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DNA
청나라 외교관의 경멸적 언사
중국 외교의 우월감 뿌리인가
시진핑의 역사책임·시련론은
“대국이 소국에 얘기하는 듯”
중화의 표리부동은 오랜 속성
“겉과 속 달라야 세련된 인간”
한반도 영향력 회복이 ‘중국몽’
자발적 사드 후퇴, 외교난조 낳아
문재인 방중은 지피지기 돼야
하여장은 조선과의 수교를 영국 공사에게 권유했다. 거기에 조선에 대한 오만한 판단과 경험을 덧붙였다. 그 무렵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이 나왔다. 황준헌은 하여장 밑의 참사관이다. 그 책엔 하여장의 전략이 담겨 있다. 그 시절 대륙의 우월감은 반도의 좌절감이었다.
지난달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있었다(베트남 다낭). 시진핑의 언어 선택은 기묘했다. “중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있어서 쌍방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歷史負責), 중·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며, 양국 인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태도로 역사의 시련(歷史考驗)을 견뎌낼 수 있는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
중대한 이해는 사드 배치다.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 시련’은 무엇인가. 시진핑은 직설을 피한다. 역사를 얹힌 표현을 구사했다. 그 방식은 이례적이다. 그런 말들은 우회적인 자극이다. 고상한 듯하지만 뒷맛은 고약하다.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중국 지도자들이 회담에서 그런 말을 쓰기도 한다. 이번 경우는 의미심장하다. 한·중 간 역사 인식은 민감하고 독특하다. 그 표현은 대국이 소국에 얘기하는 듯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역사는 시진핑식 수사(修辭)학의 장치다. 시 주석은 “역사는 가장 좋은 스승(最好的老師)이다. 역사는 한 국가의 지나온 발자취를 충실히 기록하고, 미래의 발전을 제시해 준다”고 했다(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2014년 3월). 언어가 역사에 기대면 달라진다. 함축과 격조가 생겨난다. 때로는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린다.
시 주석은 역사로 한국에 데뷔했다. 그의 2014년 서울대 강연은 강렬했다. “임진왜란 때 양국 국민은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해 전쟁터에 같이 나갔다. 명나라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순직했다.” 그 말들은 한국인의 역사적 감수성을 낚아챘다.
대다수 한국인은 친근감을 느꼈다. 박근혜 외교는 그 강연을 역사 연합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국은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 도발을 공격했다. 하지만 역사동맹은 미련한 짓이다. 동북공정의 중국식 왜곡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는 냉정하다. 북한의 존재 가치를 잊지 않는다. 중국에 북한은 완충의 전선이다. 시진핑 언어의 선택은 정밀하다. “중국과 북한은 선혈로 응고된(鮮血凝成的) 관계다.”(7월 베를린 한·중 정상회담) 선혈은 동맹보다 단단하고 장렬하다.
시진핑의 언어는 바뀌었다. 지난 4월 그는 “한국이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했다. 그의 역사 인식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언론 공개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설명 내용은 심상치 않다. “(플로리다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얘기했다.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에 대해 말했다. 10분 후 나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시진핑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불쾌하고 불길하다. 다수 한국인에겐 의심과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들은 시진핑에 대한 친밀감을 거두어버렸다. 우리 정부는 내막을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는 비겁함이 깔렸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도 침묵했다. 아베·트럼프가 그런 식의 발언을 했다면 어땠을까. 미·일 대사관 앞은 시민단체 촛불로 넘쳤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 발언이 동북아 질서 재편의 전환기적 성격을 담고 있어서다.
그 말의 후유증은 은밀하지만 깊었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중국을 다시 관찰했다. 그것은 역설적인 학습효과다. 중국인은 다중적이다. 김명호 성공회대 석좌교수(『중국인 이야기』 저자)의 지적은 실감 난다. “중국인 성향에 겉과 속의 다름이 있다. 중국인들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해야 세련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겉과 속이 같으면 동물이고, 예절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진핑의 중국몽(夢)은 역동적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그의 꿈이다. 그는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고 했다(2014년 3월). 그 말은 나폴레옹의 경계심을 인용했다. 나폴레옹은 “잠자는 사자 중국이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했다. 중국몽의 한반도 부분은 독점적인 영향력 회복이다. 중국은 청일전쟁(1894~95년) 패배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것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첫 경험이다. 그 때문에 상실감은 크다. 복원은 중국 리더십의 역사적 비원(悲願)이다.
신중국 건설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렇게 다짐했다. “‘슬프다, 중국은 장차 망할 것인가’로 시작하는 책을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은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정복, 중국의 종주권 상실을 쓰고 있다.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의무라고 자각했다.”(에드거 스노 『모택동 자전, 중국의 붉은 별』) 그 책을 번역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마오쩌둥의 역사적 의무는 한반도에서 종주권 회복”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내전 상대는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다. 1943년 11월 미·영·중 지도자의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장제스는 중국 대표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장제스 총통을 만나 보니) 종전 후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심(wide aspirations)을 가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그 감회는 미 국무부의 비밀 기록(FRUS)에 들어 있다. ‘야심’은 마오쩌둥의 염원과 같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자유독립 조항이 들어갔다. 루스벨트가 조항 삽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장제스가 그 조항을 넣었다”는 상식은 과장된 전설이다. 장제스는 조연이었다. <카이로 회담 70주년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
시진핑은 다짐한다. “나라가 강대하면 패권을 추구한다(國強必霸)는 낡은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드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선 그렇지 않다. 중국의 전략적 이득이 충돌하는 곳이다. 거기엔 패권적 위세가 넘친다. 중국 외교의 이해타산은 정교하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은 “한국인은 불의(不義)를 못 참는다, 중국인은 불이익(不利益)을 못 참는다”고 했다.
사드 논란에서 한국 외교의 선택은 후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졸렬하고 부당하다. 우리 정부의 대처는 어수룩하다.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도 하지 않는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3불(不)’의 족쇄를 채웠다. 그 내용은 ▶사드 추가 배치 검토하지 않음 ▶미국의 미사일방어(MD)망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다. 하지만 중국은 사드 사용 제한의 ‘1한(限)’도 꺼낸다. 대국에 숙이면 계속 밀린다. 비굴하면 더욱 초라해진다. 중화의 전통적인 조공(朝貢) 기질이 되살아난다. 사드 갈등은 ‘봉인’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면 외교의 난조와 패주로 이어진다.
중국의 경제·군사력은 강하다. 하지만 한국은 스스로 주눅 들어 있다. 30년 전 한국 사회의 주역들은 다부졌다. 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기 세대다. 그 세대가 이룬 10년은 한· 중 관계에서 신화를 남겼다. 그 10년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97년 IMF 외환위기 전까지. 88년 전후 공산권이 열렸다. 반도의 북방은 한국인의 변경(邊境)이었다. 북방외교는 공세적이었다. 기업인들은 진취와 도전으로 무장했다. 중국은 한국의 산업화를 배우려 했다. 베이징에서 한국인들은 조상들의 사대의식을 떨쳐버렸다. 그 풍경들은 중국과의 수천 년 관계에서 전무후무했다.
한국은 중국의 늪에 빠졌다. 한국 외교의 평판은 망가졌다. 홍콩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without firing a shot) 이겼다”고 했다. 한국은 중국과 친근해야 한다. 하지만 당당한 우호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그것이 한국 외교의 도전 과제다.
한국 외교는 중국을 제대로 모른다. 그 때문에 오판은 크다. 청와대의 기대 수치는 심하게 어긋난다. 외교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출발점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시진핑의 역사 공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따라야 한다. 중국의 역사적 비원을 정교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청와대·외교부의 긴급 숙제다. 문 대통령의 13일 중국 방문은 그런 자세로 진행해야 한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신중국 건설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렇게 다짐했다. “‘슬프다, 중국은 장차 망할 것인가’로 시작하는 책을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은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정복, 중국의 종주권 상실을 쓰고 있다.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의무라고 자각했다.”(에드거 스노 『모택동 자전, 중국의 붉은 별』) 그 책을 번역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마오쩌둥의 역사적 의무는 한반도에서 종주권 회복”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내전 상대는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다. 1943년 11월 미·영·중 지도자의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장제스는 중국 대표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장제스 총통을 만나 보니) 종전 후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심(wide aspirations)을 가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그 감회는 미 국무부의 비밀 기록(FRUS)에 들어 있다. ‘야심’은 마오쩌둥의 염원과 같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자유독립 조항이 들어갔다. 루스벨트가 조항 삽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장제스가 그 조항을 넣었다”는 상식은 과장된 전설이다. 장제스는 조연이었다. <카이로 회담 70주년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
시진핑은 다짐한다. “나라가 강대하면 패권을 추구한다(國強必霸)는 낡은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드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선 그렇지 않다. 중국의 전략적 이득이 충돌하는 곳이다. 거기엔 패권적 위세가 넘친다. 중국 외교의 이해타산은 정교하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은 “한국인은 불의(不義)를 못 참는다, 중국인은 불이익(不利益)을 못 참는다”고 했다.
사드 논란에서 한국 외교의 선택은 후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졸렬하고 부당하다. 우리 정부의 대처는 어수룩하다.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도 하지 않는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3불(不)’의 족쇄를 채웠다. 그 내용은 ▶사드 추가 배치 검토하지 않음 ▶미국의 미사일방어(MD)망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다. 하지만 중국은 사드 사용 제한의 ‘1한(限)’도 꺼낸다. 대국에 숙이면 계속 밀린다. 비굴하면 더욱 초라해진다. 중화의 전통적인 조공(朝貢) 기질이 되살아난다. 사드 갈등은 ‘봉인’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면 외교의 난조와 패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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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제·군사력은 강하다. 하지만 한국은 스스로 주눅 들어 있다. 30년 전 한국 사회의 주역들은 다부졌다. 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기 세대다. 그 세대가 이룬 10년은 한· 중 관계에서 신화를 남겼다. 그 10년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97년 IMF 외환위기 전까지. 88년 전후 공산권이 열렸다. 반도의 북방은 한국인의 변경(邊境)이었다. 북방외교는 공세적이었다. 기업인들은 진취와 도전으로 무장했다. 중국은 한국의 산업화를 배우려 했다. 베이징에서 한국인들은 조상들의 사대의식을 떨쳐버렸다. 그 풍경들은 중국과의 수천 년 관계에서 전무후무했다.
한국은 중국의 늪에 빠졌다. 한국 외교의 평판은 망가졌다. 홍콩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without firing a shot) 이겼다”고 했다. 한국은 중국과 친근해야 한다. 하지만 당당한 우호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그것이 한국 외교의 도전 과제다.
한국 외교는 중국을 제대로 모른다. 그 때문에 오판은 크다. 청와대의 기대 수치는 심하게 어긋난다. 외교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출발점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시진핑의 역사 공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따라야 한다. 중국의 역사적 비원을 정교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청와대·외교부의 긴급 숙제다. 문 대통령의 13일 중국 방문은 그런 자세로 진행해야 한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한국인은 어린애 같다"···그 137년 뒤 시진핑의 역사 공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