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뉴욕 한인타운 플러싱을 지인과 함께 걷던 나는 재미있는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매일잔치집’이라는 식당간판이었다. 외국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친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잔치가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일 년 내내 휴일을 보내고 있다면 스포츠도 일하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등장하는 짧은 대사도 떠올렸다. 매일 잔치를 벌인다면 준비하는 사람은 물론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조차도 오래지 않아 피곤하게 된다. 축제가 커질수록 악마는 더 독해진다는 독일 속담도 잔치나 축제가 남길 일상 속의 허탈감을 경고한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만은 갈등과 증오를 넘어 화해와 평화를 우리 땅에 불러오는 즐거운 축제로서 앞으로도 그의 생명력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평창 올림픽이 2월9일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두 번 낙방 끝에 힘들게 개최에 성공했지만 평창은 처음에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은 비슷한 영문표기를 하는 평양과 혼동하기도 했다. 실제로 평창 가겠다고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평양 가는 표를 여행사에서 발부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실소한 적이 있다. 북측이 전격적으로 이 축제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서 여자 아이스하키에서 남북 단일팀이 성사되었고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입장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평창 올림픽’이 ‘평양올림픽’이냐며 현 정부를 공격하는 소모적인 이념공세도 나타났다. 북핵위기의 여파를 빌려 평창 올림픽을 대정부 투쟁의 새 과녁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IOC 바흐 위원장은 평창 올림픽을 열심히 준비해온 사람들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제 축제는 시작되었다. 이 축제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되살아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분위기를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는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특히 북측은 명실상부한 고위급 대표단의 파견을 통해 남북관계의 개선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공식초청까지 했다. 이런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가 올림픽축제와 어울린 분위기에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계속되는 공세는 축제 이후를 상당히 우려하게 만든다. ‘즐거운 저녁잔치가 슬픈 아침으로 이어진다’는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축제가 끝난 후 한반도가 다시 갈등의 격랑에 휩쓸릴 경우를 우리는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우리는 축제가 우리 땅에 진정한 평화의 새로운 기운을 확고하게 내릴 수 있도록 일상을 더욱더 차분하게 꾸려야 한다.
2030세대가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사회 일각에서는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취직난에 허덕이는 젊은 세대의 가슴에 직접 와닿지 않는 통일이야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나돌자 이들이 느낀 당혹과 불만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축제에만 신경 쓴 나머지 통일 문제를 절박하게 느끼지 않고 성장한 세대의 생활세계를 경시한 데도 원인은 있다. 축제는 짧고 일상은 길다.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남북이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언론의 책무다. 새삼스러운 지적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적 사고가 여전히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구나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무장된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는 정보화시대의 어두운 측면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독일의 풍자작가이자 언론인인 쿠르트 투홀스키(1890~1935)는 “축제는 지속되겠지만 그 동기는 짧게 남는다”고 경고했다. 언론매체가 본래 지향했던 축제의 목표보다는 지엽적이고 선정적인 대목만을 대서특필해서 사회갈등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진정한 언론인은 ‘침묵’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고 이를 자주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평했다. 모르겠거나 사실확인이나 검증을 할 수 없을 때 언론인은 무책임한 말이나 공허한 글보다 차라리 사려 깊은 침묵을 택할 것을 차제에 나도 권하고 싶다.
축제가 끝나고 일상이 다시 돌아오면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이 기다리겠고 그 맨 앞 줄에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물론 짧은 축제기간에 이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상호신뢰에 기초한 새로운 분위기를 이 기회에 남북이 함께 만들지 못한다면 축제 이전보다 더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래도 설마 전쟁까지 일어나겠느냐고 자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북·미 간의 대결구도는 작은 판단착오만으로도 순식간에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하는 갈등으로 전화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무력에 의한 응징과 같은 모험보다는 면밀하게 계산된 여러 압박수단에 의존해 앞으로도 북핵 문제에 대처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이 나돈다. 평창축제 개회식에 참가한 미국 펜스 부통령이 보여준 무례한 행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코피작전’이 아직도 운위되는 현실, 바로 그 속에 숨어있는 불길한 우연의 힘을 우리는 정말 무시만 할 수 있겠는가.
전 세계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큰 축제는 사실 그리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평창 올림픽은 이를 지켜보는 지구촌 모든 사람의 가슴에 평화를 향한 우리의 뜨거운 열망과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올림피아의 유적발굴작업을 이끌었던 독일의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1814~1896)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에는 지고의 선과 미를 실현하려는 인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힘에만 의거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전체의 생활력은 커지며 모든 개인의 힘도 강화되고 정돈되며 세련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며칠 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그를 기려 명명된 ‘쿠르티우스 거리’를 걸었다. 그의 유지가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는 꼭 실현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