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2) ‘부의 신’ 플루토스가 눈이 멀자 ‘분배의 정의’가 사라졌다

2017. 7. 4. 12:19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진범은 돈이었다

부의 신 플루토스. 강력한 힘을 가진 플루토스는 제우스에 의해 눈이 먼다.

부의 신 플루토스. 강력한 힘을 가진 플루토스는 제우스에 의해 눈이 먼다.

돈은 장님이었다. 그런 돈이 한때 눈을 떴던 시절 이야기다. 이야기꾼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기원전 445~386)이다. 제목은 <부(富)의 신>(Plutos)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5세기에 필사된 <부의 신>. 현재 소엔 컬렉션이 소장 중이다.

15세기에 필사된 <부의 신>. 현재 소엔 컬렉션이 소장 중이다.

“신탁을 구하러 간 것은 외동아들을 위해서였지. 이 녀석이 살길을 바꿔 못할 짓이 없이 교활하며 불의에 능하고 양심이라고는 눈곱만치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물어볼 참이네. 차라리 그게 인생에서 성공의 지름길일 거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부의 신> 35~38행)

신탁에 따라 크레뮐로스가 집으로 데리고 간 이가 다름 아닌 부의 신 플루토스(Plutos)였다. 풍요의 신이었음에도 몰골이 영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이렇다.

“제우스가 이렇게 만들었네. 인간에 대한 악의에서. 소싯적 나는 정직하고 현명하고 점잖은 사람의 집만 방문하기로 서약했었네. 한데, 제우스가 나를 장님으로 만들었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말이야.” (<부의 신> 87~91행) 

■플루토스가 장님이 된 사연 

인용에 따르면, 플루토스는 본래 정직, 성실, 근면의 수호자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제우스는 플루토스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이후 플루토스는 사기와 기만과 협잡의 공모자로 추락하게 된다. 이에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가 다시 눈을 뜰 수 있도록 돕기로 작정한다. 크레뮐로스의 말이다. 

“(크레뮐로스) 당신이 제우스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겠소. (플루토스) 내가 말인가? (크레뮐로스) 하늘에 맹세코 그렇소. 먼저, 제우스는 무엇으로 신들을 지배하는가? (카리온, 크레뮐로스의 노예) 돈이죠. 그분이 대부분의 돈을 갖고 있으니까요. (크레뮐로스) 제우스에게 돈은 누가 대주지? (카리온, 플루토스를 가리키며) 이 양반이. (크레뮐로스)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지? 이분 때문이 아닌가? (카리온) 물론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죠. (크레뮐로스) 이분이 모든 것의 원인이니까.” (<부의 신> 128~135행)

이쯤에서 플루토스가 장님이 된 이유가 해명될 듯싶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플루토스의 의무였다. 하지만 운명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인 즉 운명이 이를 허용했다면, 사람들이 제우스보다 플루토스를 더 찾고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제우스는 노회하게 대처했는데, 돈을 늘리는 역할은 플루토스에게 주었지만 돈을 나누는 권한은 그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이것이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이유였던 셈인데, 부자가 되려는 일념에 정직하고 성실하며 근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플루토스가 아니라 자신을 찾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노회함을 통해서 제우스는 “모든 것이 돈에 복종”(<부의 신> 146행)함에도 우주의 통치자라는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한다. 중요한 점은, 플루토스가 제우스보다 더 강력한 존재이고 실은 돈이 “만사의 원인”(<부의 신> 135행)이라는 언표이다. 돈의 위력에 대한 2400여년 전의 생각이다. 비록 극중 인물에 불과한 크레뮐로스의 생각이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자본론> 혹은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1858~1918)의 <돈의 철학>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읽는 듯하다. 

■플루토스! 마침내 눈을 뜨다  

문제는 돈의 위력인데, 이에 맞서기 위해 크레뮐로스는 정의(justice)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제우스에게 잃은 시력을 다시 플루토스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설득한다. 이에 설득된 플루토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의 치료를 받고 시력을 회복한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벌어진 상황이다. 

“내 친구들인 다른 농부들을 불러줘. 그들은 아마 들판에 나가 일하고 있을 거야. 이리 와서 플루토스가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선물들 가운데 각자 자기 몫을 받아가라고 말이야.” (<부의 신> 223~226행) 

인용한 부분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에게 정의가 다시 작동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참고로,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suum cuique)”이다. 아무튼 정의가 작동되자, 급반전이 일어난다. 사기와 기만과 협잡을 이용해서 풍요를 누리던 정치가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다. 정치가의 말이다. 

“오오, 제우스와 다른 신들이시여, 저들이 이토록 나를 능멸하는데 참아야 하나요? 아아 자괴감이 밀려드는구나. 나같이 착한 애국자가 이런 창피를 당해야 하다니!” (<부의 신> 888~900행)

소위 ‘혼란’은 온 나라로 퍼진다. 돈으로 젊은 남자의 몸을 더듬었던 한 늙은 여자의 호소이다.

“들어보세요. 내겐 젊은 남자 친구가 하나 있었소. 돈은 없었지만 잘생기고 착했소. 내가 그에게 무슨 부탁을 해도 내 말을 고분고분 다 들어주었소. (…) 그는 자기가 사 달라고 하는 물건들에 대해 자신은 욕심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사달라 했다고 말하곤 그랬소. (…) 지금은 그 마음이 변했어요. 더러운 놈이에요. 변해도 완전히 변했어요.” (<부의 신> 975~995행)

젊은 남자의 추악한 반응이다. 

“참으로 오래되고 악취로 넘치는 술찌끼이오.” (<부의 신> 1086행)

돈 때문이었겠지만 한때 자신이 몸을 바쳐 충성한 늙은 여인을 부르는 치졸한 언사다. 혼란은 신들의 세계로까지 확산된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신이 헤르메스다. 이 신이 관장하는 분야가 상업이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신의 비난이다. 

“플루토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뒤로 우리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자가 아무도 없어.” (<부의 신> 1113~1114행) 

플루토스가 시력을 회복하고 난 뒤의 상황이다. 정확하게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라는 정의가 가동된 뒤의 상황이다. 한데 극장 밖으로 나와서 역사에 물어보자. 과연 역사는 정의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흘러왔는지를 말이다. 대개는 정의가 패배했다. 물론 정의가 승리했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과 같이 정의가 제대로 작동했던 사례(史例)를 들 수 있기에. 가끔은 플루토스가 눈을 뜨는 시기가 있다는 소리다. 요즘 날이면 날마다 커져가는 온갖 추문의 발원지가 결국은 돈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왕 눈을 뜬 김에 등잔 밑이 더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원인까지 밝게 비추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눈멀게 한 이유 

제우스가 플루토스의 눈을 멀게 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제우스가 관장하는 정의의 실행자가 바로 플루토스였기에 던지는 물음이다. 여기에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장님으로 만든 탓에 사람들은 대개 일상에서 정의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크레뮐로스는 돈을 그 원흉으로 지목한다. 돈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마디로 물으면 이렇다. 문명은 과연 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크레뮐로스의 말이다.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기술과 기능은 모두 당신 때문에 발명된 것이오. 어떤 사람은 문간에 앉아 구두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이며 어떤 사람은 목수이며 어떤 사람은 금세공을 하고 당신한테 금을 받지요.” (<부의 신> 160~164행) 

코메디아의 아버지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6~385).

코메디아의 아버지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6~385).

돈이 문명을 작동시키는 원리인 셈이다. 문명의 “매개(medium)”가 돈이기 때문이다. 돈과 문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도, 빵도, 예술도, 야망도, 보리빵도, 장군직도” (<부의 신> 188~193행) 모두 물리는 것이지만, 돈은 물리지 않으며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명의 비극적인 성격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명이기에. 이게 슬픈 문명의 양면성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하나 묻자. 크레뮐로스가 시도한 쿠데타는 과연 성공했을까? 실패했다. 플루토스의 눈 치료는 처음부터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에. 지면관계상,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한편으로 플루토스는 자신의 운명이 실은 오이디푸스의 그것과 같은 신세라는 점을 알아보지 못했다. 즉 각자가 자신의 몫을 향해 노력하는 것도 정의인데, <부의 신>에 등장하는 플루토스는 각자의 몫을 나눠주는 일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쟁을 용인하는 것도 정의의 기본 특성이라는 점을 놓쳤다. 결정적으로 플루토스 자신이 어떤 운동 원리에 의해서 작동하는지, 즉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인식이 없었다. 플루토스는 각자의 몫을 나눠주는 역할이 자신이 원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본원적인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플루토스는 오이디푸스처럼 차라리 자신의 눈을 다시 스스로 찔러야 할 것이다. 플루토스 자신이 구조적으로 무한 복제 내지 증폭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에. 아마도 이것이 그가 시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플루토스는 돈이 돈을 버는 문제에 대한 자기 인식을 가지지 못했기에,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돈의 자기 증식 문제가 사회적인 공론으로 상정되고, 그 심각성이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를 방증하는 것은 쉽다. 단적으로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와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방증 사례로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작금의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변동을 찬동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변동이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의 작동 방식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플루토스가 자기 운동을 통해 무한 증폭을 하는 순간, 그것은 한편으로 각자의 몫에 대한 분배 정의가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린다. 더 나아가 각자가 자신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는 활동 공간 자체를 박탈해 버리는데, 이것이 실은 돈이 돈을 버는 구조에서 연유한다. 결국 플루토스는 자신의 존재 근거 자체를 스스로 배제시켜버렸다는 소리다. 시쳇말로 인터넷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는 소위 “카지노 캐피털”이 판을 장악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기에 하는 말이다. 물론 돈은 문명의 매개 수단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존하고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 문명이 강요하는 삶의 방식(modus vivendi)이기에.

사정이 이러함에도, 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와 공간이 제공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제우스가 자랑하는 전가의 보도인 정의가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그나마 확보될 수 있는데, 어쩌면 이게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장님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돈이라는 놈이 워낙 위험한 물건이기에. 자신의 주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놈이 돈이기에. 이 대목에서 제우스의 노회함이 다시 드러난다. 적어도 제우스가 막무가내로 꽉 막힌 통치자는 아니었다. 제우스가 플루토스에게 가끔은 눈을 뜰 수 있는 시기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해서, 조금은 건너뛰겠다. 지금이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플루토스가 눈을 뜨는 시기에 정의가 작동되며 그 힘을 빌려서 정치가 복원되는데, 돈이 더렵혀 놓은 나라를, 돈이 저질러 놓은 온갖 오염들을 정화하고, 돈이 흩트려놓은 문명의 근간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제가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의무를 진 것이 정치인데, 우리 역사의 경우는 정치가 살아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평상시에는 장삼이사에 불과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여느 직업 정치인보다 더 탁월하고 똑똑한 정치인으로 깨어나서 일어난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돈으로 더럽혀진 나라를 시민들이 청소하는 일이 정치라는 소리다. 해서, 직업 정치인에게 한마디 하겠다.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 그냥 국민을 믿고 따르라고, 그것이 정도(正道)라고.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2022024005#csidx607de64f0abfa838f39fdfdd440af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