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0) 오이디푸스, 자신의 범죄를 단죄함으로써 자신과 나라를 구원하다

2017. 7. 4. 12:18쿠오바디스 행로난

ㆍ국가의 뿌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고 있는 오이디푸스와 장님인 아버지를 이끌고 있는 딸 안티고네. 힐레마허(Ernest Hillemacher)의 1843년 작품이다.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고 있는 오이디푸스와 장님인 아버지를 이끌고 있는 딸 안티고네. 힐레마허(Ernest Hillemacher)의 1843년 작품이다.

“내 아들들이여, 오래된 카드모스의 새로이 태어난 자식들이여! 대체 무슨 일인가? 양털실을 감은 나뭇가지를 들고 이곳으로 몰려와서 앉아 있는가? 온 나라가 제물을 굽는 냄새와 함께 구원을 비는 기도와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있구나.”(<오이디푸스 왕> 1~5행)

소포클레스(Sophocles·497~406)가 지은 <오이디푸스 왕>의 도입부에서 오이디푸스(Oedipus) 왕이 역병으로 죽어가는 테베(Thebe)의 백성을 구원해줄 방도를 묻는 사제에게 던지는 말이다. 다음은 사제의 말이다. 

“만일 그대가 지금 통치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싶다면 텅 빈 나라가 아닌 사람들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성안도 텅 비고 배 안도 텅 비어 아무도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오이디푸스 왕> 54~57행)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답변이다.

“물론 내 마음도 나라와 나 자신과 백성들 모두를 위해 비탄해하고 있소. 그대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이 아니오.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수많은 길 가운데에서 가야 할 길을 찾고 있소이다.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를 찾아 이미 실행에 옮겼소이다.”(<오이디푸스 왕> 64~68행) 

■범인이 수사를 지시하였다 

밤에 잠도 자질 않았다고 한다. 고민 끝에 오이디푸스가 찾아낸 방도는 자신의 처남 크레온(Creon)에게 테베를 구할 해결책에 대해 퓌토의 신전에서 신탁을 구하게 한 것이었다. 크레온이 가져온 해결책은, 오이디푸스가 왕이 되기 이전에 테베를 다스렸던 라이오스(Laios)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내어 처벌해야만 테베에 드리워진 더러움(miasma)이 정화되고(katharsis), 그럴 때에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며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다음의 결기를 보여준다.

“나는 이 사건을 재수사하겠소. 진실을 기필코 밝히겠소. (…) 먼 친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에. 나는 이 나라에서 그 더러움을 찾아 반드시 추방할 것이오.”(<오이디푸스 왕> 132~138행) 

예언자 테레시아스(Teresias)가 수사의 참고인으로 소환된다. 그런데 수사를 도와달라는 오이디푸스 왕의 간곡한 요청에도 테레시아스는 뜻 모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압박에 그는 결국 이렇게 실토한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오.”(<오이디푸스 왕> 353행)

이에 오이디푸스는 분노한다. 그러자 테레시아스는 재차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오.”(<오이디푸스 왕> 362행)

■자신이 범인이라는 진실 향해 돌진하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도대체 이런 말을 듣고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아예 대놓고 자기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테레시아스의 배후를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이디푸스 왕은 그 배후에 있는 인물로 크레온을 지목한다. 이제 전선은 오이디푸스와 크레온 사이로 옮겨진다. 

“(오이디푸스) 그래도 나는 통치해야 해. / (크레온) 잘못 통치할 때에는 통치하지 말아야죠. / (오이디푸스) 오오 국가여! 국가여! / (크레온) 이 나라는 그대만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기도 합니다.”(<오이디푸스 왕> 629~630행) 

그러자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부인이며 크레온의 누이였던 이오카스테(Iocaste)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 무대 위로 오른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이쯤에서 바로 사건의 핵심으로 들어가자. 이런저런 과정 중에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을 이오카스테가 먼저 파악한다. 그녀의 간청이다.

“당신의 목숨이 소중하시다면 제발 이 일은 더는 따지지 마세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오이디푸스 왕> 1060~1061행)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막무가내다. 

“진실을 밝히지 말라는 당신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소.”(<오이디푸스 왕> 1065행)

어떤 주저도 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진실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 진실에 도달한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오이디푸스가 던진 말이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에게서 태어나서 결혼해서는 안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될 사람을 죽였구나.”(<오이디푸스 왕> 1182~1185행)

자신이 찾는 그 범인이 자신임을 실토하는 장면이다. 나라를 더럽힌 오염의 원인이 그 자신임을 자백하는 대목이다. 수사하는 자가 동시에 수사받는 자임이 밝혀지는 광경이다.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추방되어 마땅한 진범이, 나라의 오염덩어리가 그 자신임이 온 누리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오이디푸스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눈을 어머니의 가슴에서 뽑은 브로치로 찌른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말이다. 그리고 돌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추방의 길을 떠난다. 이렇게 자신이 돌보고 다스렸던 나라 테베를 떠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나라를 떠나 추방의 길에 오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드라마와는 다르다 

간단하게 묻자.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한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범인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진실을 향해 주저 없이 돌진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할 것이다. 이오카스테처럼 말이다. 주저하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태도일 것이다. 자신이 범인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물러설 생각도 수사할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처소가 역사 자체이기에 하는 말이다. 스스로가 범인이면서 스스로가 수사관이었던 이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하게 예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개는 추방되거나 축출되었기에. 그 단적인 사례가 오이디푸스였다. 

■오이디푸스는 죄인일까 아닐까?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오이디푸스는 추방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방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해서 복잡하지만, 다시 묻자. 오이디푸스는 죄인일까 아닐까? 답은 양가적이다. 물론 당연히 ‘죄인이다’. 온 나라를 더럽힌 오염의 원인이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그는 드라마의 도입부에서 자신이 내린 칙령에 따라 추방의 길에 오른다. 자신이 내린 칙령에 따라 자신이 처벌을 받는다는 점이 재미있는 대목이다. 중요한 점은 추방의 길을 택함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오이디푸스는 결과적으로 정치적인 책임도 다했다고 본다. 자신이 쥐고 있던 정치적인 권력도 내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이디푸스는 법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자신이 진범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다한 셈이다. 자신이 내린 칙령에 따라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죄인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존속살해자이면서 근친상간의 중죄를 범한 자가 죄인이 아니라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죄인이 아니다. 적어도 추방의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는 죄인이 아니다. 이미 추방의 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는 주장에 의아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죽인 이가 친부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에서 그가 범한 과오는 무지에서 벌어진 사고이지 살인의 죄목을 물을 정도의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해당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비극적 과오(hamartia)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지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여파와 결과가 나라를 파국으로 이끌 정도의 비극의 소재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소포클레스는 그를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자신의 주장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그대들에게 꼭 해야 한다면, 그 일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소. 사정이 이런즉 내가 어찌 본성이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소. (…) 설령 내가 알고서 행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오. (…) 자 내 얼굴이 보기 흉하다 할지라도 나를 멸시하지 마시오. 나는 신성하고 경건하며, 이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왔소. 그대들을 다스리는 이가 누구시든, 그대들의 주인이 나타나면, 그때는 그대들도 듣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동안에는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지 마시오.”(<오이디푸스 콜로노스> 267~291행)

인용은 장님의 추방의 초창기가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가는 곳마다 모두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고, 그를 선뜻 받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거의 성인에 가깝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그게 신의 뜻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이스메네(Ismene)가 전하는 말이다.

“(신탁에 따르면) 고향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빠를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오이디푸스 콜로노스> 389~390행) 

■아테네의 보물이 된 테베의 오물덩어리 

오이디푸스를 아테네로 모시러 온 테세우스. 지루(Jean-Antoine-Theodore Giroust)의 1788년 작품이다.

오이디푸스를 아테네로 모시러 온 테세우스. 지루(Jean-Antoine-Theodore Giroust)의 1788년 작품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땅으로 오이디푸스를 모셔가기 위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온다. 오이디푸스의 후계자였던 테베의 크레온과 아테네의 통치자인 테세우스(Theseus)가 바로 그들이다. 심지어 이 둘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아테네와 테베 양국 사이에 전쟁도 불사하지 않겠다고 으르렁댈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다툼의 최종 승리자는 테세우스였다. 오이디푸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낯선 이방의 땅인 아테네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 땅에 묻혔기 때문이다.

테베의 ‘오염덩어리’가 아테네의 신성한 보물이 되는 순간이다. 도대체 오이디푸스를 모든 악과 불행의 원인에서 모든 이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인물로 만든 힘은 무엇일까? 당연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많다. 어떤 이는 경건을, 어떤 이는 용기를, 어떤 이는 지혜를 내세운다. 모두 가능한 답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그것이 나라와 통치자 자신을 지킴에 있어서 창과 방패보다도 더 강력한 무엇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나는 그 힘이 개인적인 품성에 포함되는 어떤 덕성을 지칭하는 무엇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일까? 각설하고, 그것은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었다. 이를 혹자는 성격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지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진실을 향해 돌진하려는 용기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마주한 순간에 그가 스스로에게 징벌을 내렸고, 이를 통해서 자신을 구했다는 점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를 구원해준 비밀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를 성인으로까지 만들어준 힘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범인이고 오염덩어리라는 진실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알고 있다 해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오이디푸스는 영웅 혹은 이른바 성인의 반열에 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단적으로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범인이고,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큰 용기도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새로운 영웅이고 성인인 셈이다. 불편한 진실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 오이디푸스였다. 

■소포클레스가 테베의 오염덩어리를 아테네에 묻고자 했던 속내는?

대영박물관이 소장 중인 소포클레스 흉상.

대영박물관이 소장 중인 소포클레스 흉상.

결론적으로 한 번 더 묻자. 테베의 오염덩어리를 아테네의 신성한 보물로 격상시키려 했던 소포클레스의 진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각설하고, 그것은 진실(aletheia)의 중요함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국가란 진실을 뿌리로 삼는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의 시신을 아테네에 묻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를 묻은 곳이 어디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오이디푸스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그의 무덤은 도대체 어디일까?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깨달아야만 알 수 있다고 한 그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내 생각에, 그곳은 아테네 시민들 각자의 영혼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소포클레스가 테베의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아테네의 신성한 보물로 만들려 한 이유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뿌리는 진실이라는 소리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1181910005#csidx5870f1df2261aa6a64e70344570e5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