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리잘, 마지막 인사

2017. 11. 6. 03:04정치와 사회

1896.12.30 호세 리잘의 마지막 인사, 그리고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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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96.12.30 호세 리잘의 마지막 노래

 

1896년 12월 30일 일단의 소총 부대 앞에 한 작달막한 남자가 섰다. 몇 분 뒤면 총살을 당할 운명의 그는 죄수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죄수가 아니며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니 정장을 입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아울러 총을 치켜드는 군인들 앞에서 그는 돌아서서 등을 보인다. 총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앞을 보고 서면 죽으면서 당신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느니 내 조국 품에 안겨 죽는 것이 낫다." 뒤돌아선 그의 등에 총알이 퍼부어지고 남자는 쓰러져 숨을 거둔다. 필리핀의 국가적 영웅 호세 리잘의 최후였다.

 

 

호세 리잘은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학업을 종결했다. 11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천재였으며, 다작의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 철학, 경제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팔방미인에 '완소남'이었다. 외모까지도 귀골이 철철 흐르는 미남이다. 스페인 식민통치하에서도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기억,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당했던 인종차별, 그리고 필리핀 땅에서 자신의 매형들을 포함한 필리핀인들의 토지를 거침없이 강탈하는 스페인인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유학 시절 탈고하여 스페인에서조차 큰 화제가 된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소설은 필리핀인들에게 널리 읽혔고 스페인 식민 당국은 노발대발하여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친지들은 귀국을 만류했지만 그는 필리핀에 돌아왔다. '독일 의사'로 불리며 동포들에게 의술을 펼치던 그는 농부들의 소작료 인상 반대 시위를 조직하면서 또 한 번 당국의 눈에 가시가 됐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필리핀을 떠나 홍콩에서 의사로 명성을 날리며 돈도 벌었지만 그는 끝내 필리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쟁터는 바로 필리핀이다 ."

 

스페인 당국은 귀국한 리잘을 가만 놔 두지 않았다. 리잘이 그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이 단체를 통한 필리핀 인들의 단결을 천명한 뒤 그는 바로 체포되어 다피탄이라는 시골로 유배된다.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리잘은 자신의 돈을 들여 마을에 전기를 놓았고 직접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큰 공사(?) 중 하나는 폭포가 딸린 수영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사였다. 그는 유럽에서 그 심한 차별을 겪으며 배운 의술을 자신보다 더 심하게 차별받고 경멸받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심성 고운 의사였고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었다. 그는 때로 총독에게 자신의 자유를 청원하기도 했고 해외에 나가겠노라 요청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에 가담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 민중을 사랑했고 뻔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억지로 돌아왔으며 남국의 태양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리는 필리핀 아이들을 사랑했고, 스페인 당국의 수탈에 허덕이는 필리핀 인민들을 부둥켜 일으켰다. 그것은 죽을 죄목이었다.

 

1896년 호세 리잘의 유배형 소식에 분노했던 필리핀 청년 중의 하나로서 리살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안드레스 보니파쇼가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스페인 당국은 당장 이 봉기의 배후로 리잘을 지목했고 리살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끝내 1896년 12월 30일 총살대 앞에 서게 된다.

 

 

죽어가기 전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필리핀인들에 의해 애송되는 일종의 국민시(詩)다. '마지막 인사'라는 이 시의 처음과 끝연만 골라 읽어 본다.

 

"잘 있거라,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받는 태양의 고향이여.

동방 바다의 진주,

잃어버린 우리의 에덴 정원이여!

나의 이 슬프고 암울한 인생을,

기꺼이 너를 위해 바치리니,

더욱 빛나고,

더욱 신선하고,

더욱 꽃핀 세월이 오도록

.....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의 아픔 중의 아픔이여,

사랑하는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들으라.

여기 너에게 모든 것을 놓고 가노라,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의 사랑을,

나는 가노라,

종도 살인자도 압제자들도 없는 곳으로,

신앙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그 곳,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신 그 곳으로

안녕히 계세요,

어머님 아버님,

잘 있거라, 형제들아,

내 영혼의 피붙이들아,

잃어버린 조각에 사는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아,

피로하고 지친 날을 내 이제 쉬게 되었음을 감사 드려 다오,

잘있어요

다정한 이국의 아가씨,

나의 친구,

나의 즐거움이여

잘있어요, 죽는다는 것은 쉬는 것

 

 

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1890년 12월 30일 호세 리잘은 조국의 땅을 품으며 쓰러진다. 한 번도 무장해 본 적 없던, 누구를 공격한 적도 없던, 하지만 압박받는 동포들을 통분해 하며 작은 주먹을 부르쥐었던 의사는 그 죽음으로 독립 투쟁의 불씨가 되고 봉화가 되고 들불이 된다. 그의 죽음에 분격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인들에 저항하여 일어서고 그들은 독립을 쟁취한다. 물론 그 짧은 기쁨은 미국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긴 하지만.

 

호세 리잘이 죽은 날, 우리는 리잘만큼이나 우리에게 큰 산이었던 한 사람과 이별해야 한다. 전 민청련 의장. 전두환의 폭압의 불대포를 맨 앞에서 받아야 했던 사람.

 

온몸이 타들어가고 벌레같이 짓이겨지고 짐승처럼 울부짖게 만드는 고문 속에서 그는 악마들에게 항복했었다. 발가벗은 채 바닥을 기면서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과 자주 만났다"고 읊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꿈에도 끄집어내기 싫은 순간 순간을 그 머리 속에 한 땀 한 땀 기억의 문신을 새기는 괴력을 발휘한다. 고문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사람들도 허다했지만 김근태의 증언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으로 보전한 사람들은 없었다.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고, 조서에 날인할 때 얼른 사법경찰관 아무개라고 쓰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고문을 당해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고문자들이 자기들끼리 시집간 딸 잘사는지, 체력장 친 아들놈은 잘 쳤는지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정황을 기억해두었다." (한홍구 교수)

 

인간의 극한을 넘나드는 지옥의 가마솥에서 육신은 삶아 문드러졌을지언정 그의 눈과 귀, 머리는 그 양팔을 들고 기름에 튀겨대는 악마들을 규명해 냈고, 세상에 폭로했다. 고 이영희 선생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진실로 큰 인물이며,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라 극찬해 마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오늘 그가 목숨 걸고 폭로한 고문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악마의 발톱이 낸 상처의 덧남을 피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는 우리 곁에 없는 그 역시 "그 슬프고 암울한 인생을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바쳤"지만 이제 그가 사랑하던 가족들, 동료들, 후배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종도 살인자도 압제자도 없는 곳으로" 갔다.

 

김근태 전 의원의 애창곡은 "사랑의 미로"라고 들었다. 그것이 애창곡이 된 이유는 슬프다. 여느 때처럼 감옥에 갇혀 있던 즈음,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고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던 김근태는 유치장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미로'를 외우고 또 외웠다고 했다. 막상 생일날 면회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을 때 김근태의 목은 고문으로 망가져 있었다. 꺽꺽거리며 부르는 김근태 앞에서 아내 인재근은 펑펑 울면서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고 했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 사랑으로 눈 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 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

 

리잘의 때나 지금의 때나 어쩌면 그리도 신은 개념이 없는가. 왜 좋은 사람들은 그리도 일찍 앗아가는가. 아니 그것까지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한 사람을 저렇게 망가뜨린, 볼펜을 끼우고 손톱을 찌르고 통닭처럼 매달고 칠성판에 붙들어매고 전기를 흘리고 물을 먹이고 어깨를 빼 버리던 악한이, 그 악마의 종자가 다른 직업도 아닌 자신의 사제가 되어 "자신은 고문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라고 지껄이고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그 독사같은 혀를 날름거리는 판에 대체 어떻게 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따위로 행동하면서 공의롭게 세상 만물을 주관한다는 타이틀을 휘감을 수 있단 말인가.

 

 

기적을 바라지만 심술궂은 신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서 리살의 인사를 들어야 한다. "잘 있거라, 형제들아. 내 영혼의 피붙이들아. 잃어버린 조각에 사는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아, 피로하고 지친 날을 내 이제 쉬게 되었음을 감사 드려 다오."

 

나는 그의 형제도 아니고 피붙이도 아니며 친구도 아니지만 리잘보다는 백 배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 인물, 우리가 그 크기의 반도 쓰지 못했지만 그 반조차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만큼 컸던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기도한다. 리잘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죽는다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래. 당신은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순 넷 나라와 나라 사람들을 위해 평생 달려온 육신을 쉬는 것이다. 푹 쉬시라......."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에서 이제는 떠나, 아무것도 돌아보지 말고 푹 쉬시라.. 푹 쉬시라......안녕히.

 

김근태 그 이름 석 자 잊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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