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와 행로난](21) 훌륭한 군주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2017. 7. 4. 12:18쿠오바디스 행로난

ㆍ천하위공(天下爲公) - 아무것도 하지말라

[쿠오바디스와 행로난](21) 훌륭한 군주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과한 해석처럼 보일 수 있다. “천하는 공적이다”라는 뜻의 천하위공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광장의 외침과 연동한 것 말이다. 그러나 이는 뜻풀이가 아니라 해석이다. “天下爲公”의 직역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행한 재해석이다. 과거의 쏠쏠한 유산을 현재로 소환할 때 곧잘 활용되는 ‘바꿔 읽기’의 결과다. 

■‘바꿔 읽기’라는 독법 

천하위공은 유교 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이념이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적이게 되며, 현명하고 유능한 이가 선발되어 미더움을 도모하고 조화를 닦는다”가 그 출처다.

대도, 그러니까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적인 것이 되어 도덕적, 실무적 역량이 검증된 이들이 관리로 등용돼 세상을 믿을 수 있는 사회, 조화로운 사회로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흠잡을 바 별로 없는 훌륭한 말임에 틀림없다. 다만 신뢰 사회, 조화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관리층이 설정됐다는 점이 걸린다. 우리의 문명조건과 맞지 않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바꿔 읽기가 가능하다. 유교 경전엔 관리가 되고자 하는 식자층에게 한 말이 실려 있으니, 지식이 민주화된 근대 이후로 치자면 이는 시민계층에 대해 한 말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언급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남는다. 너무 이상적이라는, 사뭇 비현실적이란 인상을 씻어내기 어렵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이 실린 <예기>가 다룬 시대, 곧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전하는 <사기>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문명조건의 차이가 무척 큼에도,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이념의 실현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말이다.

■‘꽃미남’이라는 요행 

사마천은 세상 살기 좋았던 문·무제 시절에도 무능력하지만 뛰어난 외모 하나만으로 권세를 누린 이들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사마천은 세상 살기 좋았던 문·무제 시절에도 무능력하지만 뛰어난 외모 하나만으로 권세를 누린 이들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역사에 간여하는 모든 요소를 <사기>에 다 담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사마천은 시운과 요행 같은 운수도 정면으로 다루었다. “힘써 경작함이 풍년 듦만 못하고, 관리로서 능력이 빼어남은 군주에게 잘 보임만 못하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또 예로부터 미모와 교태로 요행을 잡은 이가 많았음이 일러주듯, 그가 보기에 운수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위대한 인물이 미치는 영향 못지않았다.

<사기>에는 ‘영행열전’이 실려 있다. 여기서 영행은 외모가 준수하고 아첨에 능해 군주의 총애를 담뿍 받은 남성을 말한다. ‘말주변이 좋은 꽃미남’이라고나 할까, 암튼 사마천은 앞의 속담 얘기로 이 열전을 열었다. 그러고는 당시에 화제가 됐던 영행을 서술하였다. 한 문제의 총애를 입은 등통과 그 손자 무제의 아낌을 받은 한언과 이연년이 그들이었다. 

이들만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을 건국한 고조와 아들 혜제 시절 모두 사마천 표현을 쓰자면 ‘한낱’ 미색과 언변으로 황제와 기거를 같이 했던 적과 굉이란 미소년이 있었다. 특히 혜제 때에는 황제 곁에서 시중을 드는 관리들이 모두 굉처럼 화려한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으로 꾸민 허리띠를 띠고서는 곱게 화장을 했다. 심지어 공경대신들조차 그들을 통해서 황제에게 진언하기도 했다. 건국 초기의 혼란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국가 통치의 핵심인 조정 풍경이 이러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는 유도 아니라는 듯, 세상을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는 문제와 무제 시절의 영행 얘기에 치중했다. 등통은 황제 정원에 조성된 호수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었다가 문제의 눈에 들어 극한의 사랑을 받았다. 짧은 서술 분량임에도 사마천이 두 차례에 걸쳐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고 거듭 밝혔듯이, 그는 정말 무능력했다. 오로지 문제에게만 잘 보이려 애썼고, 문제 몸에 난 종기를 정성스럽게 빨아내는 등 황제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그 대가는 대단했다. 문제는 상대부란 높은 벼슬을 내리고, 억만전을 10여 차례 하사했다. 어느 관상가가 등통이 가난으로 굶어죽는다고 예언하자, 아예 구리광산을 등통에게 내리고는 맘대로 돈을 만들어 쓰라고까지 하였다. 급기야 그가 찍어낸 동전 ‘등씨전’이 천하에 널리 퍼졌으니, 그 부유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못해 문제의 고름을 빨아냈던 태자는 그런 호사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칼을 갈 따름이었다. 그러니 등통의 말로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 사후 태자가 즉위하자 등통은 재산을 몽땅 압수당했고, 수중엔 한 푼의 등씨전도 못 쥔 채로 남의 집에 얹혀살다가 굶어죽었다. 

한언은 무제가 태자였던 시절 함께 공부한 인물로, 그때부터 이미 무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황제에 등극한 후엔 그 사랑이 더욱 깊어져 늘 황제와 함께 기거하였다. 등통이 누렸던 갖은 특전을 그가 누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가호위하며 기고만장하지 않기는 어려운 법, 결국 황태후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무제는 그의 동생을 총애하였다. 외모도 비슷한 데다가 언변이 능했으니, 한언의 아바타로 손색이 없었던 게다. 영행을 밝힌 군주 중 무제의 경지가 남달랐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남매가 동시에 무제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이연년과 그 누이가 주인공으로, 이들은 예인(藝人)의 가정에서 태어난 빼어난 예인들이었다. 이연년은 죄를 지어 고환을 제거하는 궁형을 받은 채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누이동생이 춤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덩달아 그도 사랑받게 되어, 한언 수준의 특혜를 누리며 황제와 함께 기거하였다. 그러다 누이동생이 죽자 황제의 사랑도 시들었다. 그럼에도 이연년의 남동생이 궁녀와 밀통하는 등 형제가 방자하게 굴자 결국 처형되기에 이른다. 

■못난 역사는 모질게 반복되고 

“심하다. 사랑하고 싫어함이 때를 탐이! 미자하의 행적은 후인들에게 영행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백대 이후에도 그리 됨을 알 수 있다.” ‘영행열전’을 갈무리하며 사마천이 내린 결론이다.

미자하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이 총애했던 영행으로, 미색이 빛을 발할 땐 분에 넘치는 일을 자행해도 총애가 식지 않았지만, 나이 들어 미모가 시들자 영공은 젊었을 때 발칙함을 들춰내며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요행히 타고난 외모와 언변이 군주의 총애라는 행운으로 이어지면, 고관대작들조차 그들의 기세를 타고자 할 정도로 당대 현실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러다 결국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죽기 전에 반드시 나락에 처박힌다. 미자하가 그랬듯이, 그보다 300여년쯤 후의 등통, 한언, 이연년도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먼 훗날의 일일지라도, ‘미자하의 후예’라면 그 말로를 익히 알 수 있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대목은, 사마천이 미자하처럼 요행에만 기댄 삶이 필연인 양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말로만 경계했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경계는, 미자하의 후예들이 백세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리라는 통찰 위에 서 있다. 실제로 그들은 고조와 혜제 때 같은 난세이든, 문제와 무제 때 같은 치세이든 간에 때를 가리지 않고 등장했다. 요행이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역사 전개의 어엿한 동인으로 작동되어 왔음이다. 또한 이는 결코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다. 혜제 시절 고위관리마저 영행을 통해 황제에게 말을 넣었던 장면이 데자뷔처럼 다가오듯, 민주주의시대인 지금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반복되는 건 단지 영행뿐만이 아니었다. 무제 재위 때의 역사가 기술된 <무제본기>를 보면, 신선술이니 방술이니 하는 도술(道術)에 현혹된 무제의 처사가 적나라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름은 전하지 않는 어떤 무당서부터 이소군, 박유기, 소옹, 난대 같은 사이비 도사에 이르기까지, 무제의 ‘사이비 도술’ 편력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이들은 죽은 후궁을 그리워하는 무제의 심리나 불로장생을 향한 무한 욕망을 악용하여 온갖 특혜를 누리며 황제를 농락했다. 요새로 치자면, 대통령을 사적으로 장악해서 사익을 취하며 국정을 농단한 꼴이었다. 물론 무제는 이들 도사와 그에 편승한 무리들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천하를 평안케 하는 방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재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수하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고, 곳곳에 대규모 제사시설을 신축하며 천하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고대 중국인이 사유한 대동세계는 ‘빈풍권’에서처럼 인간사회와 산수자연이 조화롭고 평온하게 구현된 세계이거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투영된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하지만 저절로 잘 영위되는” 무위(無爲)의 세계였다.

고대 중국인이 사유한 대동세계는 ‘빈풍권’에서처럼 인간사회와 산수자연이 조화롭고 평온하게 구현된 세계이거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투영된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하지만 저절로 잘 영위되는” 무위(無爲)의 세계였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일락을 누리는 대신 천하를 수차례 순수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무제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런 수고로움의 근저에 신선을 만나고자 하는, 신선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무제의 사적 욕망이 강하게 작동되고 있음을 직서했다. 무늬에 현혹되지 말고 속을 제대로 응시하라고 주문한 셈이다. 대통령을 응시하다 보면 최태민 부녀 같은 사이비 도사를 마주하게 되는 이유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 

그럼, 군주를 사적 욕망으로부터 구제할 방도는 없었던 것일까? 아니 국가를 군주의 사적 욕망으로부터 지켜내는 미더운 길은 없었던 것일까? 아니었다. 요즘 거리에서, 광장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대통령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 답의 하나였다. 

군주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는 꽤 이른 시기부터 표방된 지향이었다. 공자는, 군주는 왕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의 학설과 척졌던 도가에서도 그 시조 노자가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스림을 으뜸으로 추종했다. 한비자는 공자, 노자 모두와 등졌음에도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는 경로는 다 달랐다. 공자는 적재적소에 어진 자를 앉히고, 그들에게 정사를 맡김으로써, 군주는 아무것도 안 하지만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고 여겼다. 노자는, 군주가 뭔가를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그리로 몰리게 되어 세상이 혼란케 된다고 보았다. 하여 군주는 모든 욕망을 없애야 한다고 요구했다. 설령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노자의 후예였던 양주는,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이상 절대로 이타적일 수 없으니,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허위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남을 이롭게 한다는 미명 아래 결국은 자기 이익을 취하게 마련이라는 논리였다. 부자 되기, 복지 확대 등을 들고나와 대통령이 된 후 사리사욕에 몰두했던 근자의 우리 역사는 양주의 통찰이 허투가 아니었음을 방증해준다. 

한비자도 성공적인 군주가 되려면 아무것도 말라고 요구했다. 도가에서처럼 군주는 무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군주가 어떤 욕망을 품든 그 욕망을 신하와 백성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두 다른 욕망에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직분에 충실하게 되어 세상이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견해였다. 정치적, 실무적으로 유능한 군주를 표방한 법가다운 주장으로, 군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욕망 갖춤이 아니라 세상을 공평무사하게 경영하기 위한 ‘결과적 무욕’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들의 요구는 지금 광장 가득 울리는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국가를 더는 망가뜨리지 못하게, 자신의 사리사욕을 더 이상 꾀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지만, 저 옛날엔 최고 통치자가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게끔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달리 말해, 군주인 이상 항상 그리고 오로지 공적이어야 함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그렇게 천하가 공적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능동적 조치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11251921005#csidx244516b67b01171ba969f549c8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