사안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술, 점술, 예언 따위에 대해서는 이미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로마 교육의 ‘학습목표’였다는 소리다.

이처럼 합리성에 기초한 자기 판단 능력을 강조하는 로마의 중등교육 방식이 2000여년 전의 것임에도 전혀 옛날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오늘날 미국 대학의 에세이 쓰기나 프랑스 대학의 바칼로레아, 독일 대학의 아비투어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로마의 모의연설연습에서 다루는 그것들과 교육 내용·방식에 있어서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이후에도 로마의 교육 방식은 지속될까?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사람을 기르는 데에 정답이 없는 한, 표준시험으로 사람을 검증하는 것은 분명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1041930005#csidx6bb18cccbb169f8b3b4e30e04a8ff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