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진정한 ‘힐링’이란
진정한 ‘힐링’이란
▶ 한국의 4가구 중 1가구는 혼자 삽니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러분 주변엔 결혼적령기(라고 알려진)를 맞았거나 이미 지나버린 젊은이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또한 당신이기도 하고요. 그런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혼자서도 잘 사는 홀로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사연도 기다립니다. fkcool@hani.co.kr로 보내주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욕망과 영성, 그리고 사랑일까? 편안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내 삶이 변할 수 있을까? 게티이미지뱅크
여행, 심리 상담, 종교, 사랑…
여성을 위한 수많은 힐링상품들 공허하고 소비적인 모험담 대신
무모한 ‘상실의 여정’은 어떨까
변화는, 편하거나 즐겁지 않으니 도대체 언제 적 힐링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만큼 힐링의 유행은 길었다. 욜로, 워라밸 등으로 포장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재가공됐다. 그래서 나는 힐링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끌어올린 불멸의 에세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2006년에 출간돼 전세계 1천만부 판매 기록을 올리고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기억하는가? 작품의 줄거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남편, 그리고 별거 중에 만난 연인과 이별한 주인공이 무려 ‘진정한 욕망과 영성 그리고 사랑’을 찾아서 낯선 세계로 떠난다는 것이다.나는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사서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비판적으로 읽으려 했음에도 이 작품이 지닌 재미와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워낙에 글을 잘 쓰고 또 여성이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하면 떠오르는 미식, 요가, 명상, 일년 내내 계속되는 여행, 마침내 찾은 새로운 사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작가가 서술하는 내밀한 감정의 변화와 깨달음이 훨씬 더 그럴싸하다. 만약에 이 정도의 행복과 해방감, 극적인 변화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탈리아와 인도, 인도네시아를 떠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하지만 그럼에도, 이 매력적인 모험담은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체험을 따라가면서도 모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에게 ‘체중을 5킬로그램만 줄일 수 있다면’, ‘저 가방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이라는 진부하고 어리석은 가정과 시도가 있었다면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그것을 가져다가 ‘로마 남자에게 이탈리아어를 배운다면’, ‘인도인 구루를 섬긴다면’, ‘늙은 주술사에게 인생을 관통하는 예언을 듣는다면’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본질은 적당히 가려둔 채 타인의 인정만을 갈구하는 지겨운 돌림노래.내친김에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욕망과 영성, 그리고 사랑인가? 수많은 통계와 분석에 의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여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방해하는 유리 천장과 좁혀지지 않는 남성과의 임금 격차, 낮은 지위가 아닌가? 그런데 왜 매스컴과 각종 문화 상품은 여성들에게 “여행이나 다녀와”, “종교를 가져보는 건 어때?”, “남자와 로맨스가 필요한 거야” 같은 밀어만 속삭이는가? 소비로써 위안을 얻는 것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이 된 지 오래라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변화를 위한 근본적인 쇄신이나 노력이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여담이지만 내가 구입한 책을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여성도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것 같다. 책장을 넘긴 흔적조차 없는, 새 책이나 다름없는 책의 맨 앞 장에는 ‘나의 영원한 힐링 멘토 승희 언니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선물받은 힐링 멘토는 책을 들추지도 않고 팔아버렸다. 어쩌면 수중에 떨어진 현금이 이 책의 메시지보다 더 확실한 위로를 선사했는지도 모른다.쾌락, 로맨스 없는 힐링은?그리고 나는 뜻밖의 행운과 마주쳤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만큼 초대형 히트작은 아니지만 2012년 베스트셀러 차트를 석권한 에세이 <와일드>(셰릴 스트레이드 지음)를 발견한 것이다. 이 책 역시 영화로 제작돼 리스 위더스푼이 주연을 맡았고 2014년에 개봉했다. 주인공 셰릴은 이혼 후에 ‘길을 잃다’는 의미의 ‘스트레이드’(strayed)로 성을 바꾸고 자그마치 4285㎞에 이르는 ‘태평양 종단 길’(PCT) 완주에 도전한다.이 무모한 여정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처럼 무엇을 찾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리기 위한 것이다. 겨우 스물여섯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몸집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4개월 동안 걷기만 한다. 오직 길을 잃기 위해서! 상실에 상실로써 맞불을 놓으며 나락까지 떨어진 삶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그래서 셰릴이 자초한 고행에는 쾌락이나 구루, 로맨스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는 오직 자신과 낯선 세계, 그 세계에서 맞닥뜨리는 공포,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과 싸우느라 바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출간된 지 6년 만에 힐링에서 고행으로 방향을 튼 30대 여성의 서사가 등장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결코 편안하거나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순간 못 견디게 불편하고 당장에 포기하고 싶은 욕구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실패를 부추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태평양 종단 길은커녕 북한산 둘레길을 12시간쯤 걷고 무릎을 다쳐 병원 신세를 진 나조차도 알고 있는 진실이다.All Alone